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한 연수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영국을 다녀왔다. Freshwinds, Camphill, 영국다운증후군협회, S.F.S.A 등 사회복지 및 문화예술과 관련된 비영리 기관이 방문 대상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 Acorns(이하 에이콘)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 기관들이 사회복지에 대한 100%의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복지 영역에서의 수요와 공급이 확대되고 있는 한국의 현재 방향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에이콘은 ‘Care for the child, Support for the family’를 기치로 내걸고 버밍험을 비롯한 영국 중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대표적인 어린이 전문 호스피스 기관이다. 한국에는 생소한 어린이 호스피스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도 모자라, 18세 이상으로 성장한 아이들을 위해 ‘young adult’ 호스피스1) 서비스를 연결해주고 하나라도 더 필요한 서비스가 없는지 통합 패키지로 서비스를 찾아주는 세심한 배려가 인상적이었다. 발달장애를 비롯해 장애인 아이가 있는 가정의 경우 결국 가족이 행복해야만 아이도 행복한 삶을 즐길 수 있으며, 한 쪽이라도 힘들고 지치면 결국 모두가 힘들어지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에이콘은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중증 장애를 갖고 있는 아이들이 좀 더 안정적인 환경에서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생을 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처음 인상적인 부분은 무리하게 시설을 늘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용자들이 자신의 집처럼 편안하게 느낄 수 있는 상태에서 케어한다는 원칙을 지키고, 양을 늘렸다가 질이 하락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많으면 좋겠지만, 그만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과 인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는데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충분히 소통하고, 필요한 서비스를 여유롭게 제공할 수 있는 환경이 가장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에이콘에서 하루 한 명의 아이를 돌보는 데 소요되는 예산은 대략 140만 원 정도이며, 하루 이용자 역시 10명을 넘지 않는다고 하니, 예산 대비 실적부터 따지고 드는 한국에서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용 실적과 1인당 예산이 아닌가?

에이콘의 예산은 영국의 국가의료시스템(NHS)의 보조금이 20%, 중앙정부 보조금이 10%, 나머지 70%는 자체적으로 모금한 금액으로 구성된다. 공공 지원의 비율이 30% 이하라서 압박이 덜한 것도 있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철학’과 ‘사회적 합의’에 있었다. 예산을 지원 받을 때‘아동 호스피스에 있어서만큼은 정치인들보다 자신들이 전문가’라는 마인드로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해결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기부와 후원에서도 이와 유사한 측면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례로 에이콘은 영국 프리미엄리그의 아스톤 빌라 구단으로부터 08/09시즌 유니폼에 에이콘의 로고를 부착하는 유니폼 지원을 받은 바 있다. 이 지원에 대해 묻자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구단주가 개인적으로 기부한 적은 있지만 구단 차원에서 현금 지원을 하진 않았다”는 것. 물론 유니폼 스폰서가 되면서 에이콘을 비롯한 아동 호스피스 전반에 대한 관심과 인지도가 상승한 것은 분명하기에 그 부분만큼은 높이 평가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이라면 유니폼 스폰서를 해준 것만으로도 상당히 고마워하고, 비영리기관에 유니폼 스폰서를 내줌으로써 상업적인 스폰서를 받지 못해 생기는 손실에 대해 미안해할 텐데(기업 입장을 배려하고 생각해서), 전혀 다른 접근이었다.

사회복지사와 비슷한 ‘Community Team Worker’라는 역할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이들은 개별 가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바탕으로 무엇이 필요하고, 이 가정에 어떤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 판단한다. 이후에 각종 서비스 연계를 지원하는 것까지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이들의 역할이다. 이처럼 현장 종사자의 판단이 중요하게 작용하고, 현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비스를 제공할 범위 등을 결정할 수 있는 유연한 조직 운영이야말로 한국에 필요한 것이라고 보인다. 또한 에이콘에서는 아이와의 사별을 경험한 부모와 가족에게 장례식 절차를 돕는 것은 물론 사망 신고를 하는 세세한 부분까지 지원하고 있었다. 이미 관혼상제 영역의 서비스를 상조회사 등 민간에 외주화하고 있는 한국과대조적이었다. 아이를 떠나보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슬플 가족들을 위해 가능한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것, 그래서 가족들이 충분하게 슬픔에 젖고 아이를 잘 떠나보낼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역이라는 설명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에이콘은 주택가 한가운데에 ‘시설’이 아닌 것처럼 평범한 외관으로 자리하고 있다. 아기자기하지만 꽤 잘 꾸며 놓은 공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 공원의 핵심은 바로 추모 공간이다. 일상의 공간처럼 보이지만 곳곳에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이름을 새긴 돌이 놓여있고, 아이의 사진과 그 아이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편지와 꽃다발이 놓여있다. 에이콘을 이용했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장애를 갖고 있다가 떠난 아이라면 누구나 이런 추모의 공간을 작게나마 마련할 수 있고, 언제든 방문할 수 있도록 해놓은 세심한 배려에 공원을 거닐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에이콘을 비롯한 영국의 모든 기관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일명 ‘NO WRONG DOOR POLICY’였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자격요건을 따지는 대신 우선순위가 있을 뿐이며, 이 우선순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약자인가’라는 원칙이다. 개별 기관에서 제공하지 않는 서비스라면, 다른 기관에 연락하고 서비스를 연계하는 것은 물론이다. 버밍험은 인도계나 파키스탄계가 많이 사는 도시이고, 그렇다 보니 에이콘 이용자의 50%는 파키스탄계의 무슬림이며 10%는 아시안을 비롯한 다양한 인종, 40%는 일명 ‘White British’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영국 영주권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포함된다. 모든 아이들에게 똑같은 권리가 있다고 믿으며, 도움이 필요한 모든 아이들이 도움을 받는 것이 비전이며, 공급자(다른 측면에서는 경쟁자)가 더 많아지는 것을 미션으로 삼고 있는 기관이니 당연해 보이기도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영국은 삶의 질을 중시하고, 아픈 사람의 의사를 존중해 고통 없이 죽을 권리에 대한 의식이 높은 편이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행복하고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모두가 도와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에이콘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지원을 제공하는 기관 위주로 설계되는 것이 아니라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접근하는 기관, 그리고 그 기관이 그렇게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정부, 정부의 예산이 그렇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시민의식, 기부가 당연한 사회적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합의…. 이 모든 것이 어우러질 때 한국에서도 ‘실적’, ‘예산 소진’, ‘자격 요건’ 등을 거론하지 않게 될 것이고, ‘복지 사각지대’도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