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연구
지역 연구(area studies)는 국가적, 지리적, 인위적, 자연적으로 부여된 경계로부터 발생하는 사회적, 문화적 구성의 사유를 강조한다. 지역 연구가 시작된 이래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일어난 빠른 변화들은 기존의 경계 개념으로 포섭할 수 없는 접촉과 교환의 네트워크들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문화 연구는 문학, 철학, 언어학, 예술사 그리고 영화사의 경계를 횡단하고 있다. 이러한 유동성을 고려할 때, 아시아 지역 연구가 정치·경제 중심주의를 벗어나 아시아 문화의 흐름과 궤적을 탐구하려는 문화연구와 학제적 교류를 해나가고, 아시아 문화연구 역시 지역학의 기존 성과와 대화를 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지역 연구와 문화연구는 이제까지 지역(area, region)을 핵심 단위로 하기 보다는 지역성(locality) 혹은 로컬, 글로벌 사이에서 정치적으로만 작동해왔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 연구자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주제를 정하고 패널을 구성하는 국제학회 <크로스로즈(Crossroads)>가 2006년 7월 20일부터 23일까지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렸는데, 그 중 한 패널이 지역주의 문제를 제기했다. TV 수용 연구로 알려진 영국의 사회학자이자 문화연구자인 데이빗 몰리(David Morley), 미국 드라마 <달라스> 연구로 잘 알려진 호주의 중국계 문화연구자 이안 엥(Ian Eng), 『인터 아시아 문화연구』 편집장인 천꽝싱(陳光興), 상하이대학에 문화연구학과를 만든 왕샤오밍(王曉明) 그리고 중국, 타이완, 홍콩, 한국 영화 등 동아시아 영화에 식견이 높은 크리스 베리(Chris Berry)가 토론 형식으로 ‘지역주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사회를 맡았다. 데이빗 몰리는 로컬/글로벌의 구도 속에서 지역 문제가 자주 누락되는 문제점에 대해, 이안 엥은 관광 산업이 의도하지 않게 만드는 지역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야기했다. 천꽝싱은 아시아 네트워크와 상호 참조의 중요성을, 크리스 베리는 ‘퀴어 아시아’ 영화와 같은 ‘퀴어+지역’이라는 범주화가 사실은 미국 중심의 퀴어 영화제에서 호명되는 방식이라고 분석한 뒤, 이 경우 결국 지역성을 결정하는 것은 글로벌 한 힘이라고 비판했다. 즉, 지역이 하나의 단위로 결성되는 것은 자율적·지역적 결정이거나 구성이라기보다 서구에 의해 범주화되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리고 왕샤오밍은 중국이 일국을 넘어 아시아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갖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로컬/글로벌이라는 시끄러운 사선에 의해 침묵 당한 ‘지역’에 대한 개념화가 요구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서구에 의해 아시아라는 ‘지역’이 여전히 재생산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인터아시아 문화연구집단의 경우엔 아시아 지역의 상호 참조나 네트워크가 학자들과 운동가들 사이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새롭게 요구되는 지역(area) 문화 연구를 나는 ‘트랜스 지역/문화연구’로 명명하려고 한다. 트랜스는 세계화 시대에 빈번히 통용되고 있는 초국적(transnational)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국적 자본의 흐름에 트랜스라는 유용한 단어를 맡겨둘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 영역으로 전유해 올 필요가 있다. 전화, 전환으로서  ‘트랜스’는 횡단하고 통과하면서 동시에 넘어서는, 다른 상태로의 존재 전이를 의미한다. 그리고 트랜스는 미디어의 영역인 번역의 과정을 가리키기도 한다. 정치나 경제 그리고 고중·세사, 근·현대사에 치중해 있는 지역 연구를 ‘아시아를 횡단하는 대중문화’라는 당대적 단층으로 새롭게 가로지를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영상문화 저널 『트랜스』의 창간호를 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이 ‘트랜스’라는 용어를 정의한 적이 있다. “국민 국가 간의 횡단 혹은 그 경계들의 소멸을 지향하는 트랜스내셔널, 초국적이라는 말은 헤게모니 국가가 다른 국가에 권력을 실행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세계 자본주의의 반주변부에 놓인 지역, 바로 한국에서 그 횡단의 다른 가능성을 발화하고자 한다면, 초국적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그리고 진행시키고 있는 문화적 변화 대신 로컬/글로벌을 이분하는 사선의 공간에서 사고하는 문화연구를 제안한다. 영상문화저널 『트랜스』는 문화 영역 중에서도 특히 한 국민국가의 역사적, 문화적 구체성을 초월하는 보편적 언어인 영상, 영화, 디지털 이미지, 애니메이션에 대한 논의의 장을 열고자 한다. 보편성에 대한 강조는 흔히 초국적 영상 산업과 쌍생아적 공존을 이루어 그 지역 영상 산업을 약화시킨다. 또는 그에 대한 모방으로서 준보편성을 주장하는 지역적 대응물의 생산으로 이어진다. 『트랜스』는 이 두 가지 경향을 비판한다. 또한 지역성의 편협과 봉쇄, 흔히 민족주의나 지역주의로 번역되는 닫힘을 경계한다.”

아시아를 트랜스하는 대중 문화로는 일본의 아니메(Anime), 제이팝(J-Pop), 드라마, 홍콩의 무협 소설과 무협 영화 그리고 주로 TV 드라마와 영화, 팝으로 구성된 한류(韓流)가 있다. 아시아 국가 간의 대중 문화 교류를  역사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통해 이 지역의 역사를 당대적 관점으로 새롭게 사유하고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동아시아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탈냉전 이후 지구화, 권역화, 지역화 하는 경향 그리고 한류의 아시아 횡단, 즉 트랜스 아시아 현상으로서 한류의 효과나 ‘일류(日流)’등으로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그에 대한 연구도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있다. 특히 ‘서구 중심의 글로벌 문화 대 지역 문화’나 그것의 매개적 개념인 글로칼라이제이션(glocalization) 등의 개념에서 벗어나 일본과 싱가포르, 한국의 학자들은 대중문화를 아시아의 새로운 네트워크(이와부치 고이치)로 본다. ‘유교적 가치에 기반 한 동아시아’나 ‘네 마리의 용’이라는 호명 대신  대중문화로 아시아를 재(再)지도화 하는 시도(추아) 그리고 한류를 아시아 대중 문화 속에서 고찰하는 연구(조한혜정; 김현미; 백원담 ), 또 ‘아시아’와 아시아의 관계 속에서 중국과 일본을 역사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분석하려는 저작들(최원식, 백영서, 천꽝싱, 쑨꺼, 추이 즈위안, 왕 후이, 사카이 나오끼, 야마무로 신이찌)이 있는가 하면, 아시아와 한류를 한국 대 일본, 한국 대 중국, 혹은 한국 대 베트남 같은 국가 대 국가 간의 관계가 아니라 초국적 세계화, 지역화 속에서 보려는 연구들(손병우, 양은경, 이동후, 앤젤 린, 히라타 유키에, 이기형)도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드러나는 것은 대중 문화의 흐름을 ‘동북아’라는 지역에 한정해 논하는 것이 매우 자의적이라는 점이다. 이는 1990년 이래 긴밀해진 대중문화 교류 현상이 동북아뿐 아니라 타이완, 싱가폴, 베트남, 타일랜드 등 동남아시아 각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 전역에 걸쳐 나타난 현상이기 때문이다. 대중문화의 지구적 확산을 서구와 비서구로 나누고, 일본이나 홍콩, 한국 등이 아시아 전체를 포함하는 지역의 새로운 문화 중심이 되는 가능성을 흔히 말하는 ‘탈중심화’ 혹은 ‘다중심화’의 역학에서 이론화 하고자 할 경우에도 동북아의 3국과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을 나누어 접근할 근거는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연구 속에서 아시아와 동아시아, 대중 문화와 한류는 서로 새롭게 절합돼 세계화와 권역화, 문화 민족주의, 젠더, 계급 그리고 국가라는 틀 속에서 그리고 그 틀을 횡단하고 넘어서는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의 사례로 연구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연구들은 아시아가 영화 스크린과 TV 브라운관의 화면 위에 올려져 새로운 지정학적 서사와 이미지로 자신을 상상하게 하는 자원이라는 것에 관한 담론과 대화를 생산해내고자 하는 노력이다.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 학술회의
『트랜스:아시아 영상 문화』 선집의 취지를 잇는 2006년 서울 아트시네마에서 열린 ‘트랜스: 아시아 영상 문화 연구소’가 주관한 학술회의는 3일간에 걸쳐 진행됐다.  6개 패널로 구성됐으며 ‘중국 영화의 질문들’, ‘트랜스 아시아 맥락에서의 영화의 질문들,  “글로벌 자본주의, 로컬 스크린 문화” 그리고 일본 영화에 대한 역사적이고 공간적인 분석인 “영화적 번역에서의 도시/신체” 그리고 “한국 드라마와 한국 영화들”, “트랜스 아시아 미디어”등이 그 주제들이다. 지역적으로는 내셔널과 트랜스내셔널이라는 단위가 생산되거나 통과하거나 머물고 재생산되는 공간으로서의 아시아에 초점을 맞추고, 중국, 한국, 일본의 내셔널 시네마들, 그리고 지역에서 발흥하는 뉴미디어와 글로벌, 지역적 유통을 이루고 있는 재패니메이션 또 그것을 넘어 아시아 지역과 글로벌로 여행하는 트랜스 아시아 시네마와 일국적 의미를 넘어서는 영화 텍스트들을 다뤘다.    

상하이대학의 천시허(陣犀禾) 교수는 『마르크스주의, 모더니티, 민족주의: 현대 중국 영화의 아버지 형성과 문화의 구축을 논함』이라는 글에서 중국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인터내셔널>이라는 노래는 국가도 사라지고, 사유제도 사라지고, 심지어 가족도 사라질 것이라는 가사를 담고 있지만, 이제는 내셔널(국가적, 민족적)이 가장 힘센 소리가 됐다고 술회한다. <인터내셔널 가>를 부를 때면 그것이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메아리 같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중국 사회에 흐르는 과거와 현재의 소리를 이렇게 대비하면서 천시허는 노감독 시에진(謝晉)이 홍콩 반환 직전에 만든 <아편전쟁>이 영국 식민주의와 중화 민족 사이의 갈등을 다루면서, 기존 아편전쟁을 제재로 한 영화인 <린쩌쉬>와는 달리 모더니티의 관점에서 민족 전통에 대한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중국은 1950년대, 혁명화된 국제성을 꿈꿨으나, 오늘날 중국은 자본화된 국제성을 마주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대륙과 타이완, 홍콩 사이의 관계를 트랜스내셔널이라고 표현하는 최근의 관행을 두고 그때의 트랜스내셔널을 국가를 뛰어넘는 관계로 해석하면서, 현실적 선택이라고 평가한 후, 오늘날 중국의 민족주의는 전지구화 경제와 트랜스내셔널한 정치에 개입하는 전략이자 수단으로 강력한 정치성을 갖추고 있고 전통적 혁명성과 일종의 암묵적 관계를 맺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현대의 중국 민족문화도 바로 마르크스주의라는 서구 문명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임을 강조한다.   

천시허의 글은 중국 영화가 놓인 정치적 맥락을 마르크스주의, 모더니티, 민족주의로 놓고, 세계화와 협상하는 비전통적 민족주의를 설정한 후 홍콩과 대만의 영화를 중국의 내셔널을 뛰어넘는 영화로 보는 역사적으로 열린 시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쌍생아인 민족주의에 대한 전략적이고 정치적인 접근에 앞서 보다 발본적인 인식론적 해체가 필요할 것 같다.

일본 영화 연구자들이 발표한 『영화적 번역에서의 도시/신체』 패널에서 사이코 아야코 교수는 사무엘 풀러(Samuel Fuller)의 1955년 영화 <하우스 오브 뱀부>를 할리우드와 도쿄를 경유한 1950년대 아시아와 미국의 관계에 대한 지정학적 풍광이 투사된 스크린 이미지로 읽고 있다. 즉, <하우스 오브 뱀부>를 점령기 이후 일본이 숨기거나 부인하고자 열심히 노력하던 것의 그로테스크한 재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미츠요 와다 마르시아노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생각하는 일본: ‘초국적’ 영화에서 내이션 찾아내기』라는 글에서 흥미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 제작, 배급, 소비 과정이 전지구화된 결과로서 이야기되는 트랜스내셔널 영화의 트랜스내셔널이 “국가를 가로질러 사람과 제도를 연결짓는 글로벌한 힘”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면, 이즈음 주문처럼 사용되는 트랜스내셔널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것은 오히려 지역적인 것이지 글로벌한 부분은 부차적이라고 블라디보스톡에서 촬영된 일본 영화 <호텔 비너스>의 다국적 캐스팅(미국, 일본, 한국), 다중 언어(영어, 일본어, 한국어) 사례를 통해 말한다. 즉, <호텔 비너스>의 경우 중심 캐릭터인 초난강(草なぎ剛)은 일본과 한국 사이의 국가적, 문화적 경계를 넘고자 하는 일본적 욕망의 산물이며, 영화에 드러나는 초국성은 일종의 속물적 세련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 밖에도 이기형 교수의 한국 영화의 역사성에 관한 연구와 미국에서의 K-드라마 수용 상황 그리고 트랜스미디어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모바일 폰에서 애니메이션 그리고 모바일 폰과 드라마를 아우르는 트랜스 영상 문화의 여러 가지 발현을 살펴보면서, 내셔널과 트랜스내셔널 그리고 아시아 지역을 생각하는 학술회의였다.

한국에서 트랜스 아시아 지역 문화 연구:
한·홍 합작
이제 트랜스 지역 문화 연구의 한 예로 한류를 아시아 지역 문화 연구의 자장 속에 위치시키기 위해 범아시아 합작 프로젝트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 대중문화와 아시아의 관계 그 커넥션의 역사를 살펴보기 위해 1958년부터 1970년대 그리고 현재까지도 중국, 일본으로 확장 연계되어 범아시아(pan-Asia) 프로젝트로 성장하고 있는 한국과 홍콩의 합작 사례들을 살펴봐야 한다. 최근 한류의 자극으로 홍콩과 한국, 일본, 중국 등이 공동 투자·제작하는 한국 배우 주연의 범아시아 합작 영화들이 생산되고 있다. 이 중 한일 합작보다는 한국, 홍콩, 중국 합작 쪽 더 증가 추세이다. 진용과 함께 신무협 소설의 대가로 불리는 양우생(梁羽生) 원작으로, 청나라에 반기를 드는 7명의 무사를 그린 서극 감독의 <칠검>에는 한국 배우 김소연이 소수민족인 조선족으로 등장하고 당계례(唐季醴) 감독 성룡 주연의 <신화>에서는 김희선이, 진가신(陳可莘)의 <퍼햅스 러브>에는 지진희가 영화 속의 이야기꾼으로 등장한다.

1960년대부터 1997년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누리던 홍콩 영화계는 ‘메이드 인 홍콩’ 영화 자체의 축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합작을 통해 헐리우드에 진출하는 등 그야말로 초중국적, 초국적 확장을 하고 있다. 홍콩 영화의 이러한 성격은 1960년대 한국, 타이완, 일본, 싱가포르 등과의 합작으로 이미 상당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국의 액션 대가 정창화 감독이 쇼 브라더스와 활동 계약을 맺기 전에 만든 합작 영화 <순간은 영원히>(1968)는  그 배경이 홍콩에서 서울로, 그리고 타이베이에서 동경으로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영향을 받은 아시아 첩보원들과 중국 범죄 조직의 두목들, 그리고 미국  CIA 요원을 포함한 국제적 인물들이 등장한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영화 문화 속에서 홍콩은 벤치마크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영감의 교류 장소이자 경쟁 대상이다. 최근 영어로 출간된 한국 뉴웨이브에 대한 안내서의 제목은 <코리안 시네마: 새로운 홍콩>이었다. 2004년 25,900개의 웹사이트를 구글 검색을 해보면 대부분의 비평가와 팬들이 태국 영화 <옹박>의 주연 배우 토니 자가 보여주는 무에타이를 성룡이나 이연걸의 무예와 비교하고 있다. 서사적으로 보자면 <옹박>은 홍콩과 태국, 쿵푸와 무에타이의 경합을 그린 이야기라기보다는 이소룡의 <당산대형>처럼 시골의 전통과 도시의 부패를 다룬 영화다. 그러나 <옹박>의 민족주의적 시나리오는 홍콩 영화의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태국에서 촬영한 <당산대형>과 장철의 영화들은 나중에 장 클로드 반담이 주연한 <킥복서>(1988)로 이어진다. 그리고 홍콩과 미국 합작 영화로 태국에서 촬영한 영화는 로렌 아벤든, 신시아 로쓰록(Cynthia Rothrock) 등이 등장한 <후퇴도 없고 항복도 없다(No Retreat No Surrender 2 : Raging Thund-er)>(1987)가 있다. 이 영화에는 소련군대와 소림사 승려들이 함께 등장한다.     

2004년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영화회고전은 ‘아시아 네트워크의 뿌리를 찾아서 : 한국, 홍콩 합작 시대’라는 세미나를 열어 한국, 홍콩 합작의 역사를 짚어냈다. ‘한홍 합작’의 사례는 냉전 시기의 수출 주도형 경제 속에서 제한적 세계화 또는 혼성문화의 예다. 홍콩 영화 연구가인 샘 호는 1960년대와 1970년대 홍콩 영화에 한국에 대해 공감을 표현하는 영화가 많음을 지적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홍콩 영화 산업은 항상 적극적으로 외국 땅을 향해 사업을 넓히고 싶어 했다. 첫째로는 시장을 열기 위해서였고, 후에는 영화의 로케이션 촬영을 확대하기 위해 기획됐다. 1950년대부터 시작한 이러한 노력은 한국과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그리고 1970년대부터는 유럽과 미국과의 합작으로 이어졌다. 당연히 합작과 다른 지역에서의 현지 촬영 영화들은 정치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인  모든 것이 만나는 접점이 되었다.

한국과 홍콩 영화계의 관계는 메이저 영화사였던 쇼브라더스가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과 협력하면서 보다 확장됐다. 홍콩의 린다이와 한국의 신영균이 주연한 <달기>로 시작해 여섯 편이 넘는 영화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완성했다. 대부분은 중국의 역사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시대극이었고 부분적으로 한국 건축물을 활용하기 위해 한국에서 촬영했다. 많은 합작 영화들은 구체적인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서로 다른 버전을 개봉하기도 했는데 홍콩 관객을 위해 중국어로 사운드 트랙을 더빙한다든가 <대폭군>(1965)의 경우처럼 중국판은 리리화가 주연하고 한국판은 최은희가 등장하는 두개의 분리된 버전을 촬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홍콩은 액션 전문가인 정창화나 문예 영화의 대가 김수용과 계약을 맺으며 한국 감독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정창화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감독했는데 이 영화는 후에 홍콩 영화의 서구 진출을 열어준 영화가 됐다.

이 한홍 합작의 역사는 <와호장룡>으로 전세계에 알려진 홍콩 에드코 필름 프로듀서 빌콩(Bill Kong)이 최근 전지현을 범아시아적 스타로 주목하면서 제작한 <내 여자 친구를 소개합니다>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당대의 한류, 아시아 간의 합작, 범아시아 프로젝트를 이해하는 맥락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한홍 합작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 아시아의 ‘트랜스’ 와 
비판적·지정학적 판타지  
영화나 미디어를 통한 아시아 상호 간의 교류는 이제까지 지리적, 인식적 미지의 지역으로 남아 있던 아시아의 어떤 곳(elsewhere)를 구체적으로 스크린 위에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새로운 지정학적 서사와 이미지, 판타지로 아시아를 구성하게 하는 자원이었다.

일국을 넘어 아시아가 네트워킹 되기 위해서는  ‘트랜스’적 사유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를 넘어설 수 있는 비판적 · 지정학적 판타지가 필요하다. 헐리우드로 대표되는 영화 산업의 초국적 성격상 영화는 빈번히 국경을 넘어간다. 비 할리우드의 저예산 독립영화들도 각종 영화제등을 통해 국경을 이동한다. 영화의 이러한 월경은 한편으로는 초국적이며 다른 한편으로 지역적(local)이고 방언적(vernacular)인 이중성을 갖게 된다. 문화 실천의 영역에서 이러한 초국적 자본의 운동을 지양하는 ‘트랜스’적인 실천이 필요하다.

횡단하고 통과하며 동시에 넘어서는 트랜스에 덧붙여 나는 비판적인 지정학적 판타지를 제안하고 싶다.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자주 인용되는 저서 『상상의 공동체』는 다음과 같이 민족 국가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

“그것이 상상된 것이라는 이유는 가장 작은 국가의 구성원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동료 구성원들의 대부분을 안다거나, 만난다거나 혹은 심지어 소식을 들을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각각의 마음속에는 공유의 이미지가 있다. 국가가 제한적인 것이라고 상상되는 이유는 10억의 사람을 포함하고 있는 가장 큰 국가라고 하더라도 탄력적이긴  하지만 유한한 경계를 가지고 있고 그 국경 너머엔  다른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 주권이 있다고 상상하는 이유는 그 개념이 계몽주의와 혁명이 성역으로 위계화 된 왕조의 정통성을 파괴하던 시대에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공동체로 상상되는 이유는 개별 국가에서 실제로는 불평등과 착취가 횡횡함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깊은 수평적 동지애로 개념화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탄력적이긴 하지만 유한한 경계를 가지고 있고 그것을 넘어 다른 국가들이 놓여있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동시적으로 제한하고 가로지르고 전화시키는 비판적인 지정학적 판타지라는 개념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판타지의 공적인 재현의 공간으로의 표출인 영화는 이 비판적인 지정학적 판타지를 제시할 수 있는 매체 공간을 제공한다. 

비판적인 지정학적 판타지는 상상적 공동체들의 인식론적 지도그리기라는 능력과 어긋나는 것이다. 『상상의 공동체』에서 상상이 근대 국민국가에 대한 수호적이고 길항하는 정신적 작업이라고 한다면 비판적 판타지는 국민국가와 국민성의 유한한 경계를 의심하고 교란시키고 넘어서는 것이다. 비판적 지정학적 판타지는 기존의 경계, 지리 그리고 지도그리기를 판타지의 수호적 픽션이나 실제 정치와 관계 맺고 있다기보다는, 상상의 공동체 안에  위상학적 상흔을 만들어내는 변환들이다.

‘트랜스’적 사유와 절합된 지정학적 판타지는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국민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기존의 경계를 교란시키는 동시에 지역과 지역을 가로지르는 트랜스-로컬로서의 영상 문화의 의식적, 무의식적 작동 논리이다. 이러한 사유의 틀을 통과해 서구, 자본 중심의 세계화, 그리고 국수주의에  제동을 걸어 트랜스 지역 문화연구에 필요한 비판적 판타지를 생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