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위기와 문화론의 부상
문화론이 부상하게 된 배경과 그 갈래를 짚어보기 전에 우선 잠시 에둘러 갈 수밖에 없겠다. 오늘날 문학 분야의 현실로부터 실마리를 푸는 것이 지금 상황에선 손쉬운 선택일 듯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선 ‘문학의 위기’ 담론과 깊이 연루되어 있다.

문학의 위기가 논의된 것은 서구나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한국에서도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길었던 논의 기간에 비한다면 그 과정까지 생산적이었던 것은 아닌 듯하다. 상당수 논자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문학의 위기란 문학의 미학적 위기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문학 시장의 위기를 말하는 것인가?’ 전자의 입장이든 후자의 입장이든 생산자(창작자)와 소비자(독자)의 구분을 기정사실화 내지 강화한다는 측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는데, 이는 보기보다 예민하게 벼려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구분짓기의 저류에는 문학 시장의 위기를 문학 일반의 위기로 호도하거나 특정한 미학적 이해관계를 결속시키고 정당화하려는 모종의 기도들이 종종 숨어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대 논쟁의 얼굴을 하고 있든 문학권력 논쟁의 얼굴을 하고 있든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설정은 근본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논의 자체를 문학 내부 문제로 지나치게 축소시키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문학의 위기는 실체가 아니라 세대를 달리 하는 문학적 이해집단 간 인정투쟁의 산물’이라거나 ‘그것은 문학 시장의 위기일 뿐 문학의 미학적, 본질적 위기는 아니다’란 식으로 안이하게 귀결될 수밖에 없는 문제다. 그러나 시장의 위기가 미학의 위기를 초래하거나, 미학의 위기가 시장의 위기를 초래하는 국면은 현실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둘은 분절된 듯 호응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문학이 비교적 호황세였던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분야의 쟁점은 미학적 이념과 방법론의 문제였다. 어떤 형태의 문학이 좀 더 ‘가치 있는’ 문학인지가 집합적 화두였던 셈이다. 그런데 앞서처럼 문학의 시장 문제와 미학 문제가 동서하기 시작한 사태 앞에서는 전혀 다른 접근이 요청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학 분야에도 자본의 간섭이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문학 자체로만 논할 수 있다고 간주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그것을 전체 문화 속에서 다루거나 현단계 자본주의의 정세변화 위에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문학은 이제, 진정으로 혼자가 아니다.

오늘날의 문화 판도를 조망하는 큰 시각의 존재는 문학을 위해서든 아니든 어느새 결정적 조건이 되었다. 문화 영역에서 문학이 차지하고 있던 전통적 비중은 상당했다. 따라서 문학의 이론적 주도성도 튼튼히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80년대를 거치면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대중문화산업이 90년대 들어 급격히 비등하자 상대적으로 문학의 지위가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단순 인과관계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연에 불과한 것은 더욱 아니다. 90년대 이래 등장하기 시작한 문화론들은 대개 이러한 복잡성의 맥락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현실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의 전지구화가 진행된 맥락과도 시기적으로 통한다. 지금 이 시간, 문제는 다시 문화다.

조용하지만 뜨거웠던 한 논쟁
(재)인천문화재단이 기획·주최하는 연속 콜로키움 <컬쳐브릿지2006>은 문화론의 갈래들을 점검하고, 각각의 갈래를 대표하는 논자들과 지역 문화 현장의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흥미로운 논쟁이 하나 촉발되었다. 지난 6월 22일 갈무리출판사 조정환 대표가 발제자로 참석한 <컬쳐브릿지2006>의 주제는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삶문화의 전망’이었다. 조정환은 80년대 노동해방문학론의 대표 논객으로 잘 알려진 현역 문학평론가로 현재는 정남영 등과 함께 ‘삶문화론’이라는 독창적 이론을 발전시켜 현단계 자본주의 문화를 분석·해부하는 저술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이 날 토론에서 그는 노동자문화론과 문화사회론을 동시 비판하며 삶문화론의 정당성을 절충적으로 주장했는데 토론자로 나선 인천 민예총의 현광일 정책위원이 노동자문화론을 변호하며 삶문화론의 관념성을 비판하여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조정환은 문화와 노동 사이의 현재적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파악하느냐에 따라 문화사회론과 노동문화론이 갈린다고 보고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1. 한국 문화연구의 중요한 주장 중의 하나는‘노동사회에서 문화사회로!’라는 구호로 집약된다. 여기서 ‘문화사회’라는 개념은 이미 도래한 특정한 현실을 지칭하는 용어라기보다 일종의 실천 전략으로 제시된다. 그것은 세 가지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그것의 현실진단과 해석이다. 문화사회론은 한국사회에서 대량실업의 발생을 ‘사회적 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이 감소했다’는 증거로 읽는다. 둘째는 그 지향 혹은 목적에 대한 규정이다. 문화사회론은 임금노동 시간의 축소와 자유시간의 증대, 노동보다 놀이가 선차적인 사회, 욕망과 삶의 자율적 구성을 지향한다. 또 하나는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에 대한 규정이다. 문화사회론은, 문화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의 단축, 소득보장, 그리고 노동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삶의 조건, 생활태도, 가치관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1. 2. ‘노동자 문화론’은 문화사회론을 ‘하위문화 및 문화수용자론적 관심, 계급정치의 문화정치로의 환원, 문화민중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한다. 아마도 두 번째의 것, 즉 계급정치를 문화정치로 환원했다는 것에 비판의 초점이 있을 것이다. 노동자 문화론은 ‘사회적 생산을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이 감소했다’는 진단을 허구로 파악하는 관점에 서 있다. 노동자문화론의 비판은‘노동의 중심성’을 재천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중략) 그것은 현 시기를 ‘생산력의 발전이 전 세계적으로 더욱 불균등화해 가는 제국주의 시기’로 보면서 초국적 금융자본의 세계적 유동화, 과학기술혁명과 기술혁신의 가속화가 노동력의 탈숙련화를 일반화시키면서 착취의 강도를 높이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 조정환,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삶문화의 전망」(인천문화재단 컬쳐브릿지2006 발제문, 6. 22)

즉 외환위기 이후의 대량실업 사태를 현단계 노동 현실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제시한 뒤, 이를 사회적 생산을 위한 필요 노동량의 감소로 파악하는 문화사회론과 기술혁신의 가속화로 인한 노동력의 탈숙련화 및 착취 강화 과정으로 보는 노동자문화론의 대립 구도로 현단계 문화론의 지형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립은 근본적 수준의 대립은 못된다. 그는 “문화사회론과 노동자문화론은 현대의 노동에 대한 상이한 해석을 하고 있지만 양적 시간이라는 공통의 척도 위에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 뒤, 이 두 입장이 “상대적 잉여가치 착취체제로의 단일한 변화과정에 수반되는 시간 편성의 두 가지 양상 중의 어느 하나를 일면적으로 과잉 강조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말하자면 문화사회론이 파악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노동문화론이 지적하는 노동 강도의 강화가 사실은 동전의 앞뒷면 같은 짝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를 문화와 노동의 관계로 다시 요약하면, 전자는 문화로 노동을 해소하는 입장이고 후자는 노동으로 문화를 해소하는 입장이다.

문화사회론이 문화 생산의 노동화 경향을 은폐하는 논리라면, 노동자 문화론은 노동자 운동의 정치논리 혹은 노동자의 정치의식화 논리의 변형일 뿐이라고 비판하면서 조정환은 그의 삶문화론을 펼친다. 그에 의하면, 삶문화론은 문화사회론과 노동자문화론의 대립과 공모를 가로지르는 대안이다. 그의 삶문화론은 절충적이다.

나는 이 글에서 문화를 노동과의 관련성에서 살피려는 노동자문화론의 생각과 유사하게 노동을 문화분석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노동자문화론과는 달리 노동의 질적 변형을 적극적으로 사고하고자 한다. 나는 문화사회론과 유사하게 노동거부의 입장을 중시하지만 노동거부를 노동관계의 탈자본주의적 혁신, 새로운 삶형식 창출의 역동적 논리로 이해한다. 요컨대 내가 관심을 두려는 것은 노동의 사회화 과정을 중심에 놓고 그것과 문화와의 관련을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의 탈근대적 변형과 비물질노동의 대두, 노동과 삶, 노동과 문화의 분리의 소멸, 현대의 자본주의적 착취과정에서 문화적 통제형식과 수단의 변화(현대 권력의 삶권력적 성격) 등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나는 근대문화에 대한 내재적 비판의 역능으로서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삶문화의 가능성을 밝혀 보려한다.
― 조정환, 앞의 글

토론자 현광일과 청중석에서 소속원들로부터 맹비판이 이어졌다. 삶문화론의 자본주의 분석이 국가별, 지역별 편차를 고려하지 않은 채 지나친 일반론으로 치닫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개념과 용어 사용의 문제, 분단과 같은 한국적 특수 상황에 대한 무관심 등이 그 내용들이었다. 이에 대해 논쟁의 물꼬를 튼 조정환이 조목조목 응수함으로써 토론은 일단락되었지만 여전히 남는 문제는 많다. 문화사회론, 노동자문화론, 삶문화론 등의 주요한 입장들을 공론장을 통해 상호 발전시켜야할 필요성은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 이제 첫 선을 보이는 본지 <플랫폼>이 기획논단을 마련한 것도 이 쟁점을 계속 살려나가기 위함이다. 오늘날의 문화개념을 벼리는 작업은 현재의 문화지형과 미래의 문화지형을 동시에 겨누는 가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자기 생성 기획으로서 삶문화라는 전망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마련한 본지 <플랫폼>의 기획논단을 또 한 사람의 삶문화론자인 정남영의 글 「현단계 자본주의와 삶문화」로 시작한다. 원고는 “90년대 이후 문화 영역에서 문학의 중심성이 급격히 이완되고 있는 가운데 문화론이 새 화두로 부상, 과거의 노동문화론에서부터 문화사회론, 삶문화론 등 문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경쟁 중에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써달라는 청탁에 의해 정남영이 써 보내온 것이다. 여기서 그는 삶문화를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는 싸움으로 정의한 뒤, 니체(F. W. Nietzsche)에 기대어 인간의 자기 생성 기획과 동일한 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삶문화의 목적은 인간을 능동적 존재로 생성시키는 일이 된다.

다중은 언제나 미완의 상태이다. 열려진 네트워크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늘 스스로를 혁신해 새로운 존재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형의 연속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인간의 자기 생성의 과정이다. 우리는 이 과정을 단순히 미완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늘 완성되지만 동시에 늘 다시 열린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 본문 중에서

다중의 집합적 자기 생성을 논하는 부분이 특히 흥미롭다. 삶문화론의 맥락과 지향이 비교적 일목요연하게 드러난 이 글은 관심 있는 여러 독자들에게 좋은 참고가 될 것이다. 이 글 속의 삶문화론이 어떤 식으로 발전해갈지, 다른 방식의 사유들과는 어디에서 접점을 이루고 어디에서 부딪힐지, 다음 호의 후속 논의를 기대하며 차분히 지켜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