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은 책방이기에 책숲이겠지요. 사람은 사람이기에 사람숲일 테지요. 마음밥 먹으며 마음숲 가꾸고, 마음숲에서 사랑나무 자라며, 사랑나무는 이야기꽃 피워요. 눈빛을 밝혀 책을 만난 이야기를 적바림합니다.

―최종규, 머리말 중에서

책이 좋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면 '종이'라고 대답한다. 뭔가를 그리고, 쓰고, 만들고 접을 수 있는 종이라는 오브제는 그 수많은 쓰임새만큼 없어서는 안 될 사물이다. 하지만 종이가 좋은 이유 딱 한 가지만 꼽자면 그건 바로 '책' 때문이다. 살아가는 동안 숱한 경험과 사건을 만나고 행하며 그걸 이해하고 결국엔 앎과 깨달음으로 정돈해가면서 '나'란 존재를 세우고 정신이 성장하는 데에는 무엇보다 책이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믿는 까닭이다. 이리 생각하면 세상만물 중 책은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산물의 하나이다. 그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물자가 많지 않던 어린 시절부터 먹고 자는 때를 제외하고는, 심지어는 먹고 자는 시간의 앞섶마저 물고 들어올 만큼 책은 대부분의 시간적 공간을 채워준 장난감이자, 친구, 다용도 매체였다. 그리고 일반적인 독서 애호가라기보다는 활자중독자1)에 더 가깝게 닥치는 대로 글을 읽어댔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글이 담긴 책이란 언제나 아쉽고 그래서 소중한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자연히 글씨가 새겨진 종이가 좋고, 그 종이의 원료인 나무까지 한없이 소중하고 고마웠다. 여전히 공부가 모자라 평생 공부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책보다 더 예쁘고 유익하며 즐거운 동무는 없다고 믿는 입장에서 책은 최고의 행복감을 선사하는 인생의 보물이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책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와 가치를 이토록 아끼고 인정하는 입장인데도 『책빛숲』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자 자신은 물론 '책지기로서의 삶이 마흔 해를 아우르는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책을 섬기고 대하는 마음새, 책과 일체화된 삶으로 실천하며 보여주는 치열하고 경건한 자세가 경탄스러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책읽기'2)

"전 속표지에 남긴 글이나 책장 귀퉁이에 적은 글을 참 좋아해요. 누군가 넘겼던 책장을 넘길 때의 그 동지애가 좋고,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글은 언제나 제 마음을 사로잡는답니다."

―헬렌 한프, 1951년 4월 16일 편지3)

별지기와 같은 세대 사람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련만 '행복'이란 말의 의미를 따로 짚어보거나 대수로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회·역사적 조건들로 인한 시대적인 분위기가 '행복'의 밝음보다는 현실의 진지한 무게에 온통 눌렸던 때문이기도 하고, 그저 눈앞에 놓인 당장의 문제들을 해결하며 가능한 하고 싶은 일-그건 동시에 올바른 일이어야 했다-만 하면서 매순간을 잘 견뎌내면 된 것이지 가당찮게 행복까지 바라겠나 하는 심정이었으리라. "평생 내 집을 가지지 않겠다"는 다소 무모한 소신을 지키고 살아온 까닭에 능동적으로 당당하게 가난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한 가지 포기하지 못한 것이 책이었다. 행복을 따지지 않고 살았다 믿었는데 어느 날, 보고 싶은 책을 거리낌 없이 살 수 없게 되자 "불행하다"고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책을 만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 애를 쓰게 된다. '내 책'이 아닌 공동의 책들이 모인 도서관을 이용하고, 보고 싶은 신간을 위해 신청도서목록을 작성, 제출한다. 그래도 도서관의 책들은 조심스럽고 어렵다. 책의 내용인 지식과 정보를 흡수할 때의 기쁨과 설렘은 여전하다 해도 행복감은 '내 책'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하여 발길은 동네 구석구석에 드물게 자리 잡은 헌책방으로 향한다. 헌책방 나들이는 새 책을 구경하고 구입하는 서점과는 또 다른 행복한 설렘을 준다. 돌이켜보면 청계천변에 헌책방들이 건재했을 무렵, 두 살 터울의 오빠와 헌책방 순례를 작정하고 길게 늘어선 책거리 초입에 당도했을 때의 흥분과 조바심이 얼마나 컸는지 모른다. 오래된 책에서 날리는 먼지와 특유의 냄새, 세월을 머금어 누르스름해지고 살짝 도톰해진 책의 푹신함, 기억의 바닥에서 헤집고 올라와 반가운 재회의 기쁨을 선사하는 옛 책과의 만남. 갖고 싶었으나 서둘러 절판이 되어, 혹은 다른 책들에 묻혀 잊어버리고 있던 책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남이 볼 새라 냉큼 뽑아들 때의 떨림. 지난 이야기들과 숨결을 헤아릴 때의 분주한 고요. 희귀본이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새 책에 비해 턱없이 가벼운 책값에 공연히 미안해지고 한없이 고마워지는 헌책방.

책 문화를 가꾸는 애틋하고 소중한 공간, 헌책방

"그래요. 책방이 숲이지요. 왜냐고요? 책은 모두 나무를 베어서 만들어요. 나무란, 숲을 이루는 푸른 숨결이에요. 나무는 숲에 있으면서 숲을 살찌우는 넋이 되고, 나무는 종이로 바뀌어 책으로 다시 태어나면, 바로 도시 어디에서나 사람들 마음을 살찌우면서 쉬도록 이끄는 숲이 돼요." -219쪽.

『책빛숲』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책이 무엇인지, 책읽기가 무엇인지, 이 책이든 저 책이든 모두 어떻게 즐겨야 하는지, 헌책방이란 어떤 곳이며 그곳엔 어떤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가는지, 종국엔 헌책방의 책과 사람을 통해 꿈을 키우고 삶을 배운다는 사실을 말한다.

실제 헌책방들의 사진과 촘촘한 글씨로 380쪽에 걸쳐 빼곡하게 채워진 두꺼운 이 책은 열여덟 살 소년이 서점에서도 구할 수 없는 독일어 교재를 찾아 1992년 7월 <아벨서점>에 발을 들인 이후 스물 세 해에 걸쳐 마음으로 사랑하고 거기서 자신이 살아갈 지표를 찾았던 일종의 '독서회고록bibliomemoir'4)으로 볼 수 있다. 일기처럼 1998년부터 2014년까지 연대기 순으로 편집된 에세이들에는 때마다 골랐던 책들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독서일기, 더불어 글쓰기와 책 쓰는 사람들 이야기, 번역의 문제나 출판 자체에 대한 질문들, 책을 사고파는 것의 의미, 우리의 교육 현실에 관한 비판, 사회 전반의 폭력적인 개발논리에 대한 거부감, 인천 배다리를 비롯 서울, 부산에 있는 여러 헌책방들에 대한 설명과 책방지기와의 만남과 그들의 일상, 책과 관련한 저자 자신의 인생 등 히스토리history, 즉 문자 그대로 이야기이자 역사가 다채로운 리듬으로 담겨 있다. 무엇보다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고 배고픈 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읽기에 몰두한 시절 덕분에 그 소년은 글과 책을 쓰고, 헌책방 모임을 꾸리고, 우리말 사전의 편집자, 지킴이가 되었고 이 책의 저자가 되었다.

"책은 마음 고운 임자를 기다립니다. (…) 우리들은 '어느 책 한 권을 사들여' 임자가 되지 않습니다. 물건이나 물질을 건사하는 임자란 없어요. 임자라 한다면, 내 마음에 튼튼한 기둥 세워 따사로운 보금자리를 일구는 임자라 할 테지요.

스스로 우뚝 서는 임자입니다. 스스로 삶을 누리는 임자입니다. 스스로 생각을 열어 꿈을 이루는 임자입니다." -113쪽

그리하여 이 책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지은이가 추구하는 우리말 쓰기에 있다. 자리에 없는 3인칭을 높일 때 쓰는 말인 '이녁'을 비롯하여 '책손', '이듬달', '마음밥', '적바림', '벼리', '거멀못', '가시버시'……등 순 한글 단어의 빠짐없는 사용도 그렇지만 문장 서술에서도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번역, 혹은 번역 투로 된) 책들의 문장들과는 차이가 있다. 일찍이 별지기 역시 카피라이터 일을 할 때나 글을 써야 할 때면 가능한 한자어를 피하고 문장도 가능한 우리말 문장을 만들려 마음을 썼다. 현재 책이나 미디어에서 통용되는 우리의 말과 글은 걱정스럽다고 표현하기에도 무안할 만큼 병들어 있다. 따라서 아름다운 우리말을 되살려 널리 알리고 누구나 친근하게 느끼고 익숙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마음을 써야 할 무척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바탕에 두고서 이번 책을 읽으며 조심스레 고민해야 할 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입에 쓴 약이 몸에 좋으니 쉬운 책만 읽지 말고 자꾸 시선을 붙들고 힘들지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책을 읽으라고 권하는 입장이 있다. 별지기인 나 역시 강의자로서 그리 말하곤 한다. 그런 원리로 오래 쓰이지 않아 낯설어진 우리말도 다소 생경하고 선뜻 감이 오지 않아 어려워도 자주 접하다 보면 나아지고 풍성해지리라.

하지만 중질지에 작은 글씨와 촘촘한 자간으로 빼곡하게 짜인 편집과 더불어,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한데 모아서인지 평어체와 경어체로 된 꼭지들이 함께 담겨 있고, 설명과 주장이 계속 중복되거나 반복되는 점이 거슬렸다. 거기에 별지기의 개인적 독서 취향 때문인지 아직은 낯선 우리말과 문장들이 지은이가 전하려는 내용보다 훨씬 뻑뻑한 느낌으로 감싸버려 읽는 이의 시선을 막아서고, 그 의미가 머리와 가슴으로 스미는 데 자꾸 겉돌게 만든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인상에 따라 좀 더 비약하면 우리말 쓰기 역시 하나의 차별적 형식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와 함께 소통과 적응을 위해 완급조절 혹은 또 다른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는 어쩌면 책 내부의 문제라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적 고통 속에서 책에 담긴 우리말 표현들의 순수함과, 책과 책 문화에 대한 올곧게 곱고 바른 의미와 이상理想들, '꿈', '희망', '사랑', '빛' 등과 같은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개념들의 잦은 반복에 엄청난 괴리감을 느껴 오히려 지쳤던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카드도 안 해요. 정성껏 돈 가져와서 책 사 가기를 바라지. ……책을 사람으로 받아들이라는 거야. 지식으로 만들지 말고, ……헌책방이 나한테 학교가 된 거라. ……이제는 책방들이 모여서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을까. ……책과 책방에 대한 예우……책방을 물건을 사고팔고 하는 곳으로 보는 것은 아니고, 책은 역사가 담긴 것인데, 이런 생각을 잃어버리면 밀려날 밖에 없는 것이고," -225쪽, <아벨서점> 책지기 아주머니

좋은 책, 좋은 도시

유네스코가 2015년 인천을 세계 책의 수도로 선포했다. 그런 배경에는 전국 어디나 '돈 많이 버는 개발'에만 눈이 어두워 뭐든 밀어버리고 보는 이 나라에서 '명품도시 아닌 사람도시'를 추구하며,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서 작지만 열심히 이어가고 있는 인천의 책 문화를 지키기 위해 2007년 산업도로 건설안에 반대하여 끝내 철회시킨 헌책방지기들과 시민들의 노력이 들어있다. 인천 사람들은 좋겠다. 그런 작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다. 부러워만 말고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아갔듯 배다리 헌책방 거리에도 가봐야 하겠다. 아니, 그보다 우선 오늘이라도 당장 가까운 곳에 있는 헌책방 마실부터 나설 일이다. "헌책방으로 길을 떠날 때에는 넉넉하고 튼튼한 가방 하나 마련합시다. 옷차림은 단출하게. 배는 든든히. 지갑은 두둑하게."-79쪽.

"새 책방이든 헌책방이든, 책방이 문을 열 수 있는 곳은 살만한 동네입니다. (……) 책이 가장 커다란 문화이거나 가장 소담스러운 삶자락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낸 슬기와 눈물과 웃음을 깃들어 놓은 책이란, 사람이 사람으로서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거름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3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