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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의 빽판(복제판을 뜻하는 은어)과 옆구리에 낀 통기타 그리고 애써 외운 외국영화배우 이름이 문화적 표지였던 시대를 기억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했고 그래서 문화는 일상과 동떨어진 영역 또는 낭만적인 분위기에 에워싸인 초월적인 영역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상과 문화가 구별되지 않는 시대이며, 문화라는 말은 더 이상 비일상적인 가치를 낭만적으로 표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화와 매개된 일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마저도 경이와 혼돈의 지점으로 몰아넣는다. 

언제부터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인지 정확한 기점을 설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문화와 일상의 상호침투 현상이 뚜렷하게 가시화된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그 시기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정치제도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시기이고, 경제적으로는 1인당 국민소득 1만 불에 도달한 시기이며, 문화적으로는 인터넷과 멀티미디어가 일반화된 시기이다. 한국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서편제>가 있었고, 음반시장에서는 한 해 동안에 여러 장의 밀리언 셀러를 만들어 냈다. 어디 그뿐인가. 타르코프스키(Andrei A. Tarkovsky, 1932~1986)의 <향수>를 보겠다며 10만 명에 달하는 청중이 극장을 다녀갔다(당시의 유명한 영화비평가는 그 현상을 보고 본격 영화잡지를 만들었다. <향수>의 관람객 가운데 5%나 10%만 독자로 확보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한다. 물론 그 잡지는 100호를 채우지 못하고 폐간했다). 대중문화이든 고급문화이든 간에 보고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텍스트에 대한 사람들의 열광이 이어졌고, B급 문화와 하위문화적 텍스트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사회현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언더그라운드 팬진의 비공식 집계이기는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서울 시내에는 200개가 넘는 밴드가 연주를 하고 있었다. 문화는 낯선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먹고 싸고 자고 하는 일상이었다.

문화의 시대는 그리 길지 않았다. 외환위기를 맞아 그 열기는 한풀 꺾이게 되었고, 문화 영역은 수익성 모델을 추구하는 문화산업의 논리에 의해서 재편되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문화적 열정은 내면화되었고 다양한 문화적 흐름들이 저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비록 문화산업이 문화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문화와 매개된 일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이라는 문화적 원리로서 자리를 잡아나가기 시작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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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용되는 문화라는 말은, 비유를 하자면 발 없는 유령과도 같다. 문화에 대한 정밀한 개념사적 정리는 이 글의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이고, 다만 문화와 관련된 거시적인 변화를 거칠게 살펴볼 수는 있을 듯하다.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문화의 정의, 문화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1) 인간의 사고와 표현의 뛰어난 정수(精髓), 2) 물질문명과 대립되는 정신적 가치의 영역, 3) 사회관습겙∞죦규범겵┻탛전통 등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생활양식, 4) 대중문화를 통해서 관철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허위의식, 5) 상징체계 또는 의사소통양식, 6) 사회통합 및 조절의 기제 등. 참으로 광범한 함의를 지니고 있지만, 문화는 총체적인 생활양식, 이상적인 가치, 통합적인 질서의 매개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최근의 문화연구는 그 강조점이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문화는 다원적인 가치와 다양한 권력 층위가 존재하는 이질적곂?瑛岵?공간으로 제시된다. 또한 문화의 위상이 ‘사회구조와 인간적 실천의 매개적겫隙萱?영역’으로 정립됨으로써, 문화의 영역 속에서 재생산되는 경험의 양식과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겳せ瑛?조건들에 대한 탐색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면 주체의 능동성이 사상되고 주체의 자발적 실천을 강조하면 구조의 측면이 희석되는 딜레마를 해결하고, 주체의 능동적 실천과 사회구조의 결정성을 동시에 존중하면서도 그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패러다임을 찾고 있다.

오늘날 문화는 인간의 실천을 사회 구조와 매개하는 영역일 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의 의도가 사회구조의 논리와 조건 속에서 분절되는 공간으로 이해되는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문화의 영역에서는 주체의 실천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구조의 결정성이 어떤 양상으로 작용할지는 미리 결정되지 않는다. 다만 문화 영역에서의 실천은 국면에 따라 잠정적으로 결정될 따름이라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문화는 경제적 생산양식이나 정치사회적 체제로 환원될 수 없는 다층성과 복합성을 가지는 비결정성의 영역인 동시에, 억압과 저항이 순간순간 그리고 국면마다 결정되고 재조정되는 매개와 분절의 공간인 것이다. 이 지점에서 일상생활과 경험적 차원의 중요성이 부각되는데, 정치적 제도와 사회적 이념이 인간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공간은 일상생활이고 경험의 방식은 문화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화는 우리의 몸을 관통하며 무의식을 구성하는 운동성이며, 취향의 (집단적) 무의식이 발현되는 독특한 영역이다. 따라서 문화라는 용어는 일상생활(everyday life), 개인적 경험영역(private life), 생활세계(Lebenswelt) 등과 같은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이 지점에서 문화연구는 일상생활의 현상적인 모습들에 대한 소박한 재현을 넘어서, 일상생활을 재생산하는 사회적인 조건과 제도에 대한 문화적인 해석을 포괄한다. 문화적 취향, 심성(mentality), 감수성, 아비투스(habitus) 등과 같은 사회적인 태도의 원천과 근거가 현대 문화연구의 중요한 주제항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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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영의 「현단계의 자본주의와 삶문화」<플랫폼>2007년 1?월호는 오늘날 문화의 여러 문제들을 마르크스적 관점에서 파악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글이다. 자본주의의 지양겚曼물?관련해서 문화를 파악하는 관점과 태도는, 우리의 일상과 노동이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 그 실천적겫綢퓽?성찰적 의미를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오늘날의 문화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을 따라 가보도록 하자.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도달한 단계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우리는 현 시점의 전지구적 자본주의에 대해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한 단계’라고 확연히 말할 수 있다”위의 책, 101쪽는 것이 기본적인 현실인식이다. 경제와 비경제의 경계가 무너지고 문화활동에 자본이 집중되며, 문화활동은 경제활동과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 이르렀다. 명료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오늘날 문화의 중요성이 점증하고 있는 것은 자본의 증식이 문화의 영역을 향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파악하고 있다. “자본이 지구의 사회적 삶 전체를 포섭하는 단계에” 들어와서 “문화가 자본의 증식을 위한 영역으로 포섭되어, 문화 생산 활동이 경제활동으로 돼버린 시대”위의 책, 109쪽가 바로 오늘날의 문화가 처한 상황인 것이다.  

자본이 문화 영역과 관련된 삶의 모든 활동 영역을 포섭하게 되면서 소외의 양상은 전면적으로 확산되고 비물질적인 영역으로까지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현대사회는 기 드보르(Guy Ernest Debord)가 말한 바 있는 ‘스펙터클의 사회’, 즉 문화적으로 가공된 이미지들이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왜곡하고 인간소외를 심화시키는 사회인 것이다. 하지만 소외는 곧 자본주의 극복의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자본이 삶 전체를 포섭했기 때문에 소외가 전면적으로 심화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어느 곳에서나 자본주의와 관련된 싸움이 가능해졌다는 것. 따라서 문화와 일상의 영역으로부터 기존의 정치와는 다른 새로운 정치 개념이 도출된다. 정남영이 말하는 삶정치와 삶문화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문화를 인간해방의 과제와 연관시킴”위의 책, 102쪽 으로써,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자본주의적 인간형이 아니라 자본주의 바깥을 사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주체를 새롭게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인간 또는 새로운 주체형성의 논리는 무엇일까.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자기구성(자기창조)이 하나이고, 니체(F.W. Nietzsche)가 말한 바 있고 들뢰즈(Gilles Deleuze)가 『니체와 철학』에서 인상 깊게 정리한 ‘작용적인 활동’이 다른 하나이다. 작용적인 활동을 통해서 비(非)겧?反)자본주의적인 주체를 스스로 창조하고자 하는 실천이, 다름 아닌 삶문화이고 삶정치인 것이다. 다음의 인용문에는 삶문화의 중요한 측면들이 핵심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현대의 프롤레타리아인 다중(多衆)이 수평적인 소통, 네트워크적 조직화,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조적 상호협동을 통해 생산하고 유지하며 끊임없이 갱신하는 바의 것이다. 그것은 국가 조직도 아니고 사회적 제도들의 집합도 아니다. 그것은 현재 속에 존재하는 코뮤니즘(communism)이다. 이 공통적인 것의 형성과 확대가 바로 삶문화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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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가 잘 쓰는 부사적 표현을 빌자면, ‘원리에 있어서’ 삶문화 이론은 옳다. 그리고 정당하다. 문제는 삶문화가 어떻게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국면들 속에서 다중의 수평적인 소통과 연대 그리고 상호협동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보다 구체적인 논의와 만나고 싶다는 소망에서 몇 가지의 생각을 적어 본다.

먼저 한국사회가 도달해 있는 문화사적 위치, 급격하게 변화하는 한국사회의 욕망과 가치관들을 고려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고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일상을 영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지양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문화의 외피를 쓰고 있더라도 자본은 늘 자신의 법칙을 관철해나가니 말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일반이론으로 한국사회의 현재성과 특수성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본주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거시적인 그리고 매우 중요한 격자이다. 그렇지만 너무 커다란 눈금의 자로는 미시적인 차원을 측정할 수 없다. 정남영도 지적하고 있듯이 자본주의의 극복은 다중들의 주체형성과 작용적 행위들에서 나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그 미시적이고 복합적이며 특수한 운동들, 들뢰즈가 말한 바 있는 리좀(rhizome)적인 운동성들을 파악할 수 있는 매개 논리가 제시되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로 말하고 싶은 것은 삶문화 이론과 관련된 구체적인 실감(實感)이다. 삶문화의 실제적인 사례라도 제시해준다면, 그 사례가 반드시 성공적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삶의 차원에서 이해가 쉽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문화의 경험적인 그리고 실천적인 차원에 접근하면 할수록, 문화를 인간해방의 과제와 연관시키고 자본주의 바깥을 사고하고 상상할 수 있는 주체를 새롭게 만드는 일은 미궁에 빠져버리게 된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디문화는 여전히 대안적 가능성인가, 소수집단들의 대중문화에 불과한가, 중산층 대학생 문화의 일종인가, 아니면 문화적 스타일들의 혼성모방에 불과한 것인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레츠(LETS)와 같은 지역공동체의 대안적 교환경제에서 비자본주의적 교환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상황주의는 왜 끝까지 능동적으로 세계와 인간을 구성해 나가는 데 성공할 수 없었는지, 사회비판적인 태도나 감수성 자체가 상업주의의 아이콘들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삶문화의 전략은 무엇인지, 단순히 자본의 논리가 문화영역에 관철되고 있다고 치부해 버려도 좋은지 등등. 구체적인 삶의 과정 속에서 어떤 모습들이 삶문화일 수 있는지, 전체가 아니라면 부분만이라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삶문화를 이론적인 배경 아래에서 머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삶문화를 삶의 구체적 맥락과 상황 속에서 상상할 수 없다면, 삶문화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화도덕적 정언명령으로 오인될 위험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삶문화 이론을 접하고 난 후, 나의 문화적 활동이 과연 비자본주의적 또는 대안적인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능동적이고 작용적인 과정인지 아니면 자본의 문화적 침탈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고 있는 과정인지 혼란스러워져서, 정작 주체의 자기구성을 위한 작용적 행위를 망설이게 된다면 정말로 곤란한 일이 아니겠는가. 정남영의 글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을 도덕화할 때 생겨나는 위험을 충분히 예견하고 견제하면서 씌어진 것이다. 삶문화론이 다중과 소통하는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가능성을 잠시 짚어본 데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정남영의 글은 터널효과(tunnel effect)처럼 번다한 문화현상에 눈길 주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들을 성찰하게 만든다. 문화가 인간해방과 관련되어야 하며, 비자본주의적인 주체의 생성을 욕망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며, 다중의 소통과 연대를 통해서 주체의 구성과 해체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삶의 차원이라는 사실을 다시 인식하게 한다. 소외와 결핍에서 연유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성을 욕망하는 욕망이 새로운 주체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문화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삶의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이 글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다듬어 보게 되었다. 다만 독자로서 욕심이 조금 지나친 것일까. 삶문화가 존재론적인 보편성의 영역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과 만날 때 보다 풍요로운 가능성을 피워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의 구체성 속에서 생성되는 삶문화에 관한 그의 목소리를 더 들어보고 싶다.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