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성姓?

디자인은, 이를테면 행위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것은 대상이 아니라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디자인이라는 말 자체에는 대상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다. 특정한 대상이, 사물이 주어질 때, 그때 비로소 디자인은 구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마치 연출이라는 개념이 구체적인 장르가 주어질 때에라야 비로소 연극 연출, 영화 연출, 뮤지컬 연출 등으로 완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디자인이란 비어 있는 이름이며, 다만 거기에 무엇이 주어지는가에 따라서 그 성격이, 실체가 뒤늦게 확인될 따름이다. 그러니까 디자인을 디자인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에 대한 구체적인 요청, 즉 주어의 존재이다. 이 주어는 달리 말하면 성姓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디자인의 성, 즉 행위의 이름에 지나지 않는 디자인에게, 그것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주어가 호명될 때, 그 때 디자인은 탄생된다. 성과 이름이 만나 온전한 하나의 이름이 되는 것처럼.

수많은 디자인의 주어들이 있다. 도시, 자동차, 광고, 디지털 미디어는 각기 도시 디자인, 자동차 디자인, 광고 디자인, 디지털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알다시피 오늘날에는 헤어스타일에서부터 생명보험에 이르기까지 모두 디자인의 주어가 되지 못해 안달이다. 그리하여 헤어 디자인과 라이프 디자인에 이어, 랜드 디자인(토지주택공사)까지 등장했다. 하긴 서울시장이 된 시민운동가 박원순도 소셜 디자이너를 자처하고 나섰으니, 과연 누가 디자인의 주어가 되기를 두려워하겠는가. 바야흐로 디자인의 전성시대, 아니 디자인 주어들의 전성시대이다.

공공, 디자인?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맘씨 좋은(?) 각성바지들의 보금자리에 새로운, 전혀 낯선 성이 하나 붙기 시작했다. 공공公共. 이것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공공은 공공으로부터 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공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이었을까. 공공은 물론 공공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공공은 왠지 공공연한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아니었던가. 특히 디자인에 붙여진 공공이라는 성은 더욱 그랬다.

1990년 경기도 부천시가 지자체 최초로 CI 디자인을 도입했을 때, 나는 얄궂게도 부천서 성고문 사건2)을 떠올렸다. 물론 부천시의 CI 디자인 도입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그 인과관계를 의심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의 연합Association3)으로 인한 것이었을 터이다. 그러니까 부천시 CI 디자인과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지만, 영국 경험주의 인식론에 따르면 그것은 오로지 인접해 있다는 이유에서 인과관계가 있다. 우리의 모든 관념은 그렇게 형성된다는 것이 경험주의의 대가 데이빗 흄의 주장이다. 아무튼 이런 찜찜한 관념을 배경으로 한국의 공공디자인은 탄생했다.

나는 한국 공공디자인의 기원을 지방자치제 실시로부터 잡는다. 그러니까 1995년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부터, 지금 우리가 공공디자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 공공디자인의 진행을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한다. 첫 번째는 부천시의 조숙한 사례를 필두로 한 CI4) 디자인 시기이다. 두 번째는 2000년대 들어와 활발해진 도시 디자인 시기이다. 물론 이때 도시 디자인이란 본래적 의미보다는 많이 축소된 한국식 도시 디자인을 가리킨다.

첫 번째 시기의 CI 디자인은 지방자치제 실시로 인해 갑자기 지역 정체성 찾기에 분주해진 지자체들이 너나없이 손쉽게 채택하면서 유행처럼 번져갔다. 그 결과 전국 어딜 가나 비슷비슷한 심볼마크와 어릿광대 같은 캐릭터 디자인이 지역 이미지를 장식했다. 특히 까치나 고추, 돌고래나 축구공 등 한결같이 지역 캐릭터를 머리에 이고 있는 가로등은 조명 장치라기보다는 차라리 지역 광고 매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지방자치시대의 CI 디자인은 새마을운동으로부터 기원하는 관료주의 미학의 끝판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2000년대 들어서면 도시 디자인이 붐을 일으켰다. 지자체마다 도시 디자인 부서가 설치되고 너나없이 디자인 도시5)를 부르짖었다. 그 중에서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디자인 서울’ 정책은 그 정점을 보여주었다. 과연 이러한 도시 디자인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거기에는 여러 요소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거시적으로는 한국 사회 역시 전반적으로 탈산업화되면서 창조도시라든지 도시 마케팅이라든지 하는 것이 새로운 도시 발전의 방향으로 주목받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프로젝트가 히트하면서,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물론 이명박 효과를 흉내 내려던 오세훈은 뒷북만 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도시 디자인은 결국 신개발주의의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지극히 비 디자인적인 관점에서 디자인을 동원한 것이며, 결국 디자인의 오남용이었다.

물론 디자인계 역시 이러한 수요에 적극 부응하였다. 공공디자인 붐은 IMF로 인해 위축된 디자인 시장에 새로운 일거리를 제공했다.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한국 디자인계에 공공디자인은 또 하나의 비즈니스 대상일 뿐이었다. 2000년대 한국의 공공디자인 붐은 진정한 공공성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지역 정치의 욕망과 디자인 산업의 필요가 만나서 만들어낸 하나의 상품이었을 뿐이라고 나는 본다.

한국 디자인, 단 하나의 성

이미 다소 밝혀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이 대목에서 한국 디자인의 결정적인 비밀을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한국 디자인에는 단 하나의 성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다음을 통해서 증명된다.

“이 법에서 ‘산업디자인’이란 제품의 미적, 기능적, 경제적 가치를 최적화함으로써 생산자 및 소비자의 물질적, 심리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창작 및 개선 행위를 말하며, 제품디자인, 포장디자인, 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을 포함한다.”

이것은 대한민국 유일의 디자인 법률인 <산업디자인진흥법> 제2조의 정의 부분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산업디자인의 영역이다. 산업디자인은 제품디자인, 포장디자인, 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 정의를 어떻게 이해할까. 예컨대 이 정의를 음악에 비유하면 이렇게 될 수 있다. 가요는 댄스뮤직, 재즈, 판소리를 포함한다. 공연예술에 비유하면 이렇다. 연극은 코미디, 뮤지컬, 오페라, 서커스를 포함한다. 무엇이 문제인지 아시겠는가?

한 마디로 <산업디자인진흥법>에 나오는 산업디자인의 정의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이다. 산업디자인Industrial Design은 현대디자인의 한 장르로서 대량생산되는 제품의 디자인을 가리키며, 그런 점에서 제품디자인Product Design과는 사실상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포장디자인Package Design, 환경디자인Environmental Design, 시각디자인Visual Design과는 엄연히 다른 장르이다. 그러니까 산업디자인은 포장디자인, 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이 아니며 그것들을 포함할 수 없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약간 바꾸어 법은 학술의 최소한이라는 명제도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런 따위의 법을 최소한으로 가지고 있을, 최대한으로서의 한국 디자인 학술이란 무엇일까. 과연 그러한 디자인 학술이 존재하기나 할까. <산업디자인진흥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산업디자인의 정의는 디자인대학 1학년생이 보더라도 우스꽝스러운 수준이다. 21세기는 디자인 혁명의 시대라고 외치는 한국 디자인이 이런 법률적 기초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내가 보기에 한국 디자인은 개론 수준에서부터 망가져 있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현실이 단지 한국 디자인의 학술 수준 때문이라고만은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거기에 하나의 심층적인, 거의 무의식적인 욕망이 작용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산업디자인이 여러 디자인 중의 하나가 아니고, 말 그대로 포장디자인, 환경디자인, 시각디자인을 포괄하는 모든 디자인이 되어버리고 마는 이유는 과연 무엇 때문일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바로 산업디자인에 ‘산업’이라는 말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산업디자인에서의 ‘산업’은 그저 여러 디자인의 주어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 디자인에서 유일한 우뚝 솟은, 최고의 주어이기 때문이다. 산업디자인이 산업디자인이 아니고 모든 디자인이 되는 이유는 오로지 그것이 ‘산업디자인’이라는 이유 단 하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산업은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영역 중의 하나가 아니라, 모든 영역을 가리키며, 모든 사회적 행위의 소실점이며, 국가의 존재이유이며, 아니 이 모든 시스템들, 신전神殿들의 존재이유인 것이다. 산업이 아닌 것은 이 땅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국가도, 정치도, 교회도, 대학도, 가정도 알고 보면 모두 이것을 위해서 존재한다. 그러니 까짓것 디자인 따위야 무에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산업디자인이란 산업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디자인의 이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디자인만이 존재할 수 있다. 이제 비밀은 밝혀졌다. 디자인대학 1학년생이 봐도 배꼽을 잡을 저 법률 문구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의연히 버티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디자인이라는 자판기에는 두 개의 버턴이 있다. 산업디자인과 공공디자인. 하지만 어느 버턴을 누르든 나오는 것은 동일하다. 왜냐하면 한국 디자인의 내용물은 실제로 산업디자인, 하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업디자인이라는 버턴을 누르든 공공디자인이라는 버턴을 누르든, 언제나 나오는 것은 산업디자인이다. 그러므로 <산업디자인진흥법>은 산업디자인진흥법이 아니라 모든 디자인 진흥법이다. 고로 한국 디자인에는 단 하나의 성밖에 없다. 공공디자인이란 가짜 성, 위장된 성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공공디자인은 사실상 사적 디자인의 다른 이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것은 1960년대의 ‘미술수출’6) 구호에서 알 수 있듯이, 오로지 국가주의 경제 개발의 도구로만 호명되어온 한국 디자인의 태생의 비밀에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세월호, 공공성, 디자인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사람들은 묻는다. 국가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지만 이 물음은 틀렸다. 국가가 어디 있는가가 아니라, 사회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국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없는 것이며, 사회로서의 국가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국가는 사회의 한 형태, 사회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없는 국가, 사회로서의 조건을 갖추지 못한 국가란 결국 국가도 아니며 사회도 아닌 것이다.

그러면 국가 이전에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일찍이 사회학의 선구자들은 개인적인 것을 넘어서는 ‘사회적인The Social’을 추출하기 위해 노력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인 것’으로서의 ‘공공적인 것’이다. 공공성이 없다면 사회도 없다. 공공성이 없는 사회는 가짜 사회, 단지 무리들의 집합일 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요청되는 것은 공공성, 최소한의 공공성이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국가가 아니라 사회를, 사회가 아니라 그것의 조건으로서의 공공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공공이란 그저 국가나 관과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어떤 가치의 이름이어야 한다. 공공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 대상이 아니라 행위로 인식할 때 그것은 비로소 파지把持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와 관련하여 디자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디자인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무엇보다도 먼저 공공디자인은 결코 위로부터, 국가로부터, 관으로부터 주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랬을 때 과연 디자인의 공공성을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가. 공공디자인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발견하는 것도 아니고 획득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비로소, 처음으로, 이제부터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공공디자인은, 디자인의 공공성은 지금 바로 나와 너의 공감으로부터 창씨創氏해야 할 한국 디자인의 미래에 붙여질 이름인 것이다. 그것의 기초는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는 ‘21세기는 디자인의 시대’나 ‘디자인 도시’와 같은 위로부터의 헛된 구호에 휘둘리지 않는 지성이다. 둘째는 가까운 나의 생활세계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만들어갈 줄 아는 감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