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을 통해 시름을 잊는 순간

어린 시절 친구네 집에 놀러 갔을 때 가장 먼저 구경했던 것은 친구의 책장이었다. 우리 집에는 없는 동화책이나 위인전이 있는지, 우리 부모님이 읽는 책과 다른 책들이 있는지, 나는 늘 친구의 책장이 궁금했다. 나와 다른 동화책 전집세트를 가지고 있는 친구를 남몰래 질투하며, 나는 친구들과 소꿉놀이나 고무줄하기로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고 친구의 책장 앞에 주저앉아 넋이 쏙 빠진 채 책을 읽곤 했다. 누군가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숨겨진 마음속에 들어 가보는 비밀통로처럼 신비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러다가 잡은 책을 미처 다 읽지 못하고 집에 가야 할 시간이 되는 순간,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한다. 친구에게 애절한 눈빛을 보내며 ‘나 이거 하루만 빌려주면 안 될까’라는 말 한 마디를 꺼내놓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지금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옛 친구들은 내가 책을 빌린 적이 있거나 책을 빌려준 이들이다. 책을 빌려주고 받는 일은 비밀일기를 돌려쓰는 것처럼 은밀한 기쁨을 안겨주는, 또 하나의 소중한 소통의 체험이었다. 내게 책은 집안에 있는 어떤 물건보다 더 소중한 영혼의 오브제다. 그러나 그 소중함은 ‘나만 가지고 싶은 소유욕’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을 더욱 크게 만드는 힘을 의미한다.

문학 작품 속에서도 책은 훌륭한 오브제다. 책을 빌리거나, 누군가의 서재에서 독특한 책을 발견하거나, 책을 훔치는 일, 책을 사는 일 등이 소설의 중요한 복선이 될 때가 있다. 『책도둑』처럼 책을 훔치는 소녀가 주인공이 된 작품도 있고, 도스토프스키의 『죄와 벌』처럼 주인공 소냐와 라스콜리니코프가 서로에게 깊이 끌리는 계기가 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소냐의 초라한 방에 놓여 있던 성경을 보고 라스콜리니코프가 그녀에게 ‘믿음’에 관한 여러 가지 질문을 퍼부음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 깊숙한 곳까지 들여다보게 된다. 『오만과 편견』에서 항상 책을 최고의 필수품처럼 휴대하고 다니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얌전하고 수동적인 ‘정숙한 숙녀’를 기대하는 당시 사람들의 통념을 깨뜨리는 것이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극히 제한되어 있던 그 시대에 엘리자베스의 맹렬한 독서는 남성의 영역을 넘보는 금기의 행위로 보였던 것이다. 독자는 걸어 다니면서도 책을 읽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뿍 가슴에 담는다. 누구에게도 순응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엘리자베스. 모두가 선망하는 귀족의 자제 다아시에게도, 그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귀족 노부인에게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엘리자베스의 힘은 바로 책이라는 멋진 친구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용기였다.

그림 1> 피터 얀센스 엘링가Peter Janssens Elinga, <책을 읽는 여인>, 1668~70년

책 읽는 여자의 아름다움은 그림 속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피터 얀센스 엘링가의 <책을 읽는 여인>은 ‘책과 나’ 이외에는 어떤 자극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한 여인의 열렬한 독서를 아름다운 풍경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하녀로 보이는 소박한 복장은 그녀의 독서를 더욱 은밀한 해방의 기운으로 감싸 안는다.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그녀는 하녀가 아닌 것이다. 뮌헨의 알테 피나코테크에서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668년에서 70년 사이에 그려졌다는 이 그림에는 어떤 조용한 열광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신발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굽이 높은 신발을 보니 저 불편한 신발을 신고 하루 종일 동동거리며 집안 살림 구석구석을 살펴야 하는 그녀의 고단한 삶이 그려진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녀는 그 모든 잡일의 고됨에서 해방된다. 주인의 명령도, 미래에 대한 걱정도 날아가 버린다.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그녀는 온전한 자유의 공기 속에 둘러싸여 있다. 책은 이렇듯 수백 년 전의 머나먼 땅에서도 세속의 온갖 소음으로부터 자신을 봉인시키는 강력한 보호막이었던 것이다.

2. 책, 영혼의 피난처

16세기 이전의 유럽 사회에서 개인의 내밀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거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내밀한 영역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독서의 태도가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조용하게 책을 읽는 여인은 책과 동맹을 맺고, 이런 동맹은 사회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공동체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이 드나들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이제 그녀는 전통적인 모습이나 남자의 세계상과 일치하지 않는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슈테판 볼만 저, 조이한/김정근 옮김,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웅진지식하우스, 2012, 66쪽.

책 읽는 여인의 행복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은밀하게 예찬되고 있었던 것 같다. 유럽의 어느 박물관에 가나 거의 빠짐없이 찾아볼 수 있는 그림의 주제 중에 ‘수태고지’가 있다.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아기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그림 속에서 천사의 메시지는 명령과 축복을 함께 담고 있다. “기뻐하소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십니다. 마리아여, 당신은 아기를 잉태하게 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마시길.”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 마리아는 그 엄청난 의무감을 피해가려는 듯 구석으로 상체가 쏠린 그림이 많다. 그런 그녀의 무릎 위나 테이블 위에는 항상 책이 놓여 있다. 그녀의 독서는 천사의 난데없는 방문 때문에 방해를 받은 셈이다. 그녀는 책을 통해 세상과 교감하고 있었음과 동시에 온갖 세상의 잡음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책은 아직 처녀였던 성모 마리아에게도 세상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소중한 영혼의 창문이었다.

그림 2>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수태고지Annunciation>, 1437~46년

책을 읽어주는 사람과 그 낭독의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 간에는 묘한 연대감이 탄생한다. 낭독의 목소리에는 말하는 이의 온기와 중량감, 이야기의 힘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이의 진심이 함께 서려 있다. 낭독자뿐 아니라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에게서도 모종의 에너지가 발산된다. 저쪽에서 집중을 하고 있다는 것, 저쪽에서 이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이 낭독자를 힘차게 응원한다.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도 듣는 이가 집중을 하면 할수록 더 커다란 재능을 발휘하게 된다. 어느새 ‘내가 읽어주고, 당신이 들어주는 책 읽기’가 아니라 ‘너와 나, 아니 우리’가 함께 책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레몽 장의 소설 『책 읽어주는 여자』(김화영 옮김, 세계사, 2008)에는 타인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의 기쁨을 이렇게 표현한다. “우리는 시를 끝까지 읽어 나간다. 내가 ‘우리’라고 하는 까닭은 비록 나 혼자서 읽기는 하지만 그와 나 사이에 뭔가를 강하게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103쪽)

나는 내가 텍스트를 선택한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텍스트들이 나를 선택한다고. 그건 기이한 모험이다. 아니 그건 내가 너무나 여러 번 그 증거를 겪어보았듯이 어떤 불상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내가 그에 대하여 느끼는 모든 존경과 애정에도 불구하고, 다른 것보다 독자에게 더 잘 먹혀 들어가는 어떠어떠한 책을 골라 읽는다는 그의 생각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무슨 책이나 그게 내 입을 통해서 나가는 순간부터는 다 좋은 것이다. 그 책 하나하나에 무슨 일이든 다 일어날 수 있다.

-레몽 장, 『책 읽어주는 여자』, 세계사, 2008, 254쪽.

3. 책, 부활을 꿈꾸는 자의 무기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 번도 자신의 진심을 제대로 드러내본 적이 없는 여주인공 한나에게 유일한 책 읽기는 도피처다. 한나는 거리에서 구토를 하며 떨고 있는 소년 미하엘을 구해주고, 그 소년과 사랑에 빠진다. 엄청난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동년배의 친구처럼 친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미카엘이 책을 읽어주는 소리다. 미하엘은 순수하고 풍부한 감정을 절묘하게 섞어 아름답게 책을 낭독하고, 한나는 그 아름다운 낭독의 소리에 도취되어 온갖 시름을 잊는다. 한나와 미하엘에게 책 읽기는 사랑이 시작되기 전 치르는 둘 만의 내밀한 의식ritual이 된다. 미하엘이 한나에게 키스를 하려고 하면, 그녀는 몸을 살짝 빼면서 이렇게 속삭인다. “그 전에 먼저 내게 책을 읽어줘야 해.” 미하엘은 별 수 없이 그녀에게 책을 읽어준다. 처음에는 그녀와 키스를 하기 위한 낭독이었지만, 그는 점점 낭독 자체에 빠져든다. 『오디세이아』와 『에밀리아 갈로티』와 『전쟁과 평화』 등 수많은 문학작품을 낭독해주면서 그는 등장인물의 생각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법, 실제 문학 작품 속의 인물처럼 대화하는 법, 그리하여 마침내 타인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보는 법에 대해 상상해보는 사랑스러운 문학청년으로 성장한다.

나는 그녀가 나를 샤워실과 침대로 이끌기 전에 반 시간가량 그녀에게 『에밀리아 갈로티』를 읽어주어야 했다. 이제는 나도 샤워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내가 그녀의 집에 올 때 함께 가져온 욕망은 책을 읽어주다보면 사라지고 말았다. 여러 등장인물들의 성격이 어느 정도 뚜렷이 드러나도록 또 인물들에게서 생동감이 느껴지도록 작품을 읽으려면 꽤 집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샤워를 하는 가운데 욕망은 다시 살아났다.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 있기. 이것은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책 읽어주는 남자』, 60쪽.

한나가 사춘기 소년이 읽어주는 책의 감동에 그토록 열광했던 이유는 그녀가 바로 문맹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문맹임을 숨기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지만, 글을 읽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무직으로 발령이 나자 어쩔 수 없이 다른 일을 찾아야 할 상황에 내몰린다.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인생 전체를 규정해버린다. 그녀는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시킬 수도 없고, 미하엘의 사랑이 담뿍 담긴 연애편지도 읽을 수 없다. 두 사람이 함께 할 때 미하엘은 미처 그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여러 번 그녀의 진심을 오해했다. 미하엘은 붉게 물드는 황혼 속에서 자신이 책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한나의 모습을 더없이 사랑했지만, 두 사람은 ‘같은 세계’에 속할 수 없었다. 훗날 법대생이 되어 그녀를 법정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을 때 놀랍게도 그녀는 나치의 전범으로 법정에 서 있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이 나치에 가담한 전력으로 법정에 서 있다는 사실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미하엘.

그림 3> 영화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의 포스터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이 문맹임을 숨기기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나치의 수하에 들어간 것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유태인들을 수용하고, 감시하고, 마침내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녀의 행동은 ‘바닷물 속의 잉크’처럼 미미한 개인의 행동이었을지 모르지만, 역사의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전범戰犯이 되어버린다. 그녀는 수백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한 죄명으로 전쟁범죄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이 역사 앞에 범죄자가 되어버린 것으로 인해 무거운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속죄의 길을 택한다. 그 옛날 어린 소년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는 카세트테이프에 소설책을 녹음하여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녀에게 들려준다. 먼 옛날 그녀가 소년의 첫사랑이었을 때 책 읽기는 ‘사랑에 빠진 연인들의 축제’였지만, 이제 책 읽기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한나에게 ‘마지막 구원의 출구’가 되어준다. 평생 문맹으로 살았던 한나는 처음으로 그 옛날 자신을 사랑했던 소년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문자를 배운다. 이제는 훌륭한 어른이 된 미하엘의 음성으로 듣는 수많은 소설책들이 그녀의 굳게 닫힌 마음을 열어낸 것이다. 『책 읽어주는 남자』의 영화판에서 한나는 그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글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세상에 살아있는 첫 번째 희열을 안겨준다. “지난번 책, 정말 좋았어, 꼬마야.” “사랑 이야기를 좀 더 보내줘Please send more romance.” 책 읽기는 그렇게 희망을 잃어버린 한 영혼에게 다시없는 구원이 된다. 책 읽는 소리는 그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도달할 수 없는 희망의 메신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