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받아들고도 나는 어쩐지 뜨악했다. 90년대 후반부터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은 평전 붐이 마냥 탐탁지만은 않아서이다.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를 시작으로,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을 거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에 이르기까지, 잊혀졌던 혹은 망각을 강요당했던 저 붉디붉은 이들의 삶이 평전으로 복원·복권된다는 것은 그만큼 한국사회가 정상화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이기는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더 이상 그들의 삶과 사상이 위협이 되지 않을 만큼 지배질서가 공고해졌다는 징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민주화 이후’로 표현되는 그 복잡하되 무감한 현실에 나른해진 사람들은, 한줌 변화의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 감동을 수집하듯 평전을 읽었다. 과연, 그 책들을 읽는다 해서 급진화되거나 혁명에 투신하는 이들은 드물었다. 서점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던 그 붉은 표지의 책들이, ‘최종적 승리’를 만끽하는 자본주의가 넓은 아량으로 베푸는 ‘20세기 유물전’의 전리품처럼 보인 것도 그래서이다.

  『김산 평전』도 그중 하나이겠거니 했다. 아니, 이건 한발 늦었지 싶었다. 21세기 하고도 7년이 흐른 지금, 중국공산당이 혁명에 고별을 선언한 지 오래고, 분단국가에서도 민족주의는 낡고 고리타분한 것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깊고 강렬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는 저 20세기 조선인 혁명가의 사진이 그저 생경할 뿐이었다. 기실 공백으로 남아 있던 김산(金山, 본명 장지락(張志樂), 1905~1938)의 삶을 온전히 복원하는 것의 참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는 것도 쉽진 않았다. 애초부터 우리에겐 변혁의 기운으로 충만하던 저 80년대에 『아리랑』을 숨죽여 읽어가며 가슴을 달구던 원체험 자체가 없었던 탓이다. 아니나다를까, 인터넷 검색창에 『김산 평전』을 입력한 후 곰비옴비 엮여 나오는 대부분의 감상문도 10년, 길게는 20여 년 전의 감흥과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내용들이다. 아뿔싸, 이 책은 21세기에 불시착한 것이 아닐까, 그런 조바심마저 일었다.

 책장을 넘기자 시대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나라를 잃고 고향을 상실한 조선인의 서글픈 유랑기가 구구절절 펼쳐진다. 대륙을 전전하면서도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새 삶을 일구어 가는 민초들의 생활력이 저릿하다. 그 희망의 터전에 푸릇한 새싹이 솟아오르니, 바로 ‘청년’들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성을 단련하고, 독립운동과 혁명에 투신하는 뭇 젊은이들의 모습은, 각성한 청년 집단이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내 또래의, 혹은 나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이 친구들이 그저 놀랍고 기특하다. 그리하여 이 책은 한 개인의 불꽃 같은 삶의 기록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아픔을 오롯이 껴안고, 이에 맞서 떨쳐 일어난 지식청년들의 탄생설화로도 읽힌다. 조국독립과 사회혁명에의 헌신은 근대의 격랑을 타고 넘어 되받아치려는 회심의 노력이었을 게다. 역류의 전위에 섰던 이들 청년은 강압적 근대의 산물임과 동시에 이를 극복하려는 주체적 근대의 담지자였다.

 세월은 흐르고 흘러 ‘죽(竹)의 장막’이 걷히고 반도의 젊은이들이 다시 대륙으로 향하고 있다. 한국 학생들의 비중은 중국 어디서나 으뜸이다. 뒤질세라 조선족 젊은이들도 이 행렬에 동참한다. 옛 만주지역을 벗어나 연안지역의 대도시로 줄줄이 몰려온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시작된 이 한인들의 집단이동이 심상치 않다. 동서 대립의 최전선에서 꽃을 피운 한국자본주의는 냉전의 해체와 함께 흔들렸다. 기어이 IMF 유탄을 맞고 고꾸라진 지 10년이 되도록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 답답한 현실이 세계를 껴안은 대륙으로의 탈주를 부채질한다. 조선족 젊은이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 ‘제2의 고향’을 등진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농촌 현실이란 참담한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생존을 위해 이동 중이다. 마치 백여 년 전의 조선인들이 그러했듯이.

 결국 우리는 한 세기를 에둘러 ‘김산의 시대’로 되돌아온 게 아닐까? 거칠었던 제국주의는 세련된 ‘세계화’로 간판을 갈았고, ‘식민’은 ‘이민’과 ‘난민’으로 분화되었으며, 구슬픈 유랑민을 대신하여 경쾌한 유목주의(nomadism)가 목하 유행 중이다. 김산의 현재적 의미도 여기에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으며, 그다지 다르지도 않다. 짧은 휴식기가 끝나고 다시금 ‘그때 그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근대의 물결은 종내 세계를 평정하였다. 그러나 물거품이 되고 만 혁명의 쓰라린 기억 탓인가, 아무도 뒤를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그 맹목의 질주 속에 ‘선진화’와 ‘대국굴기(大國堀起)’의 구호만이 허허롭게 나부낀다.

 필요한 것은 청년의 귀환이다. 『김산 평전』에는 푸르디 푸르렀던 그들의 원형이 생생히 복원되어 있다. 불시착한 것은 이 책이 아니라 아직도 오지 않고 있는 신세기의 청년들이다. 『김산 평전』은 장지락의 삶의 궤적을 충실히 복원하는 것으로 미래의 ‘김산들’을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