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인천 신포동에 있는 은성다방에서 정(靜) 자를 전서로 쓴 화선지 반절 정도의 작품을 본 것이 내가 검여를 알게 된 처음 일이다. 중앙 상단에 배치된 정 자와 주변에 써내려간 행서의 배치가 한 폭 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남무아미타불>을 쓰고 김정희의 시를 쓴 그의 대표적 작품도 그러한 회화적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작품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글씨가 커지는 석탑 형태로, 불 자는 갈필과 비백을 허용해서 그림 같은 획질을 만들어 내는데, 전체적인 조화가 한폭의 그림이다. 이번에 전시된 많은 작품 중에서 계축년 먹 장난 (癸丑 墨戱)이라고 이름 붙여진, 지극히 짧은 시기에 그려진 먹선 추상화와 종정문 그리고 반구대 암각화를 채색으로 떠내고 그 위에 글씨를 쓴 작품의, 그림과 글씨와의 기막힌 조화는 화가로서 검여의 미적 감각을 확실하게 보여 준다. 그림과 글씨의 이러한 회화적 만남은 바탕에 주황과 푸른색을 무심하게 칠해 놓고 만주선생 칠언구를 갈필로 쓰 내려간 작품에 이르면 감상자는 허심의 경지에 빠져들게 된다.

동양의 서와 회는 태생이 추상이다. 글씨는 말 할 것도 없고 그림도 그렇다. 석도(石濤)의 칠언구에 나오는 불사사지( 不似似之 )를 말하지 않더라도 검은색 산천은 없다. 서는 그러나 규범성을 가지고 있다. 글씨의 의미가 전달되려면 점획이 아무리 추상적으로 배치되더라도 제자리에 있어야 된다 그래서 고법(古法)을 찾을 수밖에 없다. 또 서예 미는 점획의 갈윤과 자획의 구성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양의 브러시 가 아닌 둥근 모필을 사용하는 동양인에게는 직감적 감흥으로 전달된다. 우리의 국악 장단을 들으면 절로 흥이 나는 것처럼 문화적 유전인자가 원형으로 각인된 것이리라. 우리에게 서와 회는 같은 것이기에 서를 알고 그림을 그려야하고 또한 그림을 알고 서를 해야 한다. 그림을 모르면 서는 서당글씨가 되고 서획을 모르면 그림은 속화가 된다. 추사의 <세한도>나 <부작난>은 추사의 서(書) 이고 검여의 계축묵희는 검여의 글씨이다. 결국 한사람의 그림과 글씨는 등가로 그 작가의 예술에 대한 인식과 격을 고스란히 들어 낸 다고 할 수 있다.

검여의 그림은 매화 등의 문인화 계열과 종정문등 상형적 그림, 반구대 탁본그림. 그리고 유화와 먹선 추상화 등 이다.  이번에 처음 전시가 된 먹선 추상화는 큰 그림을 위한 에스키스(esquisse)정도의 선을 넘어 그 자체 완결된 그림으로 보인다.  김환기나 박수근의 경우처럼 화가의 소품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결된 그림일뿐 아니라 완성도 높은 대작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는 법이다.  검여의 먹선 추상 그림은 인천 지역미술사 정리는 물론  동시대의 추상 실험 작품들과 같이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한 작가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의 대다수의 서가들이 사군자 위주의 문인화에 만족했던 것과 비교하면 처음부터 그림에 대해 깊이 알고 있던 검여는 미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당시의 화단 분위기는 수화 김환기를 비롯한 추상미술의 실험기였다. 따라서  검여도 규범예술로서의 서예의 한계를 뛰어 넘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주로 서예의 행서에서 검여색으로 일컬어지는 개성으로 나타나고 작품 구성에 있어 뛰어난 회화성으로 드러내기도 했지만 순수 추상화에 대한 관심은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누가 미완의 대기(大器)라고 했던가. 그가 그렇게 일찍 졸하지 않았다면 전·예 에서도 그 스스로가 지향했던 검 같은 필의 가 드러나는 검여 색을 돌처럼(石如) 단단히 구축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좋은 그림도 그렸을 것이다. 이제 검여는 좌수서로, 그림을 그렸던 서예가로 전설이 되었다. 우리는 그의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과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미완의 큰 그릇을 후학들이 완성해가야 할 것이다.

근년에 검여의 맥을 이어오고 있는 남전 선배의 서실을 들렀다. 그곳에 남무아미타불 이라고 쓴 추사시 작품을 위한 초본이 걸려 있었다. 그 글씨가 너무 좋게 보여 글씨에 대해 물으니 남전 선배는 “저 글씨가 더 좋아.” 라고 덤덤히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우필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 글씨의 매력에 스승 생각을 잠시 했을 것이다. 나는 남전 같은 훌륭한 후학들이 혼신의 정진을 하면 그 미완의 대기를 완성해 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가로서의 검여, 좌수로 그린 그의 작은 그림 몇 점이 늦은 가을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