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Gilles Deleuze)와 가타리(Pierre-F럏ix Guattari)의 『앙띠오이디푸스』와 『천개의 고원』 같은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일종의 철학적 ‘컬트무비(cultmovie)’가 아닐까? 구석진 작은 영화관에서 상영될 것 같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품을 블록버스터 무비 판형으로 전환한다면 무엇이 될까? 네그리(Antonio Toni Negri)와 하트(Michael Hardt)의 『제국』 같은 것이지 않을까?

확실히 『제국』에는 블록버스터 무비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이 구비되어 있다. 『제국』은 스피노자와 마키아벨리, 칼 슈미트(Carl Schmitt)와 그람시(Antonio Gramsci)처럼 함께 불려나오는 일이 드문 이론가들을 모아들인다. 그리고 이들을 레고블록(lego block)처럼 다채롭게 조립해나간다. 또한 『제국』은 대담하고 강렬하다. 사실의 긴 나열이나 너절한 표 뒤에 숨어 겨우 주장 몇 마디를 주어삼키는 사회과학 서적이나 논문의 답답함 같은 것이 전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케일이 크다. 『제국』은 지구적 분석을 전개하는데, 이 점에서 시대의 요구에 가장 선명하게 부응한다. 왜냐하면 이 시대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지적 조망불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를 포함하여 거대담론이란 거대담론은 모두 미심쩍은 역사철학의 잔재로 취급받으며 탈현대주의의 망치 아래 무너졌다. 하지만 그 잔해 위에서 우리는 더더욱 거시적 조망이 아니면 이해하기 어려운 지구화된 현실에 직면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제국』은 역사철학의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만한 지적 이력을 가진 이론가들에 의해서 저술된 충분히 거시적인 저작이었다.

하지만 『제국이라는 유령Debating Empire』에 모여든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제국』은 논쟁을 자극하긴 하지만 그 한계 또한 뚜렷한 책이다. 지구화 앞에서 우리가 타개해야 할 지적 조망불가능성과 관련하여 『제국』은 지구적 분석이 지향해야 할 논점과 토픽들을 포착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 토픽들을 다루는 방식은 수용하기 어렵다. 예컨대 『제국』의 첫 장에서는 제국적 세계질서의 사법적 구성이 논의된다. 그런데 이 논의는 『제국』이 9.11 이전에 쓰인 저작임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국의 중심 권력을 가진 냉전 이후의 미국은 세계를 인권과 정의 개념에 근거해 관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코소보 사태와 걸프전에서 엿보이듯 인권과 정의에 근거한 사법적 질서를 형성하려 한 시기는 하도 짧아서 차라리 에피소드라고 해야 할 지경이다. 니체는 어디선가 자신이 뱀인지 알기 위해서는 남의 뒤꿈치에 밟혀 보면 안다고 했는데, 9.11 이후 미국은 자신이 뱀임을 입증했으며, 따라서 네그리와 하트가 이야기하는 식의 사법적 구성은 금세 형해화되었다.

물론 『제국』 같은 거시적 분석을 전개하려는 저자들의 근시안적 분석을 관대하게 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분석 범주들의 지위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평가는 당혹스럽거니와 특히 지구화와 국민국가 간의 관계에 대한 『제국』의 입장이 그렇다. 『제국』은 제국의 매끄러운 공간 속에서 국민국가가 쇠퇴하고 있으며 국민국가에 근거한 저항 또한 반동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제7장에서 엘린 우드(Ellen Meiksins Wood)가 지적하듯이, 오늘날의 세계는 전보다 더 국민국가들의 체계이며 이들에 의해 지구적 자본에 필요한 기능이 수행되고 있다. 지구화는 국민국가를 쇠퇴시킨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에 대한 시민들의 민주적 통제를 약화한 것이다.

분석 범주에 대한 이런 잘못된 평가는 실천적 오류를 불러들인다. 『제국』은 매우 추상적인 책인데, 이 추상성이 구체화될 가망이 거의 없을 만큼 심한 것이 다중(multitude)의 존재 양상이다. 『제국』은 국민국가 단위의 저항과 저항의 조직들을 이론적으로 무력화하지만 새로운 저항의 단위와 조직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 『제국이라는 유령』의 여러 논문들이 두루 지적하듯, 다중은 도처에 존재하며 제국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서술되지만 도리어 아무 데도 없는 존재라는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제국』이 재미없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종종 영화를 보고 영화비평을 읽기도 하는 것처럼 『제국』을 비평하는 『제국이라는 유령』을 읽을 필요가 있다. 이 책을 읽어본다면 『제국』이 블록버스터 무비라는 것은 단지 비유가 아니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제국이라는 유령』이 이론서가 아니라 영화비평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영화가 시시할 때 오히려 비평이 더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