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또 한번 제대로 버려졌고 그리하여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았다.” 단편 「가을이 오면」에서 작가 권여선은 한 인물의 사정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곧이어 말한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녀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옥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그지없이 평온하고 아름다웠다”라고. 권여선의 『분홍리본의 시절』은 이처럼 주체가 추락할 만큼 추락한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에서 작동하는 ‘최악’의 자기 테크놀로지를 기록하고 있다.

진정한 관계맺음이란 불가능하고 그런 점에서 그것은 ‘어긋남’의 동의어이며 자기는 위축되고 비틀리고 스스로 거부-부정된다.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 그 인과관계는 명확치 않지만, 과연 이 상태에서 무엇이 가능할 것인가? 타인은 불가해하며 세계는 불변이다. 그렇다면 ‘조작’이 가능한 것, 헤집어 볼 것은 ‘나’ 뿐이다. 그 조작, 헤집음의 방식은 권여선의 작품에서 주로 어떻게 제시되고 있을까? 그것은 앞서 말했듯 극단적인 자기부정의 형식, 즉 자기의 “내부를 불지옥으로 만드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기부정의 방법론적 리스트에는 자기-혐오, 관계에의 거부, 자기/타인을 향한 모욕, 단절 등등이 등록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의지, 상처를 직시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고 그리고 다시 한번 여기에는, 서로가 서로에게 지옥이라는 결코 망각되지 않을 자명한 현실이 숨어 있다.

「가을이 오면」, 「반죽의 형상」, 「문상」, 「약콩이 끓는 동안」에는 이러한 노선의 자기-혐오가 특히 치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거식증과 대식증, 비만한 몸, 알레르기로 얼룩진 얼굴, 절제 없는 감정, 일그러진 집착과 적의의 태도처럼 일련의 비형태적이거나 심하게는 형태-파괴적 물질성의 표상들은 뒤틀린 주체의 욕망과 의도를 적나라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권여선 소설의 인물들은 종종 이와 같이 ‘정상성을 벗어난’ 내면과 외모로 등장한다. 이러한 존재 상태에 대한 묘사는 그 정도가 지독할 정도로 강렬하다. 아마도 그래서 그녀의 소설은 읽어내기 힘든 때가 있는 것일 게다. 권여선이 드러내는 이 비참한 물질성의 존재 안팎은, 정교하게 가공된 미적 장치로서의 질감이 도드라지는 천운영의 경우와 달리 보다 일상적이고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그 맨 모습을 대면해야 하는 독자를 상당히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분홍리본의 시절」에는 「문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중성을 조목조목 까발림으로써 스스로를 철저하게 분해해버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차이가 있다면 「문상」의 인물이 자신의 ‘나쁜 삶’을 덮어버리고 계속 ‘나쁘게 살기’를 선택하는 것과 달리 「분홍리본의 시절」은 그것을 의식화하고 누설하는 길을 택한다. 감춰버린 음란성, 감춰버릴 폭력성. 인물들은 이것을 처리하는 자기 테크놀로지를 보여주는 셈인데, 여기에는 매끈하게 덮이는 그 어떤 것도, 매끄럽게 덮을 수 있는 그 누군가도 없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샅샅이 훑는 균열되고 분열된 시선의 움직임만이 도드라진다.        

이러한 세계-주체 감각은 오늘날 많은 작가들의 문제의식이 군집하고 있는, 세상의 불가해성, 소통불가능성, 자기부정적 자아라는 인식론적-미학적 장소와 크게 멀지 않은 곳에서 출발하고 있지만, 권여선은 이 지점들을 꽤나 독하고 집요하게 건드리고 있다. 관계와 존재의 비극이라고 할까? 하지만 비극을 응시하고 전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매우 냉정하여 우리는 그녀의 소설에서 비극적 파토스 따위는 없는, 흔들림 없이 차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비극이 파토스 없이 전달될 때 그것은 종종 ‘비참’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유사한 테마를 다루는 많은 여성 작가들이 신파조의 직설법, 여린 감상성 혹은 미학적 과장(그것은 일종의 세련된 코드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으로 흔들리고 있다면, 권여선은 오히려 ‘더 이상 참고 봐주기 힘든’ 현장을 폭로함으로써 다른 작가들과는 차별적인 ‘힘’을 획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