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학기에는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함께 읽었다. 수업의 주제는 “중국은 어떻게 큰 나라가 되었는가”였다. 이때의 큰 나라라 함은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대국(大國)’이라는 단어와 미묘한 오버랩 혹은 변주 관계를 이룬다. 곧 사전의 첫 번째 풀이, ‘큰 나라’라는 뜻 외에 중국을 가리켜 별도로 부르는 명칭인 때문이다. 이를테면 ‘사대(事大)’라 하여 ‘대국을 섬긴다’고 했을 때, 그것은 단순한 크기를 나타내는 호칭이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라는 별도의 의미가 추가되었음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사기』를 읽은 이유는 또 있다. 『사기』가 중국 고전의 한 집대성인 까닭이 하나요, 둘은 거기서 중국의 원형질, 다시 말해 담론에 이끌려 나온 중국상(그것도 십중팔구 미국발 혹은 서구발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즉(卽)한, 아니면 동아시아적 시좌에서 본 중국의 밑그림을 찾아내려 했던 것이다.

왜 대국으로서의 중국인가. 그 ‘대’가 품는 함의란 대저 어떤 것인가를 따지려면 박사논문 수십 편은 좋이 뽑힐 테지만, 내가 그야말로 ‘필이 꽂힌’ 대목은 별도로 있다. 곧 나보다 한 살 어린 중국학자 쑨거(孫歌)가 한 발언이 떠오른 까닭이다. 곧 “중국인의 대국 감각은 지리적인 실체 감각을 수반하고 있기 때문” 쑨거, 『아시아 담론과 ‘우리들’의 딜레마』, 『주변에서 본 동아시아』, 문학과 지성사, 2004 참조이라는 말을 현장에서 직접 목도 아니, 체득한 데서 연유한다.

내가 연구년으로 중국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베이징(北京)에서 상하이(上海)로 여행을 갈 때인데, 물론 밤열차를 탔다. 새벽 무렵이 되어 난징(南京) 근방에 열차가 이르자 맞은편 자리에 앉은 노인네가 짐을 주섬주섬 꾸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나눈 수인사 이후에 들은 바로는 상하이로 간다고 했건만 어인 영문인가. 난징에서 상하이까지는 400km에 육박하는 거리. 하여, 어째서 그리 짐을 꾸리는가 하고 물었더니 대답이 기괴했다. “마상콰이야오따오러(馬上快要到了).” 곧 금세 도착할 것이라는 말이다. 나는 거기서 그만 나자빠질 뻔했다. 난징에서 상하이까지 거리라면 서울에서 경주까지와 맞먹는 거리다. 그 노인네가 하얼빈(哈爾濱)에서 기차를 탔으니 상하이까지 대략 2,800km, 그렇다면 전체 거리의 7분의 6을 왔으니 다 왔다고 할 만하다. 한반도에 견주자면 서울에서 경주를 가는데 기차가 대구쯤 왔으니 행장을 꾸림직한 것이다. 이거였구나. 쑨거가 말한 “지리적인 실체 감각”이 바로 이놈이구나 하고, 나는 무릎을 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거기서 이런 감각의 원형질, 대국 감각 유전자 생성의 기원을 밝히고자 한 것이 『사기』였다. 저 감각을 해명하지 못하면 중국에 대한 ‘썰’은 모두 잡소리겠구나 싶었던 게다.

얼마전 EBS에서 방영된 중국 다큐멘터리 <대국굴기>는 ‘대국’이라는 “지리적인 실체 감각”과 오버랩되는 기획물이다. 다시 말해 21세기의 중국이 대국이 되기 위해서 중국 바깥을 벤

치마킹하여 중국 국영방송인 CCTV가 기획한 프로그램으로 보면 그리 틀리지 않다. 도합 12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다큐멘터리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미국 등 이른바 ‘잘나가는’ 혹은 ‘잘나갔던 적이 있는’ 나라들의 리스트인 셈이다. 이채를 발하는 대목은 CCTV의 사장인 자오화룽(趙化鏞)이나 프로그램의 총책임 기획자인 런쉬에안(任學安)이 밝히고 있듯이, 2003년 11월 24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이 조직한 집체학습 프로그램에서 이 다큐멘터리의 발상을 얻었다. 중국공산당과 CCTV의 호흡이 일치하는 것이야 당연한 사정이지만, 거기에 한 가지 추가하자면, 베이징대학이 앞장서서 발간한 <대국>이라는 잡지를 오버랩시키면, 거기다가 잡지의 영문 제호가  다름 아닌 <내셔널 인터레스트(National Interest)>라는 사실을 합성하면 다큐멘터리 제작을 둘러싼 기획의 감춰진 속내가 짚히기도 한다. 

<대국굴기>의 기획 취지와 의도는 기실 그리 복잡하지 않다. 중국 바깥 대국의 역사를 거울로 삼겠다는 기획인 것이다. 총 12부작 가운데 포르투갈, 스페인이 1편, 네덜란드와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일본이 각기 1편씩을 점하고 있고, 나머지 영국 2편, 미국 2편, 소련과 러시아가 각 1편, 마지막 편은 이른바 <대도행사(大道行思)>라 하여, 뜻을 풀면 ‘대국으로 나가는 길목의 사색’쯤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큐멘터리 특유의 힘을 느끼게 하는 대목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제7부 일본편의 <백년유신(百年維新)>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목에서 카메라는 도쿄(東京)역을 잡는다. “여기가 일찍이 일본의 첫 번째 기차역이다. 1872년 일본의 첫 번째 철로가 영국인에 의해 건설되어 메이지(明治) 천황이 개통식 행사에 참석했다. 7년 뒤 일본은 자신들의 설계로 철로를 건설했다. 1964년 세계에서 첫 번째 고속철도가 일본의 도쿄와 오사카(大阪)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속력은 일반 철도의 세 배였으며, 일본인들은 그 철도를 가리켜 ‘신칸센(新幹線)’이라 부른다. (…) 신칸센의 탄생 이후 4년 뒤인 1968년 일본의 국민총생산은 미화 1419억불에 이르렀으며, 이 해 일본은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계 제3의 경제대국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 해는 메이지 유신 100년째 되는 해였다.” 다큐멘터리가 역사물로 연결되면서 발하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뭐랄까 속에서 ‘이 정도라면’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과거사에 함몰되어 있다는 느낌 탓이다. 말하자면 『중서오백년비교(中西五百年比較)』외편, 中國工人出版社,1989 의 기획 수준을 못 벗어난 것 아닌가, 미래예측의 신선함과 과감함이 눈을 찔러오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결론에 해당되는 <대도행사>편에 이르면 구체적인 전략이 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노팅햄(Nottingham)대학에 재직 중인 정융니엔(鄭永年)이 진단하는 대국으로서의 중국이 갖추어야 할 요건이 그 한 예이다. 이를테면 일본의 경우, 대국이 표준적으로 갖추어야 할 하드웨어 역량은 지니고 있으나 소프트웨어 역량은 결여하고 있는데, 그 소프트웨어 역량이란 것이 바로 문화적 역량이다.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가 말하는 “문화제국으로서의 중국”, 곧 중국이라는 코끼리를 잡으려면 코를 잡아야 하는데, 그 코에 해당하는 것이 이름하여 ‘문(文)’이다. 이 대목이 바로 21세기의 중국이 새로운 대국으로 굴기하는 비결일 것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엠블렘(emblem)에서 사람의 형상을 한 글자가 바로 문, 따라서 그 엠블렘 자체가 ‘인문’(人文)을 연출해 보이는 문자놀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밑그림이 그려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쯤에서 CCTV사장인 자오화룽이 다큐멘터리 <대국굴기>와는 별도로 발간한 도합 8권의 시리즈 서문에서 흘린 발언이 이채를 발한다. “대국의 풍은 무엇인가. 노자는 말한다. ‘대국은 소국의 밑으로 들어감으로써 소국을 취한다(大國以下小國, 則取小國).’ 이 말의 의미는 대국은 오로지 소국에게 자신을 낮춤[겸하(謙下)]으로써만이 소국의 신임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발언, 곧 노자 『도덕경』 62장 겸덕장(謙德章)의 발언이야말로 종래의 대국들과는 다른 중국의 취하는 전략이 아닐까. 나아가 이 ‘겸하’라는 말이야말로 중국의 가장 오랜 전통의 덕목, 곧 공자가 “겸양이 예의 주(讓者, 禮之主)”라고 했을 때의 그 “양(讓)”과 맞물리는 언어가 아니던가. 자오화룽은 말한다, 대국은 문화라고. 이것이 어쩌면 <대국굴기>의 결론일지 모르고, 그리고 이 문이라는 것이 21세기에 가장 위력을 발휘하게 될 공룡일지도 모른다. 문화의 군대가 세계를 먹어들어갈 채비를 하면서 기지개를 켜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문자 놀이 퀴즈 하나. 베이징 대학의 로고는 당시 베이징 대학 총장이자 동향 선배인 차이위안페이(蔡元培)의 부탁으로 작가 루쉰(魯迅)이 도안한 것이다. 그림을 뜯어보면 ‘북(北)’은 두 사람이 양방향으로 마주앉은 모양새, ‘대(大)’는 사람이 자세를 낮춘 채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이다. 두 사람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과 서, 루쉰은 동방과 서방을 팔로 껴안으라는 주문을 베이징 대학 엠블렘에 새겨넣은 것이다. 이때의 팔의 길이가 바로 포용력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劉備)의 신체적 특징이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