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Xerxes)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테르모필레(Thermo pylae)에 도착한 것은 더위가 한창인 여름이었다. 이 시기는 아폴론을 모시는 스파르타의 카르네이아(Karneia) 축제기간이었다. 이 축제기간 동안에는 전쟁을 위한 파병이 일체 금지되어 있었다. 10년 전에도 스파르타는 이 축제 때문에 페르시아군이 그리스를 무참히 짓밟았지만 파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테네가 홀로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군을 맞아 싸워야 했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그리스 최강이라는 명성에 많은 손상을 입었고 아테네가 새로운 맹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날 것을 두려워한 스파르타는 절묘하게 타협안을 마련했다. 국가의 공식 파병이 아니라 레오니다스(Leonidas) 왕이 자신의 근위병 300명을 이끌고 개인적으로 테르모필레 방어전에 나선 것이다. 또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최강인 스파르타의 참전에 용기를 얻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페르시아의 대군과 맞설 것이라는 고도의 전략적 계산도 숨어 있었다. 그 해는 마침 범그리스적 평화축제인 올림픽이 있는 해였기에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종교축제를 이유로 참전하지 않으면 수많은 다른 그리스 도시국가들도 이를 본보기 삼아 올림픽축제를 이유로 참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았다.

레오니다스는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는 300명만을 결사대로 뽑았다. 이들이 살아 돌아올 확률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치열했고 스파르타 용사들의 전과는 눈부셨다. 그러나 돈에 눈이 어두웠던 배반자 에피알테스(Ephialtes)가 테르모필레로 통하는 산중 샛길을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르크세스에게 알려 주었을 때 스파르타 용사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되었다. 완전포위된 뒤에도 스파르타의 용사들은 적을 몇 차례나 물리치며 영웅적으로 싸웠다. 그들은 창과 칼이 부러지면 맨손과 이빨로 싸웠다. 그러나 중과부적이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전투가 생각처럼 쉽사리 끝나지 않자 페르시아군은 화살을 소낙비처럼 쏟아부었다. 이에 주력부대가 무너져 성벽을 타고 넘는 적을 물리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최후의 한 명까지 싸우다 쓰러졌다.

<300>은 바로 이 레오니다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전사들의 영웅적 싸움을 다룬 영화다. 그러나 그리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에게는 너무나 심한 왜곡과 터무니없는 설정 때문에 거의 첫 장면부터 심기가 불편해진다. 영화와 역사적 사실 사이에는 항상 어느 정도의 괴리가 있게 마련이다. 영화에는 극적인 요소와 흥행적 고려가 필요한 까닭이다. 그러나 그 정도가 왜곡이나 사기(詐欺) 수준에 이르면 곤란하다.

스파르타의 왕은 원하기만 하면 어느 나라에 대해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 스파르타 시민 어느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 이것을 어기면 부정한 자로 낙인찍혀 국외로 추방된다. 따라서 레오니다스가 국법을 어기고 군대를 끌고 갔다고 시비를 거는 설정 자체가 엉터리다. 더구나 스파르타의 행정집행직이며 최고 귀족들인 에포로이(ephoroi)임기 1년의 민선관리들을 신전사제로 비튼 것은 악의에 찬 왜곡이다. 게다가 예쁜 처녀를 탐하는 괴물로 그린 것은 너무 심했다. 왜 하필 그들은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오크족의 흉한 몰골로 표현됐을까? 또 배반자 에피알테스는 왜 <반지의 제왕>의 골룸을 빼다 박았는가? 게다가 그는 테르모필레 인근지역 주민으로서 스파르타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스파르타인들의 모습도 그리스인이라기보다는 앵글로색슨족으로 그려진다. 300명 결사대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용감한 미해병대 같다. 이 정도면 정말 해도 너무한다는 거부감을 넘어 자괴감에 빠질 지경이다.

헐리우드의 ‘역사 깔아뭉개기’는 이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영화에서 페르시아인들은 모두 흑인이다. 그리고 남아프리카 줄루족 추장 의상을 입은 거인 크세르크세스 황제에 이르면 할말을 잃는다. 최고 문명을 자랑하던 페르시아가 여지없이 아프리카 오지의 야만족으로 폄하됐다. 이란에서 이 영화가 상영금지된 것은 당연하다. 누가 우리를 흑인으로, 그리고 우리 문화와 전혀 상관없는 의상을 입은 민족으로 그린다면 우리는 그것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

할리우드가 유럽의 신화와 역사를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일이 최근 부쩍 심해졌다. <글래디에이터>에서 시작된 이 유치하고 천박한 장난은 짝퉁 트로이를 거쳐 알렉산더대왕과 아서왕 이야기로 이어지더니 급기야 <300>에까지 이르렀다. 전통과 역사가 없는 데 대한 열등의식이 빚어낸 이 억지들은 더이상 보는 것도 신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