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쿄재판’이라는 역사적 주제가 중국에서 일반민중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대체로 2005년 즈음일 것이다. 그 해, 전쟁책임과 역사서술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으로 인해 중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고 있었다. 일본정객들의 강경한 태도는 중국의 민중들을 분노케 했을 뿐 아니라 당혹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도대체 저들의 뿌리깊은 우익사상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도대체 일본인들은 침략전쟁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에게 전쟁과 전후역사를 재발견하고 재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도쿄재판은 바로 이러한 역사재발견의 조류 중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였다.

도쿄재판의 세세한 내막은 아직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재판의 결과─토오죠오 히데키(東條英機)1884~1948 등 7인의 A급전범(戰犯)들이 교수형에 처해졌다─가 지니는 강한 상징성으로 인해, 오로지 그 결과만이 사람들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범처벌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기대에 부합되어 지극히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일로 받아들여져 왔다.

점차로 더 많은 사람들이 도쿄재판의 구체적인 과정과 내막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최근에 와서다. A급전범들에게 유죄를 확정하기까지 그야말로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모든 피고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과정은 격렬한 변론으로 점철되어 있었고 중국인 법관과 검찰은 법정 안팎에서 서양동료들과 싸움을 벌어야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후의 유죄판결이 7대 6이라는 아슬아슬한 표 차이로 통과되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사실들은 일반 민중들이 지니고 있던 생각과는 엄청난 차이를 지닌다. 까오수췬(高書群) 감독이 <동경심판>1이라는 영화를 통해 핵심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 역시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었다. 이 단순한 줄거리로 이루어진 저예산영화가 제법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전문가들의 호평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법정 장면을 긴장감있게 엮어내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져다준 충격은 상당부분 역사 그 자체에서 기인한다.

물론 감독은 도쿄재판을 ‘승리’한 ‘정의의 심판’으로 채색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고, 가장 민감한 부분들을 슬쩍 감춰버렸다. 예를 들면, 재판이 연합군사령부의 의도대로 나머지 A급전범들을 무죄석방한 채 서둘러 마무리되었고, 재판의 법률적 근거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은 점이 그렇다. 인도인 판사 팔(Radhabinod Pal)은 영화 속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처럼 불교적 신념 때문에 사형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 결코 아니다. 그는 국제법적 차원에서 전체 재판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사적 형벌’의 재판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감독이 집중적으로 보여주려 했던 것은 서양인들이 주도하는 국제전범재판에서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중국인 판사와 검찰들이 어떤 논리로 투쟁하여 국가의 권익을 쟁취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투사된 의미는 따로 있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후, 중국은 중국이 평등하게 몸담고 있는 국제질서를 표상하기 위해 애써왔다. 그러나 WTO 가입 이후 또다시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질서의 압박과 제약이라는 현실에 직면했 때, 많은 중국인들은 도쿄재판에서 고군분투하던 중국인 판사와 검찰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메이루아오(梅汝?),1904~1973 도쿄재판에 중국대표판사로 참가 니쩡위(倪征펆),1906~2003 국제법학자 시앙저쥔(向哲浚)1892~1987 도쿄재판에 중국검찰관으로 참석 이 새롭게 민족영웅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혁명이나 저항의 방식이 아닌, 영미법에 대한 정확하고 전문적인 이해로 그들과 정면대결하는 방식으로 자국의 이익을 지켜냈다는 점이다. 이야말로 오늘날 중국이 절절히 외치고 있는 ‘당대 영웅’의 모범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은 서양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내부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방식으로 도쿄재판을 뛰어넘고 부정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맥락은 영화 <동경심판>에 드러나있지 않다. 실제로 <동경심판>에서 중국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고, 그래서 일본에서 고군분투하는 중국인 판사와 검찰이 국내와 어떠한 연관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지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도쿄재판이 진행되던 1946년에서 1948년 사이의 시기는 바로 중국내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도쿄법정에 서 있던 중국인이 국민당과 공산당 세력의 부침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으며, 또 중국의 앞날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이들은 모두 신중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했다. 그리고 메이루아오는 국민당정부가 제시한 사법부장 자리를 거절하고 일본에 장기체류했다. 그들이 현실 속에서 내린 이러한 선택은 사실 그들이 법정에서 보여준 그 어떠한 행동보다도 훨씬 더 강한 정치성을 띠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곰곰이 되새겨 봐야할 부분이다.

법정투쟁 장면 외에, 이 영화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핵심은 전후 일본인들의 전쟁관과 패전의식을 묘사하는 데 있다. 그 핵심적 메시지는 일본인들이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원한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어 언제든 기회만 주어진다면 다시 그런 범죄를 저지를 자들이라는 것이다. 비록 감독이 한 일본가정을 통해 일본인들간에도 전쟁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쓰긴 했지만, 영화는 분명 일본인들이 죄를 인정하지 않는 매우 위험한 존재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법정에서 궤변을 늘어놓는 전범이나 군화를 신고 있는 일본인 변호사는 물론, 외국인들을 공격하는 주정뱅이와 중국인을 적대시하는 건달패거리 등은 모두가 죄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인의 형상이다. ‘반일’이 오늘날 중국 신흥민족주의의 상징적 경향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동경심판>을 통해 그런 경향이 어떤 역사적 인식의 기초 위에서 발생했는지를 거꾸로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왜 일본을 경계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영화 <동경심판>은, 일본인들이 단 한 번도 죄를 인정한 적 없으며 언제든 군국주의로 회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나 메이루아오의 일기는 물론 다른 일본인과 미국인들의 묘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전후 일본의식이 보여주는 두드러진 특징은 패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담담하고 자연스럽게 패전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일본은 미국의 지도와 원조를 따라, ‘제국’으로부터 ‘민주체제’의 ‘우등생’으로 재빨리 변신했다. 바로 이와 같은 국가주체의 재구성 과정을 통해, 일본은 아시아 기타 국가들에 대한 우월적 지위와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주체 재구성 방식의 배후가 되는 정치적겳せ瑛?논리야말로 전후 일본의 신속한 재기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는 데 관건이 된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일본의 재기를 면전에서 바라보면서도 그것이 진짜 위협이 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혁명의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성격의 주체성을 획득했던 중국은 승리자의 눈으로 점령상태에 처한 일본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그들을 장차 해방시킬 대상으로 간주하고 침략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용의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그러나 “혁명에 작별을 고하는(告別革命)”2일련의 시간들을 보내고, 중일 양국이 동일한 정치적ㆍ경제적 질서 속에서 경쟁하기 시작하면서 양국의 갈등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오늘날 중국에 완전한 의미에서의 ‘민족주의’ 혹은 ‘민족주의자’가 존재하는지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족주의라고 부를 만한 사상적 경향이 존재하고 있은 분명하다. 그 두드러진 특징은 정치, 특히 국가와 국가 사이의 정치를 ‘정글의 법칙’이라는 원리 속에서 이해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결국 중일 사이의 모순과 충돌은 과거,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일관된 논리의 연장선상에 있다. 바로 민족국가간에 불가피하게 존재하는 이해관계의 충돌이다. 국익(國益) 위에 도의(道義)와 같은 더 높은 정치이상이 아직 존재하는가? 이런 모순 속에 과연 전화(轉化)의 계기가 내재하는가? 영화 <동경심판>은 이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도, 답을 제대로 상상하지도 못하는 듯하다. 도의는 도의 그 자체가 아닌 투쟁을 위한 도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동경심판>과 여타 도쿄재판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이 모두 메이루아오의 ‘좌석순위다툼’을 흥미진진한 클라이맥스로 그려내는 상황에서, 역사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 투쟁의 배경과 지향은 진작에 무화되었고, 도의 역시 허깨비가 되고 말았다. 오로지 드라마틱한 ‘투쟁’만이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있다.

오히려 최종 판결과 관련된 내부논쟁으로부터 이 재판의 배후에 존재하는 사상충돌을 집중적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감독은 그것을 중국인 판사가 다른 판사들을 하나하나 설득하는 일방적인 진술로 처리해 버리고 만다. 어쩌면 우리는 사형에 반대했던 판사들의 생각과 그 이론적 근거, 특히 전체 재판을 반대했던 인도인 판사 팔의 사고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진정한 논쟁만이 비로소 재판이라는 사건 자체를 초월하는 정치적 원리와 계기를 품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족주의적 역사 해석을 통해서는 역사의 배후에 존재하는 진실된 논리에 다가설 수 없다. 도쿄재판이라는 문제를 다시 거론하는 일이 오늘날 중일간의 모순을 고착화하는 계기가 될 것인가, 아니면 모순의 발전적 전화를 위한 발단이 될 것인가? 아마도 이는 모든 역사서술자들이 가장 먼저 사고해야만 하는 문제이며, 동시에 그들에게 던져진 시험이기도 하다.

각주
1. <동경심판>은 우리말로 옮기자면 ‘도쿄재판’에 해당하지만, 이미 영화가 국내에서 <동경심판>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있기 때문에 혼란을 피하기 위해 영화제목의 경우는 그대로 <동경심판>으로 번역한다. 나머지는 ‘도쿄재판’으로 번역했다.
2. ‘고별혁명’은 1980년대 중국의 대표적 사상가 리저허우(李澤厚)가 1999년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혁명에 대한 환멸과 자본주의적 발전궤도로의 노선전환이 광범위하고 대중적 설득력을 확보하던 2000년 전후의 시대사조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