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에 대한 흔한 예가 있다. 달리는 열차를 멀리서 지켜보면 열차가 움직이는 것이지만, 열차에 탄 사람의 시점에서 보자면 열차는 정지하고 배경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쉬운 예를 나이가 든다는 시간의 상대성으로도 옮겨서도 얘기할 수 있다. 사람을 멀리서 지켜보면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것이지만, 그 사람 자신의 시점에서 보자면 그저 눈앞에 보이는 배경이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시점에서 보자면 늙음을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묘한 상대성을 깨는 것이 있다. 바로 거울이다. 나를 다른 사람의 시점에서 보는 것이다. 열차 밖에 대형거울을 설치해서 달리는 나를 보게 하는 것이고,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주름이 늘고 백발이 성성해지는 늙음을 목격하는 것이다.

연극 <날짜변경선>(2014년 8월 6일~9일, 인천 학산소극장)은 이러한 상대성의 파열을 갑작스런 늙음이란 미스테리한 상황으로 만나게 한 작품이다. 주인공 형빈에게는 자신이 바라보는 배경이 시공간적으로 아무런 변함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형빈 혼자만 훌쩍 시간을 건너 뛰어 백발노인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형빈은 노동시장에서도 축출되고 애인과의 관계도 일그러진다. 형빈에게는 자신을 바라보는 부정적 시선이 더없이 힘들고 절망스럽기만 하다. 작품은 결국 이 파열된 상대성을 온전하게 인식하며, 자신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카르페디엠(현재에 살라)’을 전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보지 않고 자신이 처한 ‘현재의 시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라는 깨달음을 전한다.

<날짜변경선>의 이러한 주제가 의미를 가지는 건 우리 사회의 비극성에 기인한다. 무한경쟁과 완전체에 대한 강박, 끊임없는 비교우열 속에서 우리 사회는 늘 타인의 시선 속에서 자신을 검열하고 통제하도록 강제한다. 나는 늘 달리는 열차 속에 있어야 하고, 내 열차를 멈추고 배경을 달리게 만드는 것은 상상조차 못하게 만든다. 더욱이 노동생산편재 중심의 사회구조는 늙음을 비생산성으로 폄하하고 축출하여 탑골공원 아웃사이더로까지 전락시킨다. 그러니 예순이 넘어야 최고 속도의 달리기를 선보인다는 어느 소수민족의 이야기는 낭만적 우화가 되고, 먼저 태어나서 선생이 되고 먼저 깨달아 선지자가 되는 혜안은 그저 뒷방노인의 몽니로 평가절하되어 버린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제 속에서 <날짜변경선>의 ‘갑작스러운 늙음’은 인생퇴출의 위기 상황에 맞닥뜨린 존재적 발악의 최소조건이 된 것이다.

김태수 작가의 대중적 글쓰기는 이런 주제의식을 통해 많은 관객들의 호응을 얻는다. 다만 이 사건이 일개인에게 주어진 황당한 일이고, 그를 마주하는 주변 인물들 또한 일개인들의 사적인 의견이 되다보니 다소 주제의식 자체가 사회적 의미로 상승하지 못하고 사변화되는 아쉬움은 있다. 더불어 사건전개의 편이를 위해 돌출되는 인물들과 시공간 또한 흡사 방송 시트콤식 구성이 되어 무대적 표현의 제한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또한 형빈이 느닷없는 억대 광고모델이 된다는 등 다소 비현실적인 낭만성에 기대는 부분도 많다. 그러나 그럼에도 현재를 살아가라는 주제를 대중과 공감하려는 작가의 고심은 충분히 엿보인다.

연기 부문에서, 늙은 형빈으로 분한 조원희 배우의 연기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더 초라하고 왜소해진 노년이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노년을 맞이한 당혹감과 절망감과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의 시선을 가지려는 늙은 형빈이란 인물을 구현하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그러나 조원희 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른 조연들과 단역들의 연기는 아쉬움이 많다. 효주로 분한 유지수 배우는 젊고 활달한 성격을 구현해야 한다는 배우 스스로의 강박이 많이 엿보이고, 젊은 형빈의 김승현 배우 또한 조금 더 다듬어지고 집중된 모습이 필요했다고 본다. 단역들의 경우에도 장면이 요구하는 극적 효과에만 목표를 두다 보니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많아져 실존적 진정성을 설득하기엔 다소 아쉬움이 많았다고 여겨진다.

한편 <날짜변경선>은 무대 미술적으로 많은 시도를 했다. 시계를 상징화시켜 무대에 구현하고 백색 커튼을 활용해 영상을 투사하는 등 무대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인 듯하다. 하지만 많은 공연요소들이 결합된 만큼 오차율은 더 커지고, 개별요소들의 표현을 위해 나머지가 양보되고 제한되는 문제를 야기하고 말았다.

영상을 투사하기 위해선 계속해서 백색커튼을 닫아야 하는 인위성이 생겼고, 다소 설명적인 공간변화를 위해 테이블이나 의자 등의 세트를 매번 옮겨야 했으며, 이를 위해 극적 템포감은 포기되고 물리적인 전환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물론 급작스런 공간변화라는 희곡의 제시가 다소 한계로 작용할 수 있지만, 오히려 무대를 더 간소화시켜 극적 템포감을 살리는 디자인 운영을 고안하는 게 옳았다고 본다.

또한 무대가 미니멀한 구성을 제안한다면 영상은 그러한 미학적 방향과 연동되어 심리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대비되거나, 그 반대로 극사실로 대조시켜 영상미의 완결성을 구축했어야 했다. 하지만 <날짜변경선>의 영상은 때론 극사실로 장면을 설명하고, 또 다르게는 상징적 이미지로 콜라주를 만들어내는 등 전체적인 통일감은 사라지고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형태를 띠고 만다. 기술적 한계 또한 충분히 고려되지 않아 무대바닥에 투사선을 그려내는 등 섬세하지 못한 모습도 보였다. 결국 공연의 제 요소들을 조화롭게 운영하여 단일한 미학적 방향을 이끌어내야 하는 연출력의 비정교함으로 귀결되어지는데, 그 원인과 결과에 내부적인 평가가 충분히 수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날짜변경선>은 김태수 작가의 판타지극에 대한 일련의 시도로 이해된다. 그리고 대중적 글쓰기를 통해 주제의식을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도 돋보인다. 하지만 판타지극을 연극적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부담은 극단 집현과 극단 KOTTI에게 다소 강박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그러나 태초의 연극이 그러했듯이 판타지는 연극성 자체에 있다. 시공간을 순간이동하며 없는 것을 있게 하고 있는 것을 없게 하는 마술성은 연극에서 배우가 늘 수행해왔던 관객과의 거대한 약속이다. 제작진들이 연극 본연의 마술성으로 판타지를 이해하고 구현했다면, <날짜변경선>에 함께한 모든 제작진들의 개별역량이 더 큰 예술적 성취로 융화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