편지는 송신자인 당신이 어딘가에 있지만 지금 여기에는 없다는 증언이다. 거꾸로 말하면 당신이 지금 여기에는 없지만 어딘가에는 ‘수신인, 나’를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편지는 우리가 지금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편지를 쓰는 일은 어렵지만 행복한 일이다. 여기 없는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문장을 한 올 한 올 되새김질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 자체가 축복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막상 편지를 부치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순간을 그토록 기다려 왔으면서도 막상 내 이 순간이 오니 용기가 사그라진다. 설렘을 가득 안고 한밤중에 썼던 편지가 아침에 일어나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운 고백’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편지는 한때 거기 있었으나 지금은 없는 인연의 쓰라린 재확인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흘러 그 사람도 그 눈빛도 여기에 없지만, 사람들은 오래 전 그곳에 방금 채색을 마친 그림처럼 생생하고 오롯했던 인연의 흔적을 더듬는다.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를 향해 오고 간 물건을 처분할 때도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이 바로 사진과 편지다. 편지는 마음의 표현이지만, ‘한때 거기 있었지만 지금은 여기 없는 마음’의 아픈 확인일 수도 있다. 편지에는 필연적으로 시간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때 거기서 행복했던 우리 vs 이제는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인연의 폐허.

서간체 소설은 편지의 이런 ‘부재 증명’과 ‘시간차’의 매력을 한껏 활용한다. 특히 전화와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편지를 향한 기다림, 편지가 오기까지의 시간차, 편지를 전달하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 자체가 훌륭한 이야기의 소재가 된다. 아날로그 시대의 편지는 소통의 최첨단인 동시에 오해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영화 <노트북>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의 편지를 여자의 엄마가 수년 동안 꾸준히 가로채 갈 수도 있고, 소설 「위험한 관계」에서처럼 마음을 전달하는 줄로만 알았던 편지가 마음을 왜곡하고 마음을 숨기는 폭력의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성복의 「편지」는 그녀에게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매일 필사적으로 쓰는 시적 화자의 끝나지 않는 사랑의 고백은 곧 자동적으로 이별의 선언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편지

이성복

1

그 여자에게 편지를 쓴다 매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내 동생이 보고

구겨버린다 이웃 사람이 모르고 밟아버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있다 아이들이 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길 가다 보면

남의 집 담벼락에 붙어 있다 버드나무 가지

사이에 끼여 잇다 아이들이비행기를 접어

날린다 그래도 매일 편지를 쓴다 우체부가

가져가지 않는다 가져갈 때도 있다 한잔 먹다가

꺼내서 낭독한다 그리운 당신…… 빌어먹을,

오늘 나는 결정적으로 편지를 쓴다

(……)

안녕

오늘 안으로

당신을 만나야 해요

편지 전해줄 방법이 없소

잘 있지 말아요

그리운……

이성복의 「편지」는 반드시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마음을 결국 전하지 못한 시적 화자의 절절한 독백이 되어 실패한 사랑의 모든 비극을 향해 뼈아픈 울림이 된다. 그녀에게 전하지 못한 편지는 불특정 다수의 ‘이별의 회한을 곱씹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수없이 다시 읽히고, 새로운 아픔으로 되살아난다. 어떤 편지는 ‘수신자’에게 전해지지 못하지만, 특정한 수신자에게 전해지지 못한 편지는 ‘문학’이라는 울림통을 통과하여 오히려 더 많은 타인들에게 울려퍼질 수도 있다. 당신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끝내 그녀에게 전달되지 못하지만, 당신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함께 할 수 없었던 그 슬픔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해진다.

즐거운 편지

황동규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왜일까. 보내지 못한 편지가 이미 전해진 편지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당신에게 보내지 못한 마음이 당신에게 이미 보낸 마음보다 더 안타깝게 느껴지는 것은. 편지는 그렇게 ‘우리 마음에 존재하지만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을 꺼내 보게 된다. 이 편지를 보내면 내 고백은 끝난다. 그러나 보내지 않음으로써 이 편지에 담긴 고백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만 철저히 봉인되게 된다. 영화 <러브 레터>는 한 남자가 그녀에게 직접 보내지 못한 사랑의 편지를 그가 이미 죽은 후에, 더 이상 절대로 그를 볼 수 없는 세상에서 마주해야 하는 ‘남겨진 여인’의 슬픔을 그린다. 그는 나를 사랑한 걸까, 그녀를 닮은 나의 이미지를 사랑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이미 죽어버렸다. 하지만 그가 부치지 못한 보이지 않는 편지는 그의 옛사랑, 그녀에게 전달된다. 오래 전 그녀를 사랑했던 그의 마음도, 오랜 시간이 지나 그녀가 아닌 나를 사랑했던 그의 마음도, 끝내 수신자를 되찾았다. 그가 죽은 후에도 그를 잊지 못하는 ‘나’의 마음속에, 그가 부치지 못한 그 모든 편지는 살아 있다. 편지는 ‘편지를 쓰고 싶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있지만, 편지를 받고 싶은 사람의 마음속에도 신비와 설렘과 기대의 형태로 존재한다.

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는 함께 도망치기로 약속한 남자에게 차마 ‘나는 당신을 따라 떠나지 못하겠다’고 말하지 못한 여인의 끝나지 않는 이별의 편지다. 그녀는 끊임없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없는 합당한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야만 할 것 같지만,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는 그 모든 ‘버려진 여자들의 영상’이 그녀를 그로부터 ‘떠나라’고 명령한다는 것을, 도저히 ‘이성적인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신에게로 가는 기차는 끊겼는데, 내일 첫 차는 몇 시인지 헤아려보고 있는 제 자신, 이 밤이 무섭습니다.” 수많은 말줄임표와 흘릴 수조차 없는 눈물자국으로 가득한 편지, 그것이야말로 문학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문학이란 분명 내 마음속에 그득하지만 당신에게 차마 직접 보낼 수 없는 편지, 영원히 부칠 수 없는 그리움의 편지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