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보트 태권브이>(1976)가 다시 힘차게 날아올랐다. 일본 만화영화 <마징가 제트(マジンガ-Z)>(1972)의 뚜렷한 모방혐의에도 불구하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인들에게 인지도가 가장 높고, 가장 사랑받는 토종 로보트 1위에 선정되기도 한 전례에 비추어 보면 최근의 <로보트 태권 브이>의 기록적 행진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진배없다. 이 같은 대중적 인지도에 힘입어 2년간의 복원 작업 끝에 30년 만에 다시 태어난 디지털 복원판 <로보트 태권브이>(2007)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극장을 찾는 진기한 풍경을 연출하며 우리 앞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했다.

아이들보다 어른이 더 열광하는 태권 브이 신드롬에는 다른 흥행물들과 같으면서도 구별되는 몇 가지 흥미로운 특징들이 목격된다. 우선 소박한 서사에 촌스런 스펙터클로 이루어진 ‘사라져버렸던’ 과거의 애니메이션을 기적적으로 되살려낸 테크놀로지의 마술성이다. 영화가 본래 테크놀로지와 마술성의 소산이라는 사실-곧 몽타주(montage)니 미장센(Mise en scene)이니 하는 영화적 트릭들은 물론, 영화사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명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eli럖, 1861~1938)가 마술사 출신이었다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로보트 태권브이> 역시 상업화한 마술적 테크놀로지의 소산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판타지의 세계적인 유행이 잘 보여주고 있듯 합리성과 과학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것들의 귀환이 더욱 촉진되는 역설이 발생하게 된다. 기술이 마술인 현대사회에서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이다. 따라서 우리가 영화관에서 본 것은 추억의 만화영화 <로보트 태권브이>가 아니라 어쩌면 상업화한 테크놀로지의 마술과 모더니티(modernity)의 역설일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온갖 종류의 로보트들로 차고 넘쳐서 아주 심드렁해졌지만, 초창기 SF에서 로보트는 아주 충격적인 정치적 상징이었다. 로보트란 말이 ‘노동하다’란 체코어 ‘로보타(robota)’에서 나왔으며, 이것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산업노동자와 비인간적인 산업자본주의를 표현하기 위한 카렐 차펙(Karel Capek, 1890~1938)의 은유적 장치였다. 이러한 로보트를 대중화한 작가가 바로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였고, 이를 더욱 속류화한 이가 <철완 아톰(鐵腕アトム)>(1963)의 데쓰카 오사무(手塚治蟲, 1928~1989)와 <마징가 제트>의 나가이 고오(永井豪)다. 이들의 로봇만화가 유명해진 것은 두려운 서양에 대한 패전국 일본의 콤플렉스를 치유해준 영웅적 캐릭터들 때문이고, 아울러 이는 전후 일본자본주의의 산업적 자신감과 산업공학적 상상력의 표상이기도 했다. 산업화와 개발이 지상명제였던 개발독재 시대에 <로보트 태권브이>는 산업화 열망이 급조한 모방품이었다. 일본의 만화 캐릭터들에 열광하면서도 무언가 알 수 없는 결핍을 느꼈던 대중들의 욕망을 잘 포착하여 토착화하고 상업화에 성공한 에피고넨(epigonen) 캐릭터가 바로 우리의 영웅 로보트 태권브이였던 것이다.

최근의 로보트 태권브이 신드롬과 관련하여 각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도피와 퇴행의 문화사회학이다. 한국의 어린이들이<로보트 태권브이>에 열광할 즈음 일본의 청년들은 <기동전사 건담(機動戰士 ガンダム)>(1979)에 열광하고 있었다. ‘전공투(全共鬪)’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좌파의 위기가 상실에 빠진 젊은이들을 애니메이션과 게임이라는 인공의 낙원 속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그것들은 모든 악을 통쾌하게 일소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짜릿한 모험의 세계, 무엇이든 가능한 신명나는 인공의 낙원이었다. 여기에서 일본의 현실에 좌절한 젊은 좌파들은 상상적 혁명과 모험의 신세계를 개척했던 것이다. 이른바 오타쿠(お宅)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로보트 태권브이>와 <기동전사 건담>이 서로 갈라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건담 세대’가 좌절한 성인들이었던 것에 비해 한국의 변혁주체세력이자 <로보트 태권브이>의 주요 소비자였던 386세대는 아직 개발의 도상에 있는 미성년이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만 30년을 훌쩍 넘긴 지금 좌절한 한국의 386들이 태권브이를 찾아 아니, 잃어버린 유년기의 추억과 신화를 찾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인공의 낙원인 극장을 찾는다. 이 지점에서 ‘건담 세대’와 ‘태권브이 세대’가 다시 묘하게 합쳐진다.

끝으로는 태권브이의 사회심리학이다.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가능할 것 같았던 자아의 신화시대인 유년기를 거쳐 혹독한 현실계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386들, 아니 대한민국 성인들이 지금 꿀 수 있는 꿈은 무엇일까? 오늘날의 태권브이 신드롬은 각종의 영웅 신화들, 곧 <대장금>·<주몽>·<궁>·<대조영>처럼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나 있었던 천민 여성과 서자, 그리고 중국집 배달원이 어의로, 국왕으로, 태자마마로 급상승하는 황당한 성공드라마(success story drama)에 대한 열광과 맥락적 동일성이 목격된다. 아이들의 성적이 오르고, 대출받아 장만한 아파트 값이 올라가는 것, 또는 월급과 호봉이 올라가는 게 유일한 희망이고 기쁨인 386들에게 태권브이는 잃어버린 자아의 신화에 대한 보충대리물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 사회가 추구해야 할 것은 상업적 테크놀로지가 제공해준 선물에 안주하는 것보다, 이 같은 열정과 갈망을 현실변혁의 새로운 동력으로 흡수하고 바꾸어주는 일, 곧 새로운 진보의 세기를 열어가는 일일 것이다. <로보트 태권브이>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의 문화적 화두이며 한 시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