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라가 신화시대로부터 현세에 이르는 통치 과정을 일관성있게 정리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두 시기에 걸쳐 행해졌다. 한번은 천황의 절대적 지배권이 확립된 나라(奈良)시대고, 다른 한번은 두 명의 천황이 동시에 존재하는 남북조(南北朝) 동란기였다.

나라시대의 『고사기(古事記)』712와 『일본서기(日本書紀)』720 는 일본 국토생성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천황가의 영속성을 기록한 역사서다. 『고사기』는 천황지배의 정통성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일본국내용 역사서이고, 『일본서기』는 당시 대륙(한반도와 중국)을 의식하여 편년체로 쓴 국제용 정사(正史)라 할 수 있다. 14세기에는 일본역사상 처음으로 두 천황이 각기 조정(남조와 북조)을 만들어 대립하는 남북조동란이 약 60년간 지속되는데, 이 때 남조측 정통성을 주장하는 일본사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1343가 편찬된다. 하지만 북조에 의해 남북조가 통일됨으로써 『신황정통기』는 큰 빛을 보지 못하게 된다.

이후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에도(江戶)바쿠후를 거쳐 무사정권의 교체가 이루어졌으나, 신생 바쿠후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역사서는 편찬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바쿠후의 수장인 쇼오군(將軍)이 천황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음으로써 그 정통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역사서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메이지(明治)유신으로 천황제 국민국가가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고사기』는 일본 최초의 역사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천황중심의 세계관이 일본사회를 지탱하는 근본 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사회의 정점에 천황이 존재하는 한 지속될 것이다. 한편, 『고사기』에는 전설, 가요 등 문학겳뭡嚮?관한 내용뿐만 아니라 한반도 관계 서술도 적지 않다. 고대의 기록이 부족한 상황에서 『고사기』의 한반도 관련기록은 우리의 과거를 이해하고 양국 관계를 규명하는 일종의 관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천손강림(天孫降臨) 신화, 임나(任那) 일본부의 존재, 왕인(王仁)박사 이야기가 들어있으며, 일본인의 한반도 인식을 결정지었다고 평가되는 이른바 ‘진구우(神功)황후의 신라정벌’ 기사도 실려 있다. 중요한 부분만 인용해보면, “(진구우황후가 이끈) 배를 실은 파도는 시라기노쿠니(新羅)에 덮쳐 올라, 배는 단숨에 나라의 중앙에 이르렀다. 그것을 보고 신라의 국왕은 두려워하고 황송해하며 아뢰길 ‘금후로는 천화의 명령대로 따라 말지기가 되어(…)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이에 따라 시라기노쿠니를 말지기국으로 정하고, 구다라노쿠니(百濟)는 바다 건너의 관부로 정했다. 그리고 황후는 그 지팡이를 시라기노쿠니 국왕의 문에 꽂아 세우고(…)”라고 나와 있다.

이처럼 진구우황후의 정벌로 일본의 말지기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게 된 신라 이야기는, 다시 『일본서기』에서 ‘진구우황후의 삼한정벌’로 확대기술된다. 고대 한반도에 대한 노골적인 우월감은 원겙疵좇?일본침공 이후 ‘삼한의 왕은 일본의 개다’라는 상징적 문구로 나타났고, 심지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의 조선침략을 진구우황후의 삼한정벌과 연결짓는 글도 나왔다. 즉, 진구우황후의 삼한정벌 이후 매년 조공을 바치던 조선이 일본 전국시대의 혼란을 틈타 조공을 소홀히 하자 히데요시가 그 징벌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는 치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은 히데요시를 ‘남자 진구우황후’로 각색할 정도였다. 이처럼 고대에서 근세로 계승된 진구우황후 삼한정벌설의 한국관이, 일제한반도 침략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관은 한일간 선린우호관계를 주장하는 21세기 오늘날에도 일본사회에 여전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한일관계사의 초기자료인 『고사기』가, 오랫동안 관련 논문을 발표해온 권오엽·권정 부녀 연구자에 의해 처음으로 완역되어 나왔다는 사실에 일본연구자의 한 사람으로 큰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외래어 표기와 번역문체에 문제가 없지 않지만, 해독의 관점에 따라 뜻이 달라질 수 있는 난해한 문장을 객관적 시각과 한국적 시각을 동시에 갖추어 번역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고전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현대일본소설 번역만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 이번 『고사기』 번역이 일본고전 번역에 자극이 되고, 일본의 내면을 이해하는 풍토조성에 기여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