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문화
1980년대의 투쟁들 이후 노동자들의 힘은 강화됐고, 이로 인해 그들의 임금은 상승했다. 이제 한국 자본의 이윤율은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법칙적으로 저하 경향을 보이게 마련인 이윤율은, 그것을 높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요인들―노동일의 연장, 노동 가치 이하로의 임금 인하―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다.1 이제 남은 것은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다른 수단들에 호소하는 길이다. 기술 발전과 기계 도입에 의한 상대적 잉여가치율의 증가, 상대적 과잉 인구(실업자, 해고자)의 증가, 해외 투자겵笭?자본으로의 전환 등등. 1990년대부터 자본은 점차로 이 수단들을 택하기 시작했다. 정보화 혹은 디지털화를 행함으로써 상대적 잉여가치율을 높였고(이 자체로 고용을 줄이는 효과를 본다),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노동자들의 실업 상태 혹은 불완전 고용 상태를 일반화시켰다. 또한 동남아시아처럼 노동력이 싼 곳으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주식 혹은 신용 영역으로 진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다른 방법도 있었다. 기존에는 자본에 포섭되지 않았거나 불완전하게 포섭됐던 영역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문화 영역이 바로 그 강력한 후보자들 중 하나였다. 자본이 문화 영역으로 진출하면 자본의 본성 상 문화 생산이 증가하게 돼있다. 자본의 증식은 생산량의 증가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화 생산과 문화상품이 증가하고 문화생활 역시 활성화되며, 그에 따라 문화평론가와 문화에 대한 담론과 고민 역시 많아진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이며 문화에 대한 논의의 현재적 지형인 것이다. 앞서 간략하게 기술한 바처럼 자본의 전략 변화 과정은 구미의 경우 1970년대 중반쯤부터 이미 시작됐다. 이 연장선에 서 있는 우리는 현 시점의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해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한 단계’라고 확연히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자본의 움직임 혹은 전략 변화로 부터 문화에 대한 논의의 서두를 뗀 것은 이른바 경제결정론을 반복하고자 하는 의도에서가 아니다. 자본의 증식 논리를 냉철하게 포착하면서도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물질적 조건 형성이라는 관점으로 보기를 멈춘 적이 없는 맑스(Karl Marx)의 복합적 접근법이 문화에 대한 논의에도 필수적인 요소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를 인간 해방의 과제와 연관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맑스의 문제의식을 물려받는 것은 많은 부수적인 논점들을 동반한다. 우선 문화를 정책의 관점 특히 국가 정책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차치하기로 한다. 또한 위(혹은 앞서 나아간 전위)로부터의 이끎이라는 계몽주의적 관점―이는 정책의 관점과 뿌리가 같다―도 배제한다. 프롤레타리아의 자기구성(자기창조)이 바로 맑스로부터 물려받은 주체형성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문화를 이렇게 맑스의 시각으로 보자고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현재까지 제출된 문화론들 중 일부와는 각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기존에 제출된 문화론들을 일일이 살펴보고 비판하는 것은 이 글의 주목적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나 자신의 문화론이라고 할 수 있는 삶문화론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중요한 논점을 살펴보고자 한다.2 물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타 문화론들의 일부 구성 요소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문화, 정치, 경제
역사적으로 볼 때, 근대 국가는 ‘정치 영역’이 ‘시민사회’로부터 분리되면서 발생한다. 이때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분리 역시 함께 나타난다. 사적 삶이 곧 정치적 성격을 띄었던 중세 봉건사회에서와는 달리, 근대에 와서는 국가가 정치적(공적) 삶을 사적 삶으로부터 분리해 전담하기 때문이다.3 이러한 분리의 연장선상에 정착된 것이 이른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라는 자립적인 영역들의 분화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립적 분화는 역사 발전의 결과인 까닭에 또 다시 역사적으로 변할 수 있다. 맑스가 고전 경제학자들을 반복 비판했던 점들 중 하나는, 그들이 역사의 결과물인 사회적 법칙을 어느 시대에나 적용 가능한 자연 법칙으로 이해했던 점이었다.

서두에서 간략히 서술했던 자본의 전략 변화 과정은, 이러한 영역들의 자립성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자본이 문화 영역을 필두로 하는 삶의 모든 활동 영역을 포섭하게 됨으로써 경제와 비경제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문화 활동이 곧 경제 활동이라면 도대체 문화와 경제의 구별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것은 ‘상대적 자율성’을 지닌 영역들 사이의 상호 침투라는, 이제는 상투적이기 조차 한 설명만으로는 온전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호 침투는 각 영역들이 분화되기 시작하던 초기부터 존재했지만 우리가 문제 삼고자 하는 현상은 현 단계 자본주의에 와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증대하는 문화의 중요성은 이러한 경계들의 붕괴와 불가분의 관계다. 그러나 이 붕괴는 단순히 어느 한 영역의 중요성이 변화되었다는 정도의 피상적 이해를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이제 문화는 좁은 의미의 문화 영역―예를 들자면 휴일에 친구들과 영화나 판소리 공연을 관람하러 가는 일―에 국한되지 않고 삶 전체의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 또한 새롭게 이해되어야 한다. 아니, 새로운 차원의 정치를 구상해야 한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겠다.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한 상황이란 삶의 형식을 둘러싼 싸움이 최고 형태의 계급투쟁이 됐음을 의미한다. 자본은 자기 증식을 유지할 수 있는 삶의 형식을 생산ㆍ재생산하려고 할 것이고, 자본으로부터 해방을 기획하는 이들은 자본에서 독립한 자율적인 삶의 형식을 창안하려고 할 것이다. 이제는 삶이 그 자체로 정치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정치’라는 말은 경제, 문화 영역과 확연히 구분되는 전통적인 영역으로서의 정치, 경제를 그 외부에서 매개하는 ‘정치’와 다르다. 이 새로운 의미의 정치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삶정치(bio-politics)’이다.4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한 상황(어떻게 보면 사회적 삶 전체가 ‘공장’인 상황)에서는 공장만이 아니라 사회의 어느 곳에서라도 자본과의 직접적 싸움이 가능하다.그것은 공장이 투쟁 장소로서 지녔던 특권적 지위도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경제 영역의 싸움을 매개해왔던 정치 영역의 특권적 지위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토대와 상부구조의 내용도 아예 새롭게 바뀐다. 예컨대 네그리(Antonio Negri)에게서는 세계의 생산(부의 생산)이 곧 상부구조이고 ‘공통적인 것’이 그 토대를 이루는 것으로 구상된다.

(물리적 및 정치적) 세계의 생산 그리고 그 ‘장차 올’ 부의 생산은 공통적인 것의 ‘상부구조’이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역설로서 말한다. 삶정치적인 것에서는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안도 없고 바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라도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그리하여 경제주의의 모든 신비화들에 대항하고 ‘상부구조’의 모든 환상들에 대항하는 것. 그럼으로써 공통적인 것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토대를 이룬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하다.5

여기서 공통적인 것은 현대의 프롤레타리아인 다중(多衆)이 수평적인 소통, 네트워크적 조직화,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상호 협동을 통해 생산하고 유지하며 끊임없이 갱신하는 바의 것이다.6 그것은 국가 조직도 아니고 사회적 제도들의 집합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 존재하는 코뮤니즘(communism)이다. 이 공통적인 것의 형성과 확대가 바로 삶문화의 핵심인 것이다.

노동과 문화
노동과 문화를 대립시키는 견해들이 존재한다. 예컨대 노동이 줄면 문화가 늘어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그리하여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가 시간을 늘리면서 그 시간에 할 문화 활동을 잘 조직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표면적으로는 타당해 보이지만 어떻든 맑스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것임을 지적해야 하겠다. (앞에서 말했듯이 맑스에게서 물려받은 문제 의식으로 문화를 보는 것이 나의 일이다.) 맑스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 그토록 집중한 이유는 이것이 단지 현실의 일부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용하는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관계에 임금 체계 전체와 현재의 생산 체계 전체가 달려있다.”7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게 된다는 것―자본의 양이 거대해지고 프롤레타리아화가 심화되며, 모든 활동이 노동이 되고 자본의 포섭 능력은 더욱 커지게 된다―이 맑스의 통찰 중 하나이다. 다시 말해서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삶의 표현 활동―물론 자본에 포섭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소외된 형태의 활동―에 다름 아니다. 만일 문화가 삶의 표현 활동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것이라면, 여기서 우리의 관심사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맑스의 시야가 물질적 부의 증대와 그것의 공평한 분배에 갇혀있지 않음은 맑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맑스의 통찰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노동 과정은 비록 자본가에게 장악된 상황 아래 이뤄지지만 그 과정에서 노동자의 주체성이 변화되며, 이것이 해방의 조건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회적 개인(social individual)’의 형성으로 지칭되는 이러한 과정은 자본가들의 의도와 달리 자본주의의 발전이 가져오는 것으로서, 맑스가 생각하는 인간 해방의 필수적 조건이다. 이렇게 노동 과정을 인간 주체성의 변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노동을 삶문화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맑스의 이러한 통찰을 그의 유명한 『기계에 관한 단상』에서 만날 수 있다.8

만일 우리가 부르주아 사회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사회적 생산 과정의 최종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항상 사회 자체 즉 사회적 관계들을 맺고 있는 인간 자체다. 생산물처럼 견고한 형태를 띠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단순한 계기 또는 이 운동 내에서 생겼다 곧 사라지는 순간으로 나타난다. 직접적인 생산 과정 또한 여기서는 단지 하나의 계기에 불과하다. 그 과정의 조건들과 대상화들 자체도 마찬가지로 계기들이다. 주체로서 나타나는 것은 오직 개인들이다. 물론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이다. 이 주체들은 새로 생산되는 것만큼이나 재생산되기도 한다. 이 주체들이 그들이 창출하는 부의 세계를 갱신하는 정도로 자신들을 갱신하는 연속적 운동과정.9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의 삶문화적 성격이 맑스의 시대보다 더욱 강하다.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하기에 이름으로써 노동이라는 범주가 물질적 생산 활동만이 아니라 비물질적 생산 활동도 대거 포함하게 됐고 더 나아가 정보, 지식, 생각, 이미지, 관계, 정동(affects)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생산하는 비물질 노동이 오히려 생산에서 헤게모니를 쥐게 됐기 때문이다. 비물질 노동의 헤게모니란, 비물질 노동이 양적으로 다수라는 말이 아니라 비물질 노동의 성격과 특징들이 노동의 다른 형태들 그리고 실로 사회 전체를 변혁하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한다. 문화사회론자들을 비롯한 많은 논자들이 문화의 중요한 형태로 꼽는 인식, 기호, 스타일, 이미지, 텍스트, 정서, 욕구 등을 생산하는 활동이 노동에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요한 위치를 점하게 됐다는 것이다.

비물질 노동의 여러 형태에서는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구분이 흐려지는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노동일을 무한정하게 확대하여 일생 전체를 채우도록 하는 것이다. 생산력의 발전과 함께 사회적으로 노동력의 재생산에 필요한 시간은 줄었지만,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구분이 흐려짐으로써 실제의 노동 시간은 늘어난 것이며, 따라서 자본은 그에 상당하는 잉여를 추출할 수 있게 된다.10

이제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 이외의 활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 돼버린다. 한 개인에게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이 잘 구분되지 않기도 하지만, 한 개인의 여가 시간이 다른 개인의 노동 시간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과 비노동(여가)의 공존은 한 개인에게도 또 사회 전체적으로도 점점 더 우리의 현실이 되어 간다.

이러한 상황을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노동 활동 속에 이미 우리의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다 들어 있으며 따라서 자본가의 존재가 불필요한 상황이다. 그렇다면 노동 시간과 여가 시간의 구분보다는 노동 활동에서 자본에 의한 포섭된 ‘노동’을 벗겨내는 것, 즉 노동의 소외를 극복해 노동 활동을 자율적인 삶의 활동으로 온전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삶문화는 바로 이렇게 모든 활동으로 확대된 동시에 변형된 노동의 내부에서 작동한다. 그리고 삶을 일정한 형태로 가두려는 각질(자본)을 삶의 속살로 깨나가며 자본과 맞서고 자본을 넘어가려고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삶문화는 삶정치적이다.11

인간의 자기생성과 문화
앞서 말했듯 노동에 포섭된 경우이든 아니든 삶의 생산과 재생산은 곧 주체성의 생산과 재생산, 혹은 인간형의 생산과 재생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삶문화의 핵심에는 집단적 기획으로서 인간의 자기 형성 혹은 자기 변형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을 일단 ‘인간의 자기 생성’ 기획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는 자본주의의 극복을 내용으로 하는 정치적 기획을 다른 각도에서 (문화사회론자라면 ‘문화적 관점’이라고 할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아니 동일한 과정을 어떤 각도에서 보면 정치적 변혁이 되고 또 다른 각도로 보면 새로운 인간형의 형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인간의 자기 생성과 관련해 우리가 경청할 만한 이가 니체(F. W. Nietzsche)다. 그는 전통적인 좌파에 의해 맑스와는 대립적인 존재로 간주돼왔지만, 실상 자본주의적 근대 비판이라는 관점에서는 양자 사이에 의외로 통하는 바가 많다. 니체에게는 자본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 공리주의 혹은 효용론 비판으로 나타난다. 그는 임금 노동에 대해 (맑스와 똑같이!) ‘오늘날의 노예제’라고 비판한다. 여기에 국가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함께 한다. 이러한 비판의 바탕에 깔린 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 생성의 관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행동의 유형에 대한 그의 이론을 먼저 설명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인간의 행동(활동)을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능동적(active)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반작용적(reactive) 유형이다. 니체는 인류의 삶 전체를, 원래 반작용적이었던 인간이 능동적 유형의 인간으로 형성돼가는 과정으로 본다. 그는 이 과정이 선사시대부터 시작해 역사시대 이후까지 지속될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문화를 새로운 인간형―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입법적인 지고한 인간, 자기 자신을 장악하는, 운명을 장악하는, 법을 장악하는 힘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인간. 자유롭고, 경쾌하고, ‘무책임한’ 인간―을 산출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런데 이 자기 생성의 기획은 역사시대에 들어와 왜곡되기 시작한다. 반작용적 힘의 승리로 인해 쇠퇴(decadence)를 맞이하는 것인데, 니체가 보기에 근대(현대)란 이 쇠퇴가 고도화된, 병든 시기이다. 국가를 정점으로 하는 많은 근대적 제도들의 수립과 자본이 퍼뜨린 공리주의적 풍토의 만연이 바로 반작용적 힘의 승리의 현실적 표현이다.

니체에게 문화란 이 인간의 자기 생성 기획에 의해 능동적 유형의 인간의 창출하는 수단 즉 훈련과 선택의 기능을 한다. 그런데 반작용적 힘이 승리한 근대 이후, 문화는 국가, 교회 등이 채택한 훈육 수단으로 전환된다. 이제 모든 훈련 절차들이 전도된 형태로 채택된다. 즉 인간을 능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길들여진 동물’로 만들기 위해 채택되는 것이다. 훈련 절차는 강한 자를 깨고 약한 자들을 골라내기 위해 사용된다. 선택과 서열이 전도되는 것이다. 선택은 능동적 활동 속의 선택과는 정반대가 된다. 반작용적인 삶을 보존하고 조직하고 번성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다.12

물론 니체는 이러한 근대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생성의 기획을 짜라투스트라의 기획으로 새출발시켜 근대를 넘어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맑스처럼 그에게도 인간의 최고의 미덕 중 하나는 ‘목적의 단일성’이다.) 우리가 니체에게서 얻는 교훈은 인간의 자기 생성이라는 기획과의 연관 아래서 문화를 바라보는 관점만이 아니라 이렇게 왜곡된 문화를 깨고 미래를 향해 짜라투스트라의 기획을 관철시키는 전투적인 태도이다.13 이는 우리에게 더 친숙한 말로 돌려 말하자면 문화와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물화 혹은 소외와 맞싸우는 문제이다.

소외와 문화
우선 우리는 예컨대 자립적인 영역으로서의 경제 영역의 성립 과정 자체가, 가상실효적(virtual) 과정이 물질적 생산 과정을 장악해 일어났다는 점에서, 순전히 물질적인 과정이 아니라 일종의 문화적 과정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제 활동이란 상품에 들어있는 가치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활동을 말한다. 이때 가치의 생산이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상품에는 그 “감각적이고 거친 외형과는 정반대로 단 한 분자의 물질도 들어있지 않다.” 가치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순전히 사회적인 것”이며 “오직 상품과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14

그렇다면 경제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작용하는 환상이다. 여기서 환상이라는 말은 (맑스도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의적인 상상과 같은 것으로 오해돼서는 안 될 것이다. 가상실효적인 차원은 순전히 물질적인 차원보다 현실 속에서 더 위력적으로 작동한다. 경제의 경우에 가상실효적인 차원은 역사적으로 발생하고 또 그렇기에 역사적으로 소멸할 수도 있는 사회적 법칙에 해당한다. 다만, 고전 경제학자들을 비롯한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그 혹은 변호자들은 이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사회 법칙을 자연 법칙으로 제시함으로써 가상실효적 차원을 흐리고, 자본주의적 경제를 물질적 차원에 속하는 매우 견고한 것인 양 제시하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수립은 이중적인 의미에서 사물화를 수반한다. 첫째, 맑스가 『자본론』 I권, 1장 4절 『상품의 물신숭배적 성격과 그 비밀』에서 말했던대로, 상품들 사이의 관계가 그 뒤에 존재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가린다. 둘째, ‘가치’와 같은 가상실효적으로 사회적인 실체가 사회적 삶 전체의 생산과 재생산을 주도한다.

지금까지는 자본주의적 관계가 처음 수립되는 시점에 주로 해당되는 형태의 사물화를 논한 것이었다. 이제는 자본이 지구의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는 단계에 들어왔다. 이제 문화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영역으로 포섭되어, 문화 생산 활동이 경제 활동으로 돼버린 시대에는 두 개의 가상실효적 차원이 공존하게 된다. 이 경우에 문화 생산은 경제 활동으로서 물질적 생산과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 어떤 활동을 경제적 활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그것이 물질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것이 가치를 생산하고 유통하느냐 마느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 생산물들은 물질적 생산물들과 달리―즉 한 편의 영화는 한 그릇의 설렁탕과는 달리―향유자의 생각, 상상, 감성, 욕구 등에 직접 작용한다. 따라서 특정한 유형의 사회적 삶―그것이 기존의 것이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든―을 욕망하고 추구하도록 주체성을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의 지배는 이러한 욕망의 벡터들을 수많은 물신(物神)들을 사용해 특정의 경로로 몰아가지 않고서는, 특정의 형태로 고정시키지 않고서는 불안정하게 된다.15

이제 자본은 주체성에 직접 작용하는 가상실효적인 영역을 단지 가치 증식을 위한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을 넘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기 위해 활용한다. 가따리(Felix Guattari)는 이것을 비물질적 (실존 공간의) 사물화라고 부른다.16 이는 단지 생산물들의 물리적 관계 이면의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던 과거의 사물화보다 자본의 측면에서 훨씬 더 고도화되고 적극적인 역할이다.

비물질적 실존 공간에서의 사물화 혹은 소외 현상을 일찍이 파악하고 그것의 극복을 위해 노력한 사례로 ‘상황주의 운동’(1957~1972)이 있다. 그 대표적 이론가 중 하나인 기 드보르(Guy Devord)는 당대 자본주의 사회를 스펙터클의 사회로 정의했는데, 여기서 스펙터클이란 ‘삶의 구체적 전도’로서 살아있지 않은 것의 자율적 운동이다.17 이는 이미지들의 집합이 아니라 이미지에 의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보통 문화의 산물로 이해되는 이미지들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해, 현실을 왜곡하고 사회적 관계를 왜곡하는 현상을 소외의 주요한 형태로 보았던 것이다. 스펙터클은 소비를 통해, 즉 향유됨으로써 작동한다. 따라서 상황주의자들이 보기에는 향유의 민주화라는 식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그들이 택한 방법은 소외되지 않은 상황을 스스로 구축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능동적 표현과 구성을 통해 소외의 상황을 타개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시대는 달라졌지만18 상황주의자들이 남긴, 표현과 구성을 통해 비물질적 사물화를 극복한다는 관점은 우리에게 여전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19 사실상 맑스가 자본주의의 기본적인 소외 구조로 보았던 ‘죽은 노동에 의한 산 노동의 지배’도 표현 활동으로서의 생산 활동(능력)보다도 그 결과물들(의 효용)이 더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따라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이라는 맑스의 표현은 ‘생산’의 의미를 ‘새로운 삶의 형식의 생산’으로 바꿔 놓는다면, 우리 시대의 다중의 기획에도 여전히 적중하는 것이 될 것이다. 

죽음과의 투쟁으로서의 삶문화
지금까지의 논의를 네 가지로 갈무리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첫째, 삶문화란 삶의 외부로부터 덧붙여진 어떤 ‘좋은’ 요소가 아니라 삶의 표현 그 자체이다. 다만, 삶은 소외된 형태로 표현될 수 있으며 그 형태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반작용적 힘이 능동적 행동의 힘을 지배하는 방식으로 삶이 표현된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소외가 주로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양성하는 물신들에 의해 장악되는 형태로 일어난다.

둘째, 삶이란 각자 특이한 개인들의 창조적 상호 협동에 의해 창조된 인간적 현실에 다름 아니다. 이 인간적 현실의 토대는 공통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적 현실이란 공적인 것도 아니고 사적인 것도 아닌 제3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생산물들의 집합도 아니고 제도들의 집합도 아니며 협동해 함께 창조하고 생산하는 집단적 주체성의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 집단적 주체성은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개인들의 실체적 집합이 아니라 특이한 힘들과 벡터들의 개방된 네트워크적 연합이다. 나는 현단계 자본주의에서 이 집단적 주체성을 다중이라고 부른다.

셋째, 다중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이다. 열려진 네트워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스스로를 혁신해 새로운 존재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의 연속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인간의 자기 생성의 과정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단순히 미완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늘 완성되지만 동시에 늘 다시 열린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넷째, 현단계에서 삶의 가장 주된 적은 자본과 권력이다. 자본과 권력은 죽음의 세력이다. 죽음을 가져와서가 아니라 죽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삶을 왜곡시키고 가두기 때문에 죽음의 세력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싸움은 삶과 죽음의 싸움이다. 삶문화란 바로 이러한 싸움의 존재방식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인간의 자기 생성의 기획과 동일한 과정이다. 왜냐하면, 자본과 권력은 인간이 스스로를 변형해나가는 능동적인 유형으로 나아가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존의 구조와 제도에 자신을 맞추는 반작용적 유형으로 길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자본의 극복은 곧 인간의 능동적인 존재로의 생성이다. 이것이 삶문화의 목적 아닌 목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