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천년을 산 것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계산서, 원고, 연애편지, 시,

사랑의 노래, 영수증에 싸여 있는

묵직한 머리털로 가득 찬 서랍장도

내 우울한 뇌보다 더 많은 비밀 간직하지 못하리라.

그것은 피라미드, 넓은 지하 묘소,

무연고 공동묘지보다 더 많은 시체를 모아둔 곳.

나는 달마저 외면하는 무덤

길쭉한 구더기들은 회환처럼 줄지어 우글거리고

내 가장 소중한 시체들 위로 끊임없이 파고든다.1)

- 보들레르, <우울> 中에서

보들레르의 이 시처럼 사람의 머릿속은 거대한 시체 보관소이다. 그것들은 내 안에 매장되어 서서히 썩거나, 부지불식간에 타 없어지거나, 몇몇은 미라가 되기도 한다. 생생히 살아 날뛰는 현재가 우리의 감각을 통과하는 순간 그것은 기억이란 죽음으로 걸러지며, 망각의 장치를 통해 묘소의 과부하와 균열의 고통을 막는다. 어느 피아니스트는 자신이 가공한 기억력으로 괴로워하고 있으며, 꼭 필요한 것만 선별하지 못하는 기억력 때문에 고통 받는다고 고백했다.2) 기억은 크로노스를 피해 재빨리 도망친 인간의 방패이지만, 망각이라는 그의 축복이 늘 비추고 있다. 시간의 신에게 인간은 칼을 휘두르다가도 때로 매달려 잊게 해 달라 애원한다. 우리는 시간 앞에 늘 변덕스럽다.

나는 이러한 변덕과 사진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있다. 바르트는 사진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했고,3) 어쩌면 사진은 하나의 시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으로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현재와 과거가 맞닿는 한 장의 사진은 죽음을 증거하고자 함이 아닌 살아 있었음을 보여주는 현존의 지표이다. 대상이 무엇인건, 형체가 있다면 사진 속에 축소/확대 되어 충실히 기록될 수 있다. 사진은 사각형 안에 있는 대상을 찍어냈을 뿐 스스로는 지독히 냉담하여 보이는 것 이상을 말하는 법이 없는데도, 오히려 이를 통해 보는 이에게 무엇인가를 자각하거나 기억하며 사진의 바깥을 채우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일어났었고, 살아 있었던’ 순간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밝은 방』 2부에서 어머니의 사진을 정리하다 ‘본질적인 사진’을 발견한다. 어머니가 어린 시절 오빠와 함께 찍은 <온실 사진>에 대해, 그는 “그것은 나의 어머니의 존재와 일치하며 동시에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느꼈던 나의 슬픔과 일치한다”(p.72)고 말한다. 우리는 그 <온실 사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또 알 필요도 없는데, 바르트의 ‘본질적인 사진’은 오직 그에게만 기능하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 속 인물은 너무나 확고히 한 자리를 지키며 얇은 불멸의 상태로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사진의 바깥은 단단히 잠기어 있다. 누군가의 가장 본질적인 사진이란, 그 바깥을 채울 수 있는 사진이며, 이는 기억 혹은 망각을 앎으로써 다가온다. 기억과 이미지에 관한 베르그송의 모형을 빌자면, 이미지화가 되기 이전의 순수한 기억, 즉 순수한 잠재성 상태의 누적된 기억은 확고한 존재의 이미지인 사진의 어떤 지점과 맞닿는 순간, 순식간에 그 위로 달라붙는다. 그리고 거기에서 본질적인 사진의 진정한 소유가 이루어지는데, “나를 꿰뚫는 것, 낙인,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p.32), 또한 “그것은-존재-했음의 애절한 강조법, 순수한 표상”(p.95)인 풍크툼punctum은 그렇게 작동한다.

바르트는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키지 않는다”라고 단언했지만(p.84), 사진은 과거를 회상시킬 수 있고,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게 아니라 망각을 아는 순간, 다시 말해 머릿속의 지하 묘소에 숨 쉬고 있는 비밀스런 존재를 자각하는 순간이다. 따라서 풍크툼은 객관화가 불가능하다. 외부 세계에 대한 사진의 냉혹한 기록은 기억과 망각의 앎이라는 자기 인식을 거칠 때 주관적 사진으로 변화하며, 사진의 힘은 그 사진 속의 세계를 목격하고 동시에 자기만의 바깥을 그려낼 때 시작된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스티글리츠는 장엄한 구름 사진 연작을 내놓았다. <등가물Equivalents>이라 불리는 이 시리즈는 사진이 숭고한 표현 장르로 안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사진을 예술로 분류하는 계보학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진은 사진의 가장 원초적인 노에마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구름은 시간과 닮았다. 결코 고정되지 않고, 끝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며, 계속해서 나타나고, 잡을 수도 만질 수도 없으며,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지나가버린다. 그런데 사진 속의 구름은 고정되었고, 움직이거나 변화하지 않으며, 심지어 만질 수도 있다. 이 점에서 사진은 시간의 껍질이다. <등가물>은 사진과 시간이 맺고 있는 특수한 관계만큼이나 명확하다. 우리는 시간이 지나가며 수북이 쌓아 놓은 껍질 하나를 붙잡고 상당한 위안을 받는다. 있었던 것은 사라졌지만, 있었다는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보들레르의 <우울>은 이렇게 끝맺는다.

- 이제부터 너는 없지, 오, 살아 있는 물질이여!

희미한 공포에 둘러 싸여 안개 자욱한 사하라 사막

깊숙한 곳에서 졸고 있는, 화강암에 지나지 않으리.

무심한 세상에 잊혀지고,

지도에도 사라진, 그 기구한 운명을

오직 지는 석양빛에 노래하는 늙은 스핑크스.4)

한때 살아 있던 물질은 화강암처럼 굳어 내 손에 쥐어져 있다. 만일 그 혹독한 운명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해가 진 후, 역사 속의 늙은 스핑크스가 된 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넓은 지하 묘소”에 잠든 “비밀”을 꺼내 시간의 껍질로 감싸며 사진의 바깥에서 “가장 소중한 시체”와 재회한다. 이미 변해 측은하고, 때로는 거의 사라져 알아보기 힘들더라도 그것이 한 때 있었다는 것에 슬퍼하고 안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