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현재적 행위이다. 과거는 지금/여기의 필요로 인해 기억된다. 그런데 개인의 기억이 공유와 공감이라는 집단적 움직임을 통과하면 이 기억은 공적 영역에 기록으로 남는다. 이때, 기록된 기억은 기존의 역사 기술에 대해 수정을 요구한다. 기억의 목적은 대문자 역사에 저항하고 억압되고 흐릿해질 위험에 놓인 진실을 바로 세우는 데 있다(전진성,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

최근 연극계는 엄청난 양의 기억들을 무대 위에 기록한다. 그리고 그 흐름이 자못 흥미롭다. 한동안 연극 무대에서 조선의 근대가 부지런히 기억되더니 지금은 그 시간대가 대한민국의 현대사로 이동하였다. 이 기억의 이동이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광복, 한국전쟁과 함께 197,80년대의 사건과 인물들이 연극장 안에서 ‘분노의 기억’으로 기록되고 있다.

국가와 재봉틀

종종 특정 직업이 어느 한 시대를 은유하기도 한다. 이때의 보조관념은 상흔의 시대일 공산이 크다. 1970~80년대 봉제공장에서 재봉틀을 돌리는 여공들과 재단하는 청년들의 시대가 그러하다. 지방의 어린 청춘들은 생계를 위해 서울로 대거 상경하였고, 어느새 이들은 산업전사가 되어 국가 발전과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잠을 깨는 약을 먹고, 주사를 맞아가며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려댔다. 이들의 꿈이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열악한 환경과 자본가의 착취, 그리고 결핵과 같은 병은 끊임없이 이들을 공격하였고, ‘노동자=기계’가 되어버린 이들은 이 공격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보다는 당장의 삶을 버티기 위해 무려 16시간 동안 재봉틀을 묵묵히 돌려야 했다.

<불씨>(작․연출 이은준)는 전태일 사건을 극화한 작품이다. 작품에서 전태일은 부당하고 부조리한 노동환경을 바로 세우고자 한,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들에게 불씨와도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한편, 이 노동문제는 전국으로 확산된다. <남산에서 길을 잃다>(작 백하룡, 연출 김한내)에서 1970~80년대의 어린 노동자들도 대구 염색 공단에서 평화시장의 청춘들처럼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었다. 이처럼 1970~80년대의 나이 어린 전국의 노동자들은 재봉틀을 돌려가며, 국가 발전과 자본가의 이익창출을 위해 희생당하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희생과 현재 그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두 작품의 태도가 비슷하다. 특히 <불씨>의 경우, “본 연극은 전태일의 실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재구성했습니다”라는 안내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구성 방식과 메시지는 선명하다. 흡사 이 작품은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연극 버전처럼 보이며, 그런 점에서 전태일 사건을 무대화함에 있어 연극만의 날카로운 시각과 특별한 해석이 잘 포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불씨>는 여전히 해결을 기다리는, 투쟁이 지속되고 있는 현재의 노동현실을 무대화함으로써 당시의 기억을 동시대 노동현실을 바라보는 유효한 기억으로 제시한다. <남산에서 길을 잃다> 또한 현재의 노동문제를 건드리고 있지는 않으나, 이후 이들의 삶에 탈출구가 없음을 제시함으로써 <불씨>에서처럼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1970~80년대 노동자들이 처한 현재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불씨>와 <남산에서 길을 잃다>를 통해 전국의 청춘들은 재봉틀과 함께 1970년대와 80년대를 횡단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은 2014년 현재에 도착했다. 이들은 현재 안녕하신지, 이들의 현실은 어떠한지, 이들과 함께 했던 1970~80년대의 재봉틀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재봉틀의 행방이 궁금하다.

재봉틀의 행방

2014년 현재, 재봉틀은 용도 폐기됐거나 공장이 아닌 반지하방으로 밀려났다. 노사갈등을 넘어 노노문제에까지 주목한 <공장>(작 박찬규, 연출 김수희)의 공장에는 재봉틀이 사라진 자리에 첨단 기계들이 자리하고 있다. 기계는 첨단화되었지만, 노동환경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자본가는 노동자를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로 세분화하여 자신들의 이익창출에 이용하고 있다. 비록 노사갈등이라는 선명하지만 다소 식상한 갈등구조에 의한 극 전개, 이 두 사이에 존재하는 한 개인의 부침이라는 익숙한 결말, 그리고 이 작품이 주목했던 노노문제의 설명적 제시가 아쉽긴 하지만, 1970~80년대의 노동환경과 문제가 개선되지 않은 채, 오히려 더 잔인한 방식으로 현재의 노동현장이 작동되고 있음을 이 작품은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공장이 아닌 일상의 영역으로 들어간 재봉틀은 어떠한가.

2014년, 미시적 공간의 재봉틀은 지상이 아닌 반지하방에 놓여 있다. 1970~80년대 당시에도 재봉틀은 퀴퀴하고 열악한 공간에서 힘들게 사투하더니, 3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환경이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이다. 당시 봉제공장에서 노동했던 <창신동>(작 박찬규, 연출 김수희)의 동식의 삶은 그 당시의 희생이 무색할 정도로 남루하다. 모든 것이 낡아 있는 그의 집, 그리고 동식의 삶만큼이나 방 한켠에 놓여 있는 재봉틀 또한 낡아 있다. 사용가치를 잃어버린 재봉틀처럼 동식은 병들어가고 있다. 그의 죽음과 함께 재봉틀은 어떤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사라질 위기에 놓인다. 그나마 <봄은 한 철이다>(작·연출 황이선)에서의 재봉틀은 비록 <창신동>과 같이 반지하방에 있긴 하지만, 혼수이불 제작을 업으로 삼은 중년의 한철과 수자 덕분에 여전히 자신의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산업현장에서 때처럼 열심히 재봉틀을 돌리는 한철네 내외는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기보다는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창문 밖 국회의원 후보자의 선거 공략은 이들의 삶이 나아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최근의 연극무대가 보여주고 있는 1970~80년대의 기억, 무대 위 그 분노의 과거는 섬뜩하리만치 현재에도 반복되고 있다. 잠을 줄여가며 재봉틀을 돌렸던 산업전사들의 현재의 삶은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자본과 국가의 견고한 공격 방식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다. 다시 언급한다. 기억은 현재적 행위이다. 현재 연극장에서 기록되고 기억이 지금/여기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한 행위로 작동하기보다는 추모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