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위기가 전면화되고 있다. 위기의 징후에 대한 사회학자들의 진단은 다양하다. 난무하는 은폐가 주목되는가 하면, 증폭되는 분노에 혐의가 주어지기도 한다. 넘쳐나는 잉여가 거론되는가 하면, 일상화된 신뢰불가능성이 예의 주시되기도 한다. 경쟁의 내면화가 의심되는가 하면, 가십거리로 전락한 메시지가 지적되기도 한다. 투명 사회, 분노 사회, 잉여 사회, 불신 사회, 팔꿈치 사회, 루머 사회 등. 동시대 결핍의 수사는 날로 풍요로워지고 있다.

현대 사회의 위기는 이처럼 복잡다단한 지평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사회나 동시대인들은 당대 사회의 위태로움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살펴 왔다.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린 시조에서 조선 중기 문신 김유는 당대의 위태로움을 ‘하수상한 시절’이라 노래했고, 독일의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이미 16세기에서 17세기 독일을 ‘황폐한 정신의 사회’로 표현했다.

승리와 영광의 기록들로 줄 세워진 역사는 세계를 조화로운 총체성의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역사에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만든 인물과 사건들은 도시의 중앙 광장, 높은 받침대 위로 올라간다. 대신 몰락과 비탄의 역사, 갈등과 균열의 사건들은 현기증 나는 높이의 받침대가 드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승자와 살아남은 자의 목소리로 전해지는 역사에서 패자와 죽은 자의 얼굴은 확인이 어렵다. 그렇다고 절멸과 비참의 사건들을 기록할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몇몇 미술은 특정 집단의 굴욕의 순간과 집단 구성원들의 명분 없는 대규모 희생과 같은 집단의 기억을 공공장소에 예술로 기록하고 있다.

1884년 로댕은 치욕의 순간 ‘평범한 인간’을 조각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건립위원회가 조각에 담고자 했던 것은 치욕의 순간 ‘비범한 영웅’이었다. 작가와 건립위원회가 합의하고 있는 치욕의 순간은 칼레가 영국군에 함락 당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프랑스 북부 항구 도시 칼레는 14세기 백년 전쟁 당시 격렬한 항전 끝에 영국군에 항복했다. 도시의 굴욕이었다. 함락 후 칼레의 사절단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를 찾아가 자비를 청하였다. 이에 영국 왕은 조건부로 사절단의 요청을 수락하였다. 1년간 영국군에 항전한 죗값을 치룰 칼레 시민 6명의 목숨을 요구한 것이었다.

도시의 안위의 문제가 영국 왕에서 칼레 시민에게 이양되는 순간이었다. 불안이 점령한 광장에서 곧 시민 대표가 구성되었다. 도시의 시장, 상인, 법률가 등 사회 지도층으로 구성된 시민 대표는 교수형에 처해지기 직전, 임신 중인 영국 왕비의 간청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인 장 프루아사르는 『연대기』를 통해 칼레의 여섯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건립위원회는 칼레를 사랑하는 시민 대표의 사명감, 높은 도덕성, 시민에 대한 값진 책임감, 어렵게 내린 결정에 대한 의연함. 고귀한 희생과 같은 부분들을 조각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다. 하지만 로댕은 500년 전의 기록이 전하는 시민 대표들을 기존의 애국적 서사가 주인공을 다루는 방식으로 복원해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호언장담했던 ‘진정 독보적 기념물‘은 칼레의 시민 대표들의 남루함과 비참함을 부각시켰다. 그는 여섯 명의 시민들이 속옷 차림으로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서 있는 모습으로 조각을 완성했다.

또한 〈칼레의 시민들〉은 예견된 죽음 앞에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로댕은 희생을 약속했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하는 순간의 심적 동요를 통해 평범한 시민 대표들의 비범한 선택에 보다 집중하게 했다. 훗날 그의 조각은 같은 제목으로 1914년에 발표된 후 191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초연된 카이저의 3막 희곡에까지 영감을 주기도 했다. 희곡의 곳곳에는 삶에 대한 미련을 최후의 순간까지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는 시민 대표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사건으로 전개되었다.

“이것은 영웅이 아니다,” “죄수인가? 영웅인가?” 영웅적인 시민들의 모습을 기대했던 건립위원회가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로댕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영웅적 서사뿐 아니라 높이도 제거하였다.〈칼레의 시민들〉이 받침대 위의 아름다운 위엄, 추상적 개념, 과거의 사건으로 ‘지금, 여기’와 격리되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모습의 시민 대표들은 그의 바람대로 관객들과 같은 높이에서 보편적이고 평범한 인간 누구나 또 다른〈칼레의 시민들〉이 될 수 있음을 전한다. 그에게 예술적 복원은 기록된 기억이 유폐된 가상의 아름다움으로 재구성되는 것을 넘어 현실과 조응하며 살아있는 진실로 만드는 도전적 영역이었다.

맨 땅 위에 서서 현재와 소통하기를 원했던 로댕의〈칼레의 시민〉은 칼레 치욕의 역사이다. 그럼에도 여섯 영웅들의 등장으로 역사에 대한 조화로운 총체성의 관점에서 기억할 만한 기록의 순간으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하지만 기념할 만한 기록으로 집단이 채택하기 어려운 기억도 있게 마련이다. 미국인들에게 베트남 전쟁이 그랬다.

베트남 전쟁은 막대한 비용과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첫 패전이었다. 전쟁은 ‘전쟁광’이라는 오명을 미국에 남긴 채 막을 내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사회적 혼란은 지속되었다. 미국의 국제적 위상은 실추되었고, 국민들의 사기도 위축되었다. 기억으로 수용되지 못한 채 망각의 영역으로 내몰린 기억이 점령군처럼 삶을 지배하고, 유령처럼 일상을 배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전쟁에 대한 이렇다 할 평가가 정리되지 않은 시기에 미국은 베트남전쟁기념재단 건립을 서둘러 추진하였다. 이 과정을 주도한 핵심 인물은 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두 명의 심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전쟁의 기억을 기록하면서 사회 분열과 집단 우울증의 치유를 시도했다.

참전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을 제작도 패전의 기억과 기록 작업의 일환이었다. 조형물 공모에는 모두 1,421명이 응모했고, 최종 당선자는 마야 린이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베트남 전쟁이 추모조형은 적어도 승리의 기념비 형식을 취할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8명의 심사의원이 최종 선발한 공모 계획 어디에도 펄럭이는 성조기, 영웅적 군인들, 승전의 순간과 같은 전쟁으로 훼손된 미국의 자존감을 충전시킬 장면은 찾아 볼 수 없어 비난이 일었다. 게다가 당선된 응모작 당시 스무 살의 대학교 3학년 중국계 미국인 여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여기저기서 날선 목소리들이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조형물〉의 의미를 묻기 시작했다. 우뚝 솟아 멀리서도 쉽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반적인 기념물과 달리 그의 추모조형물은 받침대가 없을 뿐 아니라 지면에서 점점 낮아졌다 다시 지면으로 올라오는 형식이었다. 또한 별다른 장식도 없이 추모조형물은 70미터에 달하는 크기의 반짝이는 검정 화강암 벽면 두 개를 이어 125도 각도의 V자로 간결한 형태였다. 높게 쌓아 올리는 대신 깊게 파고 들어간 추모조형물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를 자인하는 의미인지 묻기도 했다. 부메랑 모양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상징하는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슬픔과 수치를 상징하는 검은 색을 사용한 의도가 주목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베트남 전쟁을 꾸밈없는 서사로 구현해내기 위한 그의 의도였다. 그는 미화나 찬양이 아닌 정직함과 차분함으로 다가갈 때 전쟁으로 인한 개인과 집단의 상실은 회복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묵상적일 것, 주변 조경과 조화를 이룰 것, 죽은 병사들의 이름이 어딘가 들어갈 것, 분열된 국론을 감안하여 비정치적일 것.’ 그의 생각은 그는 추모조형물 공모 주최 측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면서도 추모조형물에 담고자 하였다. 그는 검정 화강암 벽면에 희생자들의 이름을 써넣는 방식으로 베트남 전쟁을 기록하고자 하였다. 이런 접근을 통해 그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전쟁에서 명확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것은 승패와 같은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전쟁 중에 희생된 소중한 생명들이었다. 계급의 위계가 아닌 사망 일자의 순서대로 희생자들의 이름을 추모조형물에 써넣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었다.

‘참전용사를 모독했다.’ 재향군인회는 군대의 계급과 서열을 무력화한 이런 배열과 배치에 반발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소란스러움의 와중에 그의 추모조형물은 전쟁 희생자들의 죽음은 동등하게 기억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공모의 취지에 뜻을 더했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두 명의 대통령 워싱턴과 링컨의 기념탑과 기념물의 중간에 설치된 마야 린의〈베트남 참전 용사를 위한 추모조형물〉은 단순히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역사의 기록물이 아니다. 표면 광택을 낸 화강암 벽면 위에서 죽은 자 이름 위로 비친 산 자의 손이 망자의 희생을 어루만지고, 꽃을 선물하는 교감의 장에서 다독여지는 것은 상실로 상심했던 산 자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정치인들은 과거 관행을 답습할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아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분노와 깨달음이 반복돼야 ‘해방적 파국’이라는 탈바꿈이 일어난다.”

서구를 중심으로 반성과 성찰 없이 속도를 낸 산업화로와 근대화로 위기에 봉착한 현 사회를 ‘위험 사회’로 진단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 지난 7월 한국 강연 도중 세월호 사건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그가 우리 사회에 잊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로댕이 〈칼레의 시민〉을 통해 예술로 복원해낸 기록으로 전해지는 기억이기도 하고, 린이 〈베트남 참전 용사 추모조형물〉로 의미 있게 마주하게 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기도 하다. 태지호는 『기억 역사 문화』에서 기억이 다루는 과거는 역사와 달리 모든 개인이나 집단의 경험이라 할 수 있고, 이런 관점에서 기억을 ‘과거와 현재의 존재 조건’으로 설명한다. 따라서 그는 기억의 의미를 과거 경험의 단순한 저장이나 재생 그 이상으로 간주한다. 기억이 그의 설명처럼 과거의 경험을 현재에 되살리는 행위라면 굴욕을 기억하고, 희생을 기억하는 일이야 말로 현재를 온전히 망각하지 않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기억을 매개로 분노하고, 기억을 통해 깨닫지 못한다면, 기록으로 전해지는 기억을 기념관에 격리시키고,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무책임하게 방기한다면 위험 사회 안에 갇힌 우리는 해방적 파국의 출구를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조화로운 총체성의 역사가 파편화 된 세계에서, 집단의 미래는 집단의 기억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