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계 미국인 요코 카와시마 왓킨스(Yoko Kawashima Watkins)의 자전소설 『요코 이야기Far from the Bamboo Grove』가 우리나라와 재외교포 사회에서 ‘민족적’ 화젯거리다. 1986년 출판된 이래 미국의 많은 중등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되어온 이 책은, 한 교포 여학생의 문제제기와 등교거부를 계기로 오늘에 와서야 새삼스레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 던져졌다. 국내 번역본 출판사는 폭발적인 비난 여론에 떠밀려 해당 책의 판매를 중지했고, 각종 신문과 방송도 경쟁적으로 관련기사와 인터뷰를 마련했다. 대다수 ‘한민족’ 독자들은, 세계대전 패전국 소녀의 고통만을 되살림으로써 영어권 청소년들에게 아시아에서의 역사적 가해자 vs 피해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유 있는’ 분노를 표출했다.

또한 독자들은 작가 스스로 몇 가지 디테일을 제외하면 모두 ‘실화’라고 주장한 이 작품의 실화성에 대해서도 집요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를테면 소설에 적시된 주요 화소인 대나무 숲, 미군공습, 공산군에 대하여 함경도 땅에 아열대 식물인 대나무숲이 있을 리 없고, 해방 전 나남(羅南)지역에 미군 폭격은 없었으며, 1948년 이전에는 공산군이 활동하지 않았다는 반론을 펼치는 것이다. 덧붙여 요코의 아버지가 단순히 만주 주재공무원이 아니라 악명 높은 731부대 소속 최고위급 장교라는 주장도 나왔는데, 이는 국내 번역본 출판사가 책 발매를 중지하는 직접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향수병에 걸린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가 고향 아오모리(靑森)의 노란 대나무를 구해다 심었는데 그것이 십 년여 자리를 잡아 조그마한 숲을 이루었다,1 미군 비행기의 폭격은 없었으나 정찰행위는 분명히 있었고 자기는 학교운동장에서의 공습 대비훈련 도중 미군 비행기를 목격했다고 썼을 뿐이다,

피난길에 부닥뜨린 군인들이 정식 공산군이 아니었다면 혹시 북한 민병대였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다만 열한 살(한국어 번역본에서는 열두 살)의 요코가 제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기록했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그리고 부친에 대해서는 호적부까지 떼어 보이며 예의 731부대 장교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항변했다. <중앙일보>(2007년 2월 3일)에 실린 요코 카와시마 왓킨스 인터뷰 참조

독자들이 객관적․역사적 진실을 추궁하는 데 비해 저자는 서사적․감정적 진실로 응답하는 형국이다. 어느 쪽이 진실 그 자체에 근접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되, 자전소설의 세부가 사실인가 거짓인가에 골몰하는 논쟁은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감이 있다. 로이 패스컬(Roy Pascal)의 말마따나 자서전이란 저자의 ‘삶의 환상’이자 그 환상의 기록일 따름이다. 즉, 자서전 작가는 원래부터 있던 삶의 진실과 자기정체성을 텍스트에 구현하는 사람이 아니고, 무질서한 집합체로서의 삶을 유의미한 사건들로 재배열하고 통합된 자아를 성취하기 위해 텍스트라는 ‘회전문’2 을 통과함으로써 다시 태어나려는 사람이다. 애초에 존재론적 재생의 욕망을 가진 작가가 ‘제작’한 ‘서사적 진실’을 가지고 그 세부가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지나치게 따지고 드는 태도가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오지 못하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게다가 이런 태도의 이면에는, 이런저런 디테일이 거짓말이니까 조선 남자들의 일본 여자 성폭행 이야기도 다 거짓말이라는, 민족주의의 부정적 편린이 언뜻언뜻 보인다. 패망 후 귀국길에서 일본인 여성들이 헤아릴 수 없는 성폭행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그 시대를 다룬 한국문학 작품에도 종종 등장하는 삽화이다. 멀쩡한 내 나라에 사는 오늘날의 여성들도 매일 밤낮으로 느끼는 위협을 그 시절의 피난길 일본인 여성이 절절이 체감하지 않았을 리 없는 것이다. 더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가부장?민족의 영토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전유되어왔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시절의 강간은 인간성에 대한 범죄로 인지되기는커녕 식민지 피해국이 가해국에 가하는 정당한 보복행위로까지 승격되었을 법하다. 기실 이런 사정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아서, 1965년에 출판된 남정현(南廷賢)의 소설 「분지(糞地)」는, 어머니가 미군에게 강간당하고 여동생이 미군과 동거하는 현실에 분노하여 미군병사의 부인을 강간하는 주인공을 홍길동(洪吉童)의 10대 후손으로서 민족적 자존심을 지키고 정의를 구현하는 인물인 것처럼 그리고 있다.

2002년에는 두 여중생이 미군 트럭에 치여 숨진 사건에 민족적 울분을 느낀 ‘애국청년’이 미국 대통령 영부인과 군 사령관 부인을 성노예로 만듦으로써 복수한다는 내용의, 이른바 반미(反美) 에로비디오가 등장하기도 했다. 가부장제사회의 의미망 속에서 여성·영토는 이렇듯 제 의지와 무관하게 남성·민족의 전쟁터가 되어 끊임없이 점령당하고 보복당하고 착취당한다. 청년으로 자라기 전의 어린이는 전쟁 책임과 무관하면서도 그 피해는 가장 크게 입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인 바, 『요코 이야기』의 보편적 감동은 이 작품이 일관되게 견지한 여성·어린이의 시점과 화법에 기인한 것이다.

우리가 『요코 이야기』를 읽고 얻을 수 있는 소득이라면, ‘우리 민족이 영원하고 절대적인 피해자는 아니다’라는 당연하면서도 뜻밖에 낯선 성찰의 순간이 아닐까. 또한 우리가 『요코 이야기』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제기해야 하는 문제는, 이 특유한 ‘서사적 진실’의 진정성과 아울러 이 작품을 교재로 채택함으로써 ‘서사적 진실’을 일종의 ‘사실’로 어린 독자에게 확신시키는 모종의 ‘권력’이 아닐까.

기억의 흔적을 톺아 새로운 기억을 구성하고자 하는 욕망은 대개 어떤 ‘사후적 사건’에 의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요코 이야기』에서 그 사후적 사건은, 작가 서문을 통해, 작가가 잘 아는 응석받이 미국 소녀가 음식과 옷이 넘쳐나는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도 투정을 부리는 상황으로 드러나 있다. 요코 카와시마 왓킨스는 소녀에게 소녀가 가진 것들과 인생에 감사하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비참한 전쟁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지고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작가 자신의 생존기를 들려주고 싶어한다. 당연히도 작가는 전쟁이 여성겲低걋結“?부과한 성별화된(gendered) 참상을 열거하고 그 참상들 하나하나에 맞서 쟁취한 영웅적 승리에 초점을 맞춘다. 이렇게 보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제의 착취와 억압, 전쟁책임 같은 역사적 맥락은 뒷전일 수밖에 없는 플롯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요코 이야기』의 화자가 열두 살 소녀라고 하더라도 그 열두 살 소녀는 『요코 이야기』라는 텍스트를 쓰고 있는 일본계 미국인 요코 카와시마 왓킨스가 기억의 ‘회전문’을 통해 창조한 소녀이지 40년 전의 그 소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기억하는 행위가 시공간의 현재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처럼 기억되는 과거는 기억하는 주체가 현재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기억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요코 이야기』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은 요코 모친의 입을 빌어 일본의 ‘진주만 침공’에 대해서만 적극적으로 언급된다. 조선과 만주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착취에 대한 책임의식은 찾아볼 수 없다. 힘센 미국 형님의 그늘 아래서 부지런히 양손 비비고 있는 일본 아우의 그림이 떠오르면서 이 작가야말로 그 굳건하다는 미겴?동맹의 근본정신을 체현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뚱맞은 연상이 아니리라.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보편적인 휴머니즘을 담고 있는 데다 감히 미국에 대고 전쟁하자고 덤벼든 책임을 스스로 사죄하는 이 책이 아시아에 관한 문학교재로 적합하지 않을 까닭이 없을 터.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 1939)는 기억과 망각 모두 쾌·불쾌의 동기에 지배되는 정신현상이라 했다. 개인적 망각은 전염될 경우 집단 심리학의 한 현상인 ‘집단망각’으로 이어질 수 있거니와 전후 일본사회가 전전(戰前), 그리고 전쟁 중에 저지른 온갖 제국주의 만행에 대하여 보이는 집단망각은 그 뚜렷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일본사회의 집단망각에 대항하여 한국인들은 ‘집단기억’ 내지 민족기억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재구성하여 상속해 왔다. 우리의 집단기억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악순환을 넘어서는 성찰적 기억으로, 더불어 집단망각까지도 돌아볼 수 있는 성숙한 기억으로 진화했으면 좋겠다. 설사 좀 불쾌해지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