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가는 텔레비전 드라마
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나는 이래저래 중년의 문학연구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대중문화 시대에 문학의 위기에 대해 늘 이야기한다. 책은 보지 않고 텔레비전만 보는 젊은이들, 진지하고 논리적인 사유를 포기하고 즉각적인 감각의 세계에 머무는 젊은이들에 대한 불만은 이런 자리에서 늘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들은, 젊은이들이라고 지칭되는 10대 후반과 20대들이 요즘에는 텔레비전 드라마, 특히 공중파에서 방영하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적잖이 놀란다. 세상이 또다시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는 것 같다. 
사실 10대 후반과 20대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볼 시간이 별로 없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집중되어 있는, 8시 20분부터 9시까지와 9시 55분부터 11시까지, 이들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이들이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려면, 주로 인터넷의 ‘다시보기’ 서비스를 이용한다. 이렇게 하다 보니, 시청 시간을 기다리며 수상기 앞에 앉아있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것, 원하는 만큼 보는 편안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인터넷 세상에는 공중파 방송 시청률과는 다른 호응도가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른바 ‘폐인’ 현상으로, 다 끝난 드라마를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한꺼번에 4, 5회씩 몰아 보면서 거의 폐인처럼 살게 되는 시청자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일으키는 드라마들, <네 멋대로 해라> <다모> <부활> 등은 대개 공중파 인기 드라마보다 일관성이나 주제의식 등에서 완성도가 높으며 상대적으로 젊은 취향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호응은 시청률에 집계되지 않는다.
젊은 층이 공중파 드라마의 본방을 시청하지 않으면서 생겨난 또 한 가지 현상은 외국 텔레비전 드라마의 선택이다. 즉 <CSI> <프렌즈> <섹스 앤드 시티> <꽃보다 남자> <고쿠센> 등 미국, 타이완, 일본 드라마들을 인터넷이나 케이블 채널을 통해 보는 것이다. 오로지 공중파 드라마에만 목을 매는 중노년 층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중파는 점점 그 취향이 나이 든 세대로 옮겨가고 있다. 드라마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여겼던 쇼프로그램조차, 옛 친구를 찾거나 건강 지식을 주거나 세대 간의 언어소통 문제를 다루는 등, 중장년층을 고려한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일일극과 주말극의 노후화 20대가 인터넷 다시보기 서비스를 통해 드라마를 시청하는 것은 생활방식의 변화, 매체의 변화 등과 관련 있다. 그러나 외국 드라마로 시선이 옮겨가는 현상은 확실히 지금 공중파 텔레비전 드라마가 젊은 층의 취향과 점점 괴리를 나타내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전통적으로, 이른바 사극으로 통칭되는 드라마(정통 역사극이냐 아니냐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조선시대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와, 현대를 배경으로 하는 애정물로 나뉜다. 후자는 가족을 중심으로 한 애정 갈등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따지고 보면 사극 또한 이런 이야기가 태반이다. 가끔 반공극과 수사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지닌 계몽적 성격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시청자 층이 늘어나면서, 1980년대 말부터는 거의 사라졌다. 그런데 바로 이런 종류의 드라마가 이제 젊은 층의 외면을 받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이런 드라마를 애청해온, 충성스런(?) 시청자들이 선택하는 드라마에서 이런 불편함은 잘 드러난다. 사극을 제외한 일일극과 주말극이 그러하다. 일일극과 주말극은 대부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 인기 드라마의 경우는 시청률이 30%가 넘는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화살 역시 이 드라마들을 겨누고 있다. 출생의 비밀이나 과장된 눈물 짜기 설정, 가부장제적 작가의식의 지나친 노출, 응집력 없이 늘어지는 이야기 등은 고질적 결함이었다. (물론 최근 주말극 <누나> 등이 이러한 결함을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불행히도 이 드라마는 시청률이 낮다.) 심지어 상반기에 가장 인기를 끈 주말극 <하늘이시여>는 ‘엽기 드라마’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였다.
40대 중반인 내가 보기에도 이들 드라마 속 젊은이들의 애정 행각은 현실적이지 않다. 젊은이들을 움직일 만큼 충분히 내면묘사가 이루어지지도 않거니와, 무엇보다도 아들딸의 연애와 결혼을 부모가 방해하여 비극적 상황을 만들어내는 설정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부모에 의한 혼사장애 모티브는 2~30년 전에는 현실적인 이야기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이러한 내용은 마치 일일연속극에서 3대, 4대가 함께 사는 단독주택(마당에 수도꼭지가 달린)을 즐겨 배경으로 삼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족, 단독주택, 부모에 의한 혼사장애, 결혼 후 고부갈등 등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은, 이것이 이 드라마의 주 시청자들이 반추하고 싶은 경험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일일극과 주말극의 시청자들은 노년층이 중심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일일극은 노년 층 및 그들이 돌보는 미취학아동 층이다.) 중년과 청장년이 없지는 않지만, 이들은 저녁 식사 후 노부모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고자 일일극과 주말극을 시청한다. 노년층은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를, 청장년층은 짜증을 내면서 혹은 엽기라고 깔깔대면서 본다.
코미디와 추리물의 급상승 젊은 층의 취향도 3, 4년 사이에 크게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한편으로 작은 폭이나마 세대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일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와는 크게 달라진 대중의 사회심리 때문일 수도 있다.
최근 젊은 취향의 드라마는 로맨틱 코미디와 추리물로 나뉜다. 2000년을 전후를 풍미한 ‘야망의 콩쥐팥쥐 형 드라마’(선 악의 여성 주인공 둘이 야망과 사랑을 두고 극렬히 다투는 드라마)와 출생 비밀과 불치병 모티프를 뮤직비디오 같은 아름다운 화면에 처리하는 <가을동화> 부류의 경향이 이제는 시청자들의 호응을 거의 얻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보디가드>(2003년)에서 변화의 조짐이 드러나더니 작년, 올해 들어서면서부터 두드러졌다. 올해 <천국보다 낯선> 등의 작품이 예상 외로 고전을 면치 못한 것, 대신 작년의 <내 이름은 김삼순>이나 <연애시대>, 올해의 <여우야 뭐하니> 등의 좋은 반응, 몇 년 전부터 시도되던 추리물이 작년에는 <변호사들> <부활> 등으로 꽃피기 시작하고, 코미디나 애정물을 적절히 결합한 <쾌걸 춘향> <내 인생의 스페셜> <신입사원> <마이걸> <무적의 낙하산 요원> 등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주목할 만 하다. 특히 사전에 제작을 완료한 작은 드라마들(4부작 혹은 8부작)에서 이런 드라마가 눈에 띈다는 것(8부작 <내 인생의 스페셜> 4부작인 <특수수사일지> <도망자 이두용> 등)은 분명 50부작 이상의 일일극과 주말극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지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지금 젊은 취향의 드라마는 시쳇말로 ‘쿨’해지고 있다. 웃기거나 아니면 논리로 건조하게 몰고 가는 드라마를 젊은 층이 선택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하고 결혼 후 또 부모와 실랑이하는 이야기는 쳐다보기도 싫거니와, 순수하고 아련한 사랑, 역시 싫은 것이다.
이 중 추리물의 등장은 더욱 주목할 만하다. 로맨틱 코미디의 유행은 1990년대 초중반에도 있었던 일이었지만 추리물의 강세는 우리 드라마 역사에 처음 나타나는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눈물 흘리는 재미가 아니라 머리로 퀴즈를 풀 듯 추리하는 재미로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하는 시청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인 것이다. 작년 <변호사들>과 <부활>의 성공은 이러한 경향의 드라마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수작들이었다.
논리로 극 혹은 서사를 짜나가는 방식이 제대로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드라마는 여전히 어설픈 경우가 많다. 올해의 드라마만 보더라도, <특수수사일지>는 후반부가, <도망자 이두용>은 전반부가 느슨하고 어설펐다. <특수수사일지>는 펼쳐놓은 논리적 설정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고, <도망자 이두용>은 기본적 설정을 펼쳐놓는 데에까지 지나치게 긴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웃음을 섞는 것도 어색했다. 앞서 이야기했듯 이러한 변화 양상은 눈물 어린 감동이나 혹은 감동적 성공담, 극렬한 성격적 갈등을 피하고 싶은 요즈음의 사회심리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단지 세대 변화의 문제만으로 설명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끈적끈적함, 따뜻함만이 아니라 논리와 웃음처럼 조금은 차갑고 건조한 질감을 즐겨 받아들이는 세대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드라마는 변화하고 있으며, 젊은 취향은 이보다 더 빨리 변화하고 있다.
#저자 약력
이영미 1961년생 대중문화평론가
ymlee021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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