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근대인천의 공연장에 주목하는가?
역사 속에서 인천은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굴곡을 피부로 가장 절실히 느끼게 해주는 도시가 아닐까 싶다. 항구도시로서 개항과 동시에 타문화를 꾸준히 받아온 문화접변지역이었으며, 현재 서해안 시대에는 중국을 비롯한 각국으로 통하는 창구이자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시대에는 식민정책에 따라 많은 부침을 겪기도 하였으나, 경제활동 및 정치적인 면에서 매우 활기찬 면모를 지녔다. 인천은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역사겵ㅔ죦경제적 측면에서 주로 주목을 받아왔기에 문화예술 부문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인천의 정체성을 보다 심도 있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동안의 정치겭英말?중심의 역사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근현대사의 보다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일제시대 인천은 개항 이후 쌀 수출입 항구로서 전국의 미두상(米豆商)들이 몰려들어와 번영하면서 자연스레 소비와 유흥의 문화도 증가하였다. 이와 더불어 극장문화 및 공연예술도 성장하였으리라 본다. 배우 복혜숙(卜惠淑)과 유신방(柳新芳), 가수 이화자(李花子),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 등은 한때 인천의 권번(券番, 기생양성소)에 적을 두기도 했던 유명 예술인이다. 이 외에도 인천의 공연무대를 기반으로 하여 예술적 성장을 이룬 사람들이 있다. 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인 이은주(李銀珠,1922~ 본명 李潤蘭) 역시 1939년 인천에서 데뷔한 인물이다. 이은주 명창은 7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의 공연 정황과 관중들의 호응 등 인천의 이모저모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말기 인천 공연문화의 양상과 국악계에서의 역할, 파급력 등을 증명할 수 있는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이번 <플랫폼>에서는 이은주와의 인터뷰를 통해 일제시대 인천의 공연문화 및 극장의 풍경을 구성해봄으로써 인천의 문화 지형을 그리는 데 하나의 단초를 마련하려 한다.

반대를 무릅쓰고 무대에 서기까지
올해 여든여섯인 경기명창 이은주는 ‘국악계의 영원한 현역’이다. 요즘도 매일 오전 11시부터 두 시간씩  20여 명의 제자를 맡아서 지도하고 있으며, 한 달에도 서너 차례씩 공연 무대에 선다. 1948년 첫 음반을 발표한 이후로 국내 소리꾼 중 최고 기록인 총 400여 장에 달하는 음반을 낸 일류 명창. 열여덟 어린 나이부터 스타로 떠올라 평생을 호령하며 거침없이 살았을 것만 같은 이 원로 국악인에게도 가슴 졸이며 데뷔하던 첫 무대가 있었다. 바로 ‘흥명극장’이라는,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인천 한 극장의 명창대회를 통해서였다.

“내가 원래 고향이 양주였어요. 아버지가 무서워서 소리를 하지 못했어요. 야단을 쳐서. 우리 어머니하고 몰래 도망을 왔어요. 서울로 내가 우리 어머니의 친구 분이 아는 분이 있어서 소개를 받아줘서 원경태(元慶兌) 선생님한테 나를 배우게 해준 것이에요. …(중략)… 좋은 데로 시집을 가지 왜 이런 생활을 하느냐며 야단야단을 치고 하셨어요. 나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던지 나는 이걸 해야지 이것을 안 하면 난 죽는다고 말이야. 결과적으로는 내가 시골서 아버지 몰래 도망 오다시피 했으니까 내가 참 아버지한테 죄는 지었지만은 이왕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해야겠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마음이 깊었어요. 남한테 얘기도 안 하고 내 속에만.”
보수적인 농촌 마을에서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치자 이은주는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가출에 가까운 도망을 통해 경성의 소리 선생 집으로 들어갔다. 5년여 세월 동안 갖은 고생과 끈질긴 노력으로 소리가 안정기에 접어들자 스승 원경태는 인천의 명창대회에 나가라고 권유했다.
“내가 그때 우리 선생님께 소리를 5년 동안 배웠거든요. 선생님이 하루는 소리만 계속 배울 게 아니라 이제는 나가서 네가 잘한다는 것을 알려줘야 될 게 아니냐 그러시더군요. 아유, 아직도 내가 부족하다 그러니까 괜찮다며 이번에 인천에서 아주 대대적으로 하니까 거기 한번 나가봐라 그러셨어요.”

인천 시내 누비며 공연홍보에 나서다
당시 명창대회는 무대에 서서 조용히 소리만 하고 들어가는 형식이 아니었다. 공연 전 떠들썩한 홍보와 공연 현장에서 이뤄진 인기투표는 열여덟 소녀에게 놀랍고 흥분되는 체험의 연속이었다.
“그때는 뭐냐 하면 인력거를 타고 인천 시내를 그냥 몽땅 돌았어요. 앞에서는 음악을 틀면서 인력거를 타고 돌아다녔죠. 그게 뭐냐면 아무개 극장에서 무얼 한다, 누가 나온다, 말하자면 선전하기 위해서 그랬던 모양이에요. 그때만 해도 어리니까 인력거 타고 가는 게 좋아서 싱글벙글 하면서 …(중략)… 사람들이 쫓아오지.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아이고! 쬐끄만 애가 인력거를 탔어! 아이고! 저 별일이야! 뭘 하는데 저렇게 쪼그만 여자가 인력거를 타고 가?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싱긋벙긋 하고. 앞에서 음악을 쳐주니 신이 저절로 나지. 인력거를 타니까 어린 마음에 그게 좋았던 모양이야.”
이은주에 따르면 노란 옷을 입고 북을 치는 사람이 인력거 주변을 함께 따라다니며 홍보하였고, 이러한 떠들썩한 행사는 공연 전날 1~2회 했다고 기억했다. 이것을 ‘마치마와리(町廻, 거리 행진)’라고 불렀는데, 당시 가극단이 주로 썼던 가두선전 방식이다. 지방공연을 가면 낮에 화려한 의상과 분장을 한 수십 명의 배우들이 하나씩 인력거를 타고 관악밴드 뒤를 따라 거리를 누볐던 것과 같다. 인력거 앞에는 배우들 이름을 크게 써 붙여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유민영, 『한국연극운동사』, 2001, 태학사, 161쪽 인용. 같은 책 182쪽에 따르면 1938년 동양극장의 최독견과 박진을 중심으로 “배우들은 무대에서 보아야 한다”며 마치마와리를 폐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방의 일본인 극장주들은 “마치마와리가 있어야 흥행이 된다“며 이를 없애는 데 반발하였다.

인천의 언론인 고일(高逸)이 지은 『인천석금(仁川昔今)』(1955)에 따르면 해방 후엔 포스터나 신문광고, 가두 포스터 등 여러 매체를 통해 홍보를 했지만, 일제 때 애관극장에선 큰 북, 작은북을 지게에 짊어진 극장 전속 고용인이 작은 쇠북까지 동원하여 박자에 맞춰 두들기고 다니며 공연 프로그램을 안내했다.

관중의 현장투표로 1등 선발
공연 전, 온 인천을 돌던 홍보전 외에도 소녀 소리꾼을 기다린 것은 관중들의 즉석 현장투표였다.
“그때, 그래서 거기서 하게 되어서 했더니 거기는 뭐냐 하면은 들어갈 때 개개 표를 사서 들어가지 않아요? 표를 사고도 표 한 장을 따로 줘요. 손님한테다가 따로 줘서 누가 여기서 잘 하는지 손님들이 알아가지고 투표를 해주십쇼. 그렇게 된 것이에요. 함에다 넣어가지고 다 하고 난 다음에.”
공연장의 열기만큼이나 뜨거웠던 것은 무대 뒤 출연진들의 감정대립과 견제였다. 이은주에게 인천은 고향 양주와 경성 외에는 처음 가 본 낯선 도시였다. 더군다나 처음 참가한 명창대회에서 다른 출연자들의 질투는 불편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때만 해도 일본 시대라서 다다미방에 무대를 해놓았어요, 거기서 노래도 하고. 그때 나하고 남도소리 하는 사람이 있었어요. 두 사람이 말하자면 내기한다 그거에요. 나는 그때 어리고 처음 나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순진하고, 뭐라고 얘기를 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남도소리를 하는 여자는 나한테 이겨야지 지면 안 되겠다는 마음을 먹었는지 싸움을 걸 것처럼 행동했어요. ‘그러지 말라’고. ‘내가 뭐 여기 상 타러 온 게 아니다. 아, 당신이 타면 좋지 뭘 그래?’라고 말했죠.”
감정적으로 불안한 상황임에도 이은주는 기량을 제대로 발휘해 관중을 사로잡았다.

“어쨌든 그때가 열일곱 살인지 아마 그즈음 되었을 거예요. 나이도 어리고, 하라니까 하라는 대로 한 거죠. 당시 목소리가 참 좋았거든요,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듯이 그렇게 잘했으니까. 극장에서 선생님이 <수심가(愁心歌)>가 좋겠다고 하라고 하셨어요. 선생님은 뭐든 다 나한테 줬거든요. 극장에서 <수심가>를 하면서 나이도 어리고 키는 작은데 앉아가지고 얄망궂게 소리를 하니까. 얼굴도 예뻤었거든요. 그 노래를 하는데 그 사람들이 박수를 치고 어찌되었든 굉장했어요. 자리에 꽉꽉 들이찼고. 나이는 어렸어도, 아! 박수는 이렇게 받는 것이구나! 라고만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어쨌든 내 힘껏 불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수심가>를 했어요.”
<수심가>는 서도소리를 대표하는 평안도 민요다. 현재 이은주가 경기민요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특이한 부분이다.

“참 기분이 좋게 극장에서 노래를 하는데 기가 막히게 참 노래가 잘 나왔어요. 그렇게 소리를 배웠어도 내가 목이 쉰 적도 없었고 힘껏 불렀지요. 어쨌든 재청을 하고 박수를 받고 난리가 났거든요. 내가 다 하고 내려오니까 손님들이 다 나와서 등을 두드려주면서 쪼그만 게 참 수고 많았다. 너 애썼다. 이래 가면서 사탕을 사서 너 애썼으니 이거 먹어라 하며 주고 그러더라구요. 노래 다 끝나고 난 다음에 함을 뜯어서 표가 이렇게 다 나왔는데. 나는 뭐 되려니 생각도 안 하고 소개를 이미 했으니 노래를 끝마치고 나가서 있었는데 거기서 투표를 종합한 결과 제일 많은 표가 나왔어요.”

이은주가 회고하는 1939년 흥명극장의 명창대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동아일보>의 1928년 3월 7일 인천남녀명창대회, 1929년 1월 12일 경인명창연주 등의 기사를 보건대 당시 인천지역에서 이같은 공연문화가 대중문화로 형성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1930년 9월 20일에는 조선극장에서 개연한 조선팔도명창대회를 한국 방송 역사상 최초로 이동마이크로폰을 통해 경성방송국에서 중계했다.

이는 나중에 유성기음반 발매의 시발점이 된다. <동아일보> 1930년 9월 23일자 참조.

1920~1930년대의 신문자료를 통해 추측해 보면 명창대회는 특징에 따라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1925년 봄부터 언론사(<매일신보>) 주최로 예기들이 참여한 서울의 권번 네 곳의 대항 공연.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정상급 명창들이 모여 벌인 명창대회,유민영, 『한국연극운동사』, 2001, 태학사, 56쪽. 그리고 신인들의 등용문이었던 ‘소리 경창대회’,‘소리 유행가 경연회’이다. 1940년 2월 11일자 <동아일보>에는 신천지국에서 개최한 제1회 남녀가수 대경연회가 열렸는데 30여 명의 참가자 및 대만원의 관중이 있었고, 1등에서 3등, 입선까지 순위를 매겼던 기록이 있다.
이은주가 참여했던 인천 흥명극장 명창대회는 정확한 기록을 발견하기 어렵고, 당시 공식적으로 데뷔하지 않은 소녀 소리꾼 이은주가 출연하여 관중이 등수를 매겼다고 하니 소리유행가 경연회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마치마와리에 대한 기억을 참고한다면, 정식 명창대회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볼 수 있다.

1등 수상품은 이층자개농
이은주가 청중의 절대적 지지 속에서 1등을 하자 스승 원경태는 눈물을 글썽이며 장하다고 이은주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당시 신문사 등 기관 주최의 명창대회가 많이 열렸지만 상품이나 상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1925년 경성에서 열린 권번의 경연대회에서는 인기투표까지 실시하여 수상자들에게 옷이라든가 화장품 등을 주기도 했다. 이은주의 회고에 따르면 흥명극장 명창대회의 1등 상품은 이층짜리 자개농이었다. 1등 발표 후, 25~26명의 사람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벌였다는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별도의 시상식(혹은 뒷풀이)이 따로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지금은 상이 얼마나 좋아요. 근데 그때만 해도 이층자개농이 1등 상품이야. 나는 그걸 잊어버리지 않아요, 이층장에 자개를 놓았는데 기가 막히게 아주 잘 놓았어요. 좋게 해놨어요.”
이은주는 자신을 위해 고생한 스승을 생각하여 소리 선생 원경태에게 이층장을 선물로 드렸다고 한다.

인천의 귀명창, 소녀 명창을 탄생시키다
소리를 감상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춘 사람을 ‘귀명창’이라고 부른다. ‘귀명창’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명창이 될 수 없었다. ‘귀명창’의 중요성은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귀명창 대회’를 개최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천의 청중은 문화적 수준이 어떠했을까? 이은주는 당시 현장을 가득 메운 청중과 그들의 열렬한 반응에 대해서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좋다! 좋다! 해가면서 장단을 쳐가면서, 노인네들이 다 있잖아요. 그렇게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수심가>는 목소리 자체가 꺾어 내리고 올리고 하는 걸 아주 멋있게 해야 되요. 그래야 슬플 땐 슬프고, 악 써서 할 적에는 악 써서 해야 잘한다고 하죠.”

대규모 극장의 운영과 수준 높은 공연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이를 수용할 만한 문화적 역량과 성숙된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인천의 예술적 수준은 상당했다 할 수 있다. 일제시대 인천부 유지들이 인천의 현황을 기록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1897년 이전에 이미 ‘하나미찌(花道, 가부키 극장의 무대설비 중 하나로 객석을 따라 무대에 이르는 배우들의 출입로)’를 갖춘 100석 규모의 극장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전하지 않으며 가부키좌(歌舞伎座)에 와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고 보았다.

김호연, 「개화기 공연예술의 변화와 그 의미-일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양학』

38권, 2005.1929년 열렸던 인천남녀명창대회에서 당시 조선에서 이름을 날렸던 이동백, 이화중선 등이 출연한 것은 인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케 해주는 대목이다. 시간상의 차이는 있지만 애관에서 열렸던 1928년 인천명창대회의 입장료는 상층 40전, 하층 30전, 소인 20전이었다. 1932년 7월 8일부터 3일간 열렸던 조선음률협회 주최의 인천명창대회의 입장료는 30전, 20전이었다.<동아일보> 1932년 7월 9일자 참조. 1929년 2월 3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경성의 직물 직공 임금분쟁 사건을 보면 옷감 한 필을 짜는 가격이 30~35전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인천명창대회는 누구나 쉽게 가기에는 관람료가 비싼 편임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경성 우미관에서 열린 명창대회의 입장료는 1원과 50전이었다. (<매일신보>, 1928년 9월 25일자) 그럼에도 이 대회는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손님들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어. …(중략)… 수백 명이 아니죠! 많죠! 어쨌든 극장 안이 꽉꽉 차 가지고, 서서 보는 사람도 있고. 굉장했었어요! 그래서 그 신문도 나고 라디오 방송도 나오게 되고 그러니까 자연스레 알게 되니까 이은주라는 사람이 자꾸만 궤도에 올라가는 거예요. 이번에는 어디서 오느라 하고. 방송도 수차 많이 다니고.”
“나가서 노래하는데 그때만 해도 집이 무대가 아니고 일본 시대라가지고 이 다다미방이에요. 다다미방에다 무대를 해 놓았어요, 앉아서 다다미방인데 거기 앉아서 노래하고. 지금도 일본 가면 그렇게 해놓은 데가 많거든. 가부키라고 왜 있잖아요? 그거하면 일본에서 그런 데서 하거든. 그 식으로 만들어놨거든. 2층짜리로. 우리(공연자)는 둔덕이 있고 우뚝 올라온 데 크게 해놓고. 손님들은 밑에서 보는 거예요. 약간 얕지.”

1939년경 최소 수백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던 극장이 현대식 건물이 아닌 다다미 식이었다는 것은 조금 의외다. 그러나 다른 극장들과 비교할 경우 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1930∼1940년대 공연장은 현대식 건물과 다다미식이 혼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각사의 경우 현대식 건물이었으나 의자들은 철이나 목재가 아닌 층계식 의자였으며, 말하자면 계단이 그대로 의자였다. 계단은 마룻바닥 재질로 되어 있어 윤기가 흘렀다. 반면 원각사의 경우, 극장에 들어갈 때 모두 신발을 맡기고 신발 표를 탔으나 서민층은(평상시에도 신발을 신지 않은 이가 많았다) 그런 혜택도 받지 못하고 출입한 탓에 발을 옮길 때마다 흙이 수를 놓았다. 그래서 얼마 후부터는 그런 사람에겐 우물에서 씻고 난 후에야 들어가게 했다는 회고가 있다. 원각사는 거적때기를 깔고 쭉 둘러앉아서 공연했다고 한다.유민영, 『한국근대극장변천사』, 1998, 태학사 원각사보다 나중에 지은 일본인 소유주 극장들도 대체로 의자 없는 다다미방이었다. 따라서 이은주가 의자 없는 극장에 좌석 수 및 관중이 정확히 몇 명이었는지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스타를 향한 인천 남성 팬들의 열광
명창대회 이후 이은주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동서고금 이래 지구상에 자유연애가 없었던 적이 과연 있었을까? 일제 치하의 궁핍한 식민지 현실 속에서도 소녀 명창을 향한 인천 남성들의 구애 행렬이 이어졌다. 만나달라며 조르거나 팬레터를 보내는 등 요즘의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우리 집 번지수를 알아가지고 편지를 해서 어떻게 좀 만나볼 수 없느냐고 그랬어요. 그때만 해도 겁이 나고. 참 그때는 얼굴이 그냥 도화꽃 핀 것 마냥 참 예뻤어요. 지금은 보잘 것 없지만. 그래서 편지도 오고. 요즘 같으면 전화가 왔으니 얼마나 좋아요. 그때는 전화도 없고 그저 편지로만 왔다 갔다 하고. 한번 만나자고 해서 만났지. 화신백화점에서 만났어. 화신백화점에 가서 거기 인제 찻집이 있는데, 거기서 같이 만나서 얘기도 하고. 노래한 거 이런 걸 얘기해가면서 깔깔대고 웃고. 그렇게 하면서. 지금도 어쩌다 당시 팬들을 길에서 만날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 옛날 생각이 나는데. 날보고 그분들이 참 굉장했었어! 그때, 그 어린 마음으로서 그 앉아서 쪼그만 게 소리를 하니. 얼마나 그게 참 저게 잘할까? 참 그걸 다하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놀래더라구요.”

명창대회 이후 이은주는 자신의 팬이었던 인천 남성들 중 소사에서 포목점을 하는 남자와 결혼했다. 이은주가 동생을 부양해야 한다며 결혼을 거절하자 남자는 동생을 모두 책임지겠다고하여 결혼하게 되었다. 남편과의 사이에는 딸을 한 명 두었다. 결혼에 관하여 이은주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말기의 시대적 상황과, 당시 동생들을 부양했어야 했던 이은주의 가족사적인 상황을 미루어 볼 때 결혼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흥겹다 할 때 흥! 바로 그 흥명극장!
이은주에게 1등의 영광을 안겨주면서 젊은 스타 탄생의 막을 열었던 극장은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지는 인터뷰 내내 흥미로운 관심사였다. 지금까지 이은주의 공식 데뷔 무대는 인천의 ‘홍명극장’으로 알려져 왔다. 간혹 ‘흑룡극장’이라는 기록도 있지만, 이은주의 공연 팸플릿, 각종 시상 관련 약력에서 대부분 ‘홍명극장’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어 있다. 그러나 본 취재과정을 통해 이은주는 당시 극장 이름은 홍명극장이 아니라 ‘흥명극장’이었다고 정정하여 주었다.

“흥, 흥, 흥명극장. 흥겹다 할 때 흥자. 흥명극장이예요.”
이은주의 구술을 기록하던 초기 과정에서 ‘흥명’을 ‘홍명’으로 잘못 기록하였고, 이것이 계속 재인용되면서 이은주의 공식기록으로 고착된 것이 아닐까 싶다.
“얼마 전 인천에서 여기 흥명극장이라고 있었는데 지금 있는지 모르겠다고 거기 있던 어떤 사람한테 물어봤어요. 그냥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사람한테 물어봤거든. 여기 극장이라고 있고, 홍명극장이라고 있었는데. ‘아, 그거 일본놈들이 했던 극장이에요.’ 그러더라구. 뜯어고친 것이 아니라 아주 몽땅 다 고쳤잖아. 아예 헐고.”

안타깝게도 일제시대 많은 극장들은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이름이 바뀌었으므로, 인천 흥명극장의 명칭이 무엇에서 무엇으로 변경되었는지, 현재의 어떤 극장을 가리키는지 등에 대해 문헌기록을 찾는 데 한계가 따랐다. 인천의 지역적 특성상 이주민 비율이 높기에 70여 년 전 시절의 인천 풍경을 기억해낼 수 있는 현지 토박이들을 만나 확인하기도 힘들다. 이은주는 자가용을 타고 식당으로 가는 길에 그 주변을 지나치게 되어 잠시 내렸고, 마침 길을 지나가던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흥명극장의 위치를 물었더니 바로 그 자리가 흥명극장이었으며 지금은 신축 극장이 들어섰음을 확인했다고 했다. 대형 극장은 아니고 적당한 규모의 극장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이은주가 인천의 현재 지리를 잘 몰라 그 극장의 정확한 위치는 도저히 기억해내거나 설명해내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흥명극장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긴 역사를 지녔으며 현재 대형 극장으로 변경된 극장으로 우선 애관극장을 들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인이 처음 경영하였고, 당시 각종 명창대회가 애관에서 열렸던 기록이 남아있다. 1895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고 한국전쟁 때 소실된 극장을 1960년 지금 주인의 조부가 인수하여 재건축하였다. 그러나 애관극장은 과거 2층 벽돌 구조물이었으므로 다다미방에서 공연했다는 이은주의 증언과는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애관극장처럼 예술사적으로 중요한 극장이었다면 이은주 역시 쉽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은주 명창이 공연하던 1939년을 전후하여 흥명극장이 단순히 판소리겷∮?신극 등을 공연하던 공연장이었는지, 영화도 함께 상영하던 극장이었는지도 정확치 않다.

현재 인천에는 수십여 개의 극장이 존재한다.

이은주가 신축된 흥명극장 터를 찾아본 것은 약 1년 반 정도 전의 일인 듯하니 2005년 즈음이 아닐까 추정된다. 참고로 2004년 인천지역 내 극장 수는 2곳의 자동차 극장을 포함해 모두 63개였다.

1950년대 말까지 인천에 있던 영화관은 모두 7곳인데, 6?5 전쟁 중 부서졌다가 다시 문을 연 애관극장을 비롯해 동방극장과 키네마극장, 시민극장 등이 개봉관이었고, 문화겧見쾪장안겴光뎠蔓?등이 재개봉관이었다 한다.좥한세기 넘는 극장 변천사」, <인천일보> 2004년 8월 12일자 참고. 일제시대 이전부터 현재까지 극장 용도로 사용되고 있는 곳을 찾아본다면 흥명극장은 대략 몇 가지 극장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단, 인천 출신 고령의 예술인 및 노인들을 상대로 폭넓은 조사와 인터뷰를 통한 고증이 바탕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거의 건물 자체가 옛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라지고 신축이 되었다는 분명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7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한 자리가 온전히 극장으로 사용되었다는 데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다시 서고 싶은 그때 그 무대
“내 첫 공연이니까 인천에서 공연했던 기억이 아직도 가끔 나요. 지금도 생각이 나. 오죽했으면 이번에 거 가 가지고 흥명극장이 어디냐고 물었다니까.”

이제까지 인천이 문화적으로 충분히 주목받지 못하였기에 일제시대 인천의 극장이나 공연예술계에 대한 구체적인 문헌기록도, 증언도 확보해놓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불과 수십 년 전의 풍경을 그려보는 것이 이렇게 어려워서야. 약속했던 시간만큼의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이은주 명창에게 혹시 마지막으로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를 물었다.
“흥명극장,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자들과 다시 한 번 서보고 싶다는 생각, 그것도 좋죠. 옛날 생각하고. 나는 제일 거기에 댕기면서 인천에서 그 인력거 타고 댕기면서. 그 노란 옷들을 입고 그 긴 걸 풍! 하면서, 둥둥! 이렇게 쳐가면서, 그걸 쫓아서 다니는 거야. 전부 그 동네 그 길로. 지금 같으면 창피해서 어떻게 다녀. 그땐 창피한 것도 모르고서. 그땐 그런 시대니까 그렇지만. 지금 그렇게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냔 말이야. 앞에서 음악을 쳐주고 신이 저절로 나지. 인력거를 타니까 어린 마음에 그게 좋았던 모양이야. 난 그때 생각하면 참 꿈 같아.”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이은주가 꿈에 그리던 그 극장이 눈앞에 나섰으면 싶다. 그에게도, 흥명극장을 가득 메운 채 추임새를 넣어주던 그때의 꿈 많고 열정적이던 인천의 시민들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