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헌책방 골목
인천 동구 금창동 일대, 배다리. 60년대부터 70년대, 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한두 번 쯤 들렀을, 옛 추억이 묻어나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위기에 처했다. 50년을 넘게 흥망성쇠와 부침을 겪으면서도 결코 명성을 잃지 않았던 배다리 헌책방 골목.

한때 이 골목에는 30~40개의 헌책방이 줄지어 들어서 있었고 헌책 가판대까지 골목 양편에 펼쳐져 어지간한 벼룩시장을 방불케 했다. 각종 참고서와 교과서, 대학교재, 원서, 문학서적, 종교서적, 동화집, 어학테이프 따위 등 없는 책이 없던 이곳 골목을 한 바퀴 둘러보면 찾는 책을 어렵잖게 구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시중가격의 반값 아래로 책을 사 볼 수 있어 주머니가 가벼운 서민층과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무엇보다 이 골목에선 중고등학생들이 수학과 영어 교재를 뒤적이며 청운의 꿈을 키우고, 문학가를 지망하는 소년 소녀와 청년들이 문고판 책들을 고르며 소설가 또는 시인이 된 자신들의 먼 미래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나 인터넷의 영향력 확대와 헌책을 찾는 이들의 발길도 뜸해지며 헌책방이 한두 개 씩 줄어들더니 지금은 집현전, 대창서점, 한미서점, 아벨서점, 삼성서점 등 헌책방 대여섯 곳만이 자리를 지키며 쇠퇴기를 맞고 있는 형편이다. 헌책방 골목의 쇠퇴와 더불어 추억거리도 사라질 위기다.

게다가 인천시와 인천시종합건설본부가 금창동 배다리 지역을 관통하는 50m 광폭 도로를 뚫으려 하고 있다. 배다리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서점 주인들과 배다리 주민들은 도로가 개설되면 인천의 근대문화와 60년대부터 지금까지 형성돼 온 문화적 정체성이 파괴될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다.

헌책방 골목, 과거와 현재로 흩어지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서점 중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집현전’의 대표 오태운(80) 할아버지가 헌책방을 개업한 때는 전쟁이 끝난 1953년이다. 오태운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최전성기는 60-65년 무렵이다. 좁은 가겟방을 가득 채우고 있는 헌책 더미를 정리하며 오태운 할아버지는 “이젠 전성기가 다 지났다”고 푸념부터 늘어놓았다. “과거에는 참고서, 자습서, 교과서, 대학교재도 많이 팔렸는데 인터넷 영향으로 책이 잘 안 팔린다”고 말했다.

오태운 할아버지의 말인즉슨, 학생들이 숙제나 리포트 과제를 하기 위해 헌책방에서 책과 자료를 찾았는데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으니 헌책뿐만 아니라 책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 할아버지는 “시대가 발전하고 살기 편해지는 것은 좋으나 원본을 봐야 진짜 공부인데 요즘 학생들은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본다”고 말했다.

이진규(71)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삼성서점’이 문을 연 지는 36년째라 한다. 소설가 지망생이었던 필자도 청년시절 한때 이곳을 들락거렸다. 삼성서점에는 지금도 소설책이 많지만 그때에는 구미가 당기는 베스트셀러들도 많았다. 당시에 술을 무척 즐겨 들었던 이 할아버지는 지금도 술에 대한 애착은 여전한 듯하다. 최근 이곳을 다시 찾은 어느 날 저녁, 이 할아버지는 벗들을 불러놓고 연탄난로 위에 생선찌개를 올려놓은 채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진규 할아버지는 기분 좋게 취기가 오를 때면 책값을 터무니없이 깎아주기도 했다. 기분파인 이진규 할아버지는 지금도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책값을 받는다는 후문이다. 물론 기분파인 이진규 할아버지도 그때마냥 후한 기분만을 부릴 수는 없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었다. “위기다. 겨우 명맥만을 잇고 있다. 오죽하면 변변한 안주도 없이 찌개 냄비를 끓여놓고 술을 마시고 있겠느냐?” 하는 이 할아버지의 말은 예사롭게만 들리지 않는다.

이곳에서 깨달은 사실 중 하나는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쇠퇴기에 접어든 것만큼 헌책방 주인들도 노쇠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젊음을 헌책방에 바쳤던 주인들도 어느덧 70대에서 80대의 은발의 노인이 됐다. 아벨서점 곽현숙(58) 대표가 젊은 축에 든다. 지난해 5월 개업한 ‘오래된 책 집’이 쇠퇴기에 놓인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최근 십 수 년 동안 유일하게 새로 문을 연 책방이다.

평생을 헌책과 함께 해 온 ‘한미서점’ 대표 장경환(74)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해지고 기력도 예전만 못해 집에서 쉬고 있다. 책방은 장 할아버지의 큰아들이 대신 맡아 운영하는데, 그는 “근근이 먹고 사는 정도”라고 한다.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 않는다면 헌책방 골목을 지켜왔던 노년의 책방 주인들이 하나 둘 은퇴를 하면서 배다리 헌책방 골목의 명성과 추억도 소멸될 처지다.

배다리, 그 야생성
최근 몇 년 동안 인천시는 경제 논리와 개발이라는 전능한 보도를 휘두르고 있다. 하나의 유기체로서 자연스럽게 쌓이고 오랜 빛을 발하는 인천의 역사ㆍ문화적 정체성은 망나니의 칼춤과도 같은 마구잡이식 개발정책에 의해 파괴ㆍ왜곡되고 있는 것이다. 헌책방 골목을 비롯한 배다리 지역도 예외가 아니다. 이곳은 경인철도 착공지(1897)이자 창영사회복지회관(19세기 말), 영화학교(1892), 창영초교(1907), 인천양조장(1920년대), 헌책방거리(1953). 이를 어머니의 품처럼 둘러싼 조그맣고 퇴락한 서민들의 주택들까지 인천의 개항기와 근대기, 산업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곳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헌책방, 문구점, 완구점, 화방, 책도매점, 옛날과자점, 무쇠솥 가게, 철물점, 공예점, 액자 가게 등이 잡초처럼 배다리 일대에 돋아나며 질긴 생명력을 보이고 있다. 동토나 황무지에서 잡초나 야생화를 발견했을 때 우리가 ‘생명’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갖는 것과 다름없이 이 거리에 서면 질긴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오늘날의 배다리는 사막처럼 척박하고, 그 척박함 속에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발버둥하며 둥지를 트는 것이 야생의 날것과 판박이기 때문이다.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가 뚫리면 배다리의 생명성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앞서 기술한 모든 것들이 흩어지고 고립되며 고사될 것이다. 행정 당국자들은 도로개설이 지역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며 사람들의 왕래가 조금 불편하겠지만 그다지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그러나 길은 생명의 공간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되고 소멸되어야 한다. 사소할지라도 인위적 힘이 미치는 파괴적 현상은 이미 오래 전에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헌책방 골목은 당초에는 “창영초교부터 영화초교 길목에 있었다”고 했다. 과거에는 지금 전철이 다니는 철로에 건널목이 있어 사람들이 쉽게 오갈 수 있었다. 그런데 경인전철 철로가 둑으로 높이 쌓여 길이 막힌 1975년도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끊기게 됐다고 한다. 그 후 80년대 초까지 책방들이 하나둘 씩 지금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화물차가 다니는 산업도로는 더 이상 길이 아닌 깊은 골짜기 또는 거대한 장벽에 불과할 것이다.

콘크리트 냄새 아닌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삶의 소리가 나며 체취가 느껴지는 ‘야생의 도시’는 정녕 이렇게 사라져야만 하는 건지, 정녕 삶의 야생성을 훗날 박물관에서 찾아야 하는 건지 묻고 또 되묻고 싶은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