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 그리고 심리적 거리

<시간은 무게다>. 다소 철학적인 제목인 데다 현대무용 공연이라는 사실 때문에 감상에 어려움이 따르겠다고 예상했다. ‘시각예술은 추상적일수록, 음악과 공연은 사실적일수록 이해하기 난해하다’고 하는 말처럼 추상적인 시각예술을 다루고 분석하는 나로서도 행위를 표현 형식으로 삼는 무용 감상에 대한 일종의 선입견이 있음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일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무용을 비롯한 현대예술은 접근하기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연히 감상하는 방식도 생소하다.

토요일 저녁의 공연장, 예상 외로 공연장의 좌석은 관객들로 가득 차 있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가족들, 초로初老의 신사, 직·간접으로 무용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공연장의 120석은 묘한 기대와 흥분으로 들썩였다. 온통 검게 칠한 공연장 가운데에는 널찍한 순백의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관객들은 그 주위를 두 줄, 세 줄로 둘러싸는 형태로 관람한다. 사실 무대와 객석의 구분은 무의미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관객과 무용수가 하나 되어 상호작용하는 단계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다만 가까운 거리로 인하여 무용수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도 쉽게 정서적 교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뿐이다.

소리로 표현된 삶

일순간의 암전暗轉. 남성 무용수는 스포트라이트 아래 자신의 몸보다 큰 두툼한 판자를 매고 등장한다. 등에 짊어지기도 하고, 어깨에 걸친 고통스런 몸짓으로 천천히 걷기와 기기를 반복한다. 다소 공허한 그의 행위를 소음이 채워준다. 음향이라기보다는 소음에 가까운 그 소리는 누군가의 대화와 중얼거림으로, 무엇인가를 차거나 끄는 소리로, 시끄러운 일상의 소리로 간단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러한 소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장소와 상황을 의미하는지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일상의 소리’로 명명할 수 있을 법한 그 소리는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을 우리의 인생을 상징한다. 사실 모든 예술적 표현방식에 의미를 탐구하고 맥락을 이어붙이는 태도는 그리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는 현실의 무게를 상징하는 판자와 반대로 현실의 가벼움을 뜻하는 소음 사이에서 몸을 비틀고 바닥을 기는 행위를 힘들게 이어감으로써 지금도 이어지는 우리의 만만치 않은 인생의 무게를 보여줄 뿐이다.

소음이 갑작스레 멈추고 그 역시 바닥에 엎드린 채로 숨죽이고 있다. 물론 무거운 판자 밑에 깔린 채로. 객석에는 모자를 쓴 평범한 차림의 또 한 명의 남성이 있다. 일어서서 무대 한가운데로 나와 말을 잇는다. 어눌한 말투로 자신은 관객이 아닌 무용수이며, 이름은 제임스,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왔고, 한국어를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둥의 이야기를 하릴없이 건네며 평상복을 벗는다. 흰색 상의, 흰 반바지 그리고 양말만 남기고 옷과 모자를 벗은 뒤 들고 온 배낭에 차곡차곡 넣는다. 그의 뒤를 이어 세 명의 여성 무용수가 관객에서 무대로 나와 말없이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입고 온 옷을 벗어 무용복으로 갈아입고 각자의 가방에 넣는 과정에도 소음은 함께한다. 객석에서 지켜보는 관객들은 이러한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깐 동안 술렁였다.

시간의 무게를 시각화하다

그들의 몸짓은 내내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보여주는 듯 때로는 경쾌하게, 때로는 처연하게 이어진다. 전통적인 무용공연에서처럼 1인무, 2인무, 집단무 등의 전형적인 형식은 없었다. 사실 전체적인 공연의 내용상 그러한 구분은 필요치 않아 보였다. 처음 등장한 남성 무용수의 판자를 다른 네 명이 들어 벽에 기대고 서로의 윤곽을 그려주는 장면은 그 자체로 인생의 한 순간을 기록하는 듯해 흥미를 끌었다. 사실 <시간은 무게다>는 매우 시각적인 공연으로 보였다. 전형적인 무용의 틀을 벗어났을 때 그것이 취할 수 있는 전략은 많아 보이지 않는다. 시각예술의 퍼포먼스, 이벤트 등의 개념을 묶은 이른바 ‘행위예술’의 속성이 그 자리를 채울 뿐이다.

행위예술은 당연히 시각예술인 동시에 시간예술이며, 풍부한 은유와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전통적인 예술 형식과 맞닿아 있다. 여기가 흥미로운 지점이다. 소위 ‘연극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행위예술과 지금 보고 있는 무용공연은 여러 모로 닮아 있다. 몸을 중요한 매개체로 이용하는 것도 그러하고, 시간의 흐름에 그것을 맡기는 속성도 그렇다. 여기에 소리라는 비물질을 활용하는 태도 역시 양자 간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오브제object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양상마저 닮아 있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내내 물과 그것을 담은 유리병은 인생의 근원적 성찰을 돕는 매개체로, 혹은 시각적인 쾌감을 전달하는 오브제로 쓰였다. 즉, 공사장의 소음, 지하철에서의 웅성거림, 시끄러운 대로변의 소리, 술집에서의 의미 없는 대화 등의 소음과 뒤섞인 채로 무용수들의 몸과 마찰하여 포말을 그리며 흩어지는 물방울은 그대로 빛과 어우러져 회화적 요소로 작용하는 듯했다. 분명 물이라는 것은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게 해주는 물질로서의 속성과 더불어 부활, 순환과 같은 종교적·예술적 속성 또한 갖고 있다. 그러나 이 공연 내내 사용된 물은 강하고 집중적인 조명과 조응하여 점과 선을 만들어내는 회화적 재료로 쓰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연을 연출한 사람의 의도가 반감되지는 않으리라 본다. 공연을 포함한 예술 행위는 일종의 텍스트로서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맥락화할 수 있으니 말이다. 행위와 관계, 그리고 그 속에서 촉매처럼 작용하는 물의 사용으로 인하여 공연을 다 본 후에는 한 편의 움직이는 회화작품을 감상한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처럼 <시간은 무게다>는 시간, 물, 유리, 소리 그리고 행위라는 비물질적 속성으로 공간에 그리는 회화로 보였다. 그 회화는 시간에 빗대어 우리의 인생을 이야기하고, 인생은 만만치 않은 무게로 점철된 터널과 같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나 이 공연의 제목이 말하는 것처럼 무게를 지닌 것이 어디 시간뿐이랴. 시간의 무게처럼 인생의 무게와 예술의 무게 역시 준엄하고 서슬 퍼렇다. 진지한 자세로 시간이 지닌 무게를 시각화하여 그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들어준 ‘댄스 컴퍼니 명’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빈다. 앞으로 어떤 가치를 우리 눈앞에 명징하게 펼쳐보여줄지 기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