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이제 고상한 취미생활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은 것도 아니다. 지금은 그야말로 문학 자체의 존립이 의심스러운 시대이다. 이런 시대의 일본소설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를 독서문화의 진화로 보는 것은 섣부르다. 문학 자체로부터 빚어진 현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띄게 늘어난 일본소설 판매량은 대중들의 소비욕이 이제 문학의 영역까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문학은 이제 일종의 기호품, 그것도 아주 세련된 기호품처럼 대중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냉정과 열정 사이』를 시작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웨하스 의자』, 『울 준비는 되어 있다』와 최근 『도쿄 타워』에 이르기까지, 써내는 작품마다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에쿠니 카오리(江國香織)는 2000년대 일본소설 열풍의 대표 브랜드다. 그녀의 소설들은 대개 젊은 대중독자들을 겨냥한 감성적 문체의 연애물이다. 나에게도 『냉정과 열정사이』는 상당히 신선했다.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도 선뜻 찾아가 보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뒤 정신없이 쏟아져 나온 수많은 일본소설들을 접하고 보니, 그 ‘신선한 느낌’이란 단지 처음이었기 때문에 생긴 가벼운 충격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젊은이들의 세련된 연애란 소재가 동어반복으로 보였던 탓일까, 나는 이내 지루해지고 말았다.

다른 독자들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책들이 계속해서 소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략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이 열풍을 이어가려는 출판사들의 공격적 마케팅과 수요창출을 위한 무차별적 공급 방식이다. 얼마 전부터 서점가의 문학섹션은 일본소설, 구체적으로는 일본 대중소설의 독무대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자들은 스스로 문학적 선택을 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그 선택이란 실상 시장이 제시하는 한도 내에서의 선택일 뿐이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어쨌든 이렇게 흘러가는 시장 상황에 따라 독자들의 취향이 재구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에쿠니 카오리의 소설들이 남녀문제를 일정한 패턴 속에서 ‘나긋나긋’ 속삭이고 있다면, 『공주님』이나 『방과 후의 음표』를 쓴 야마다 에이미(山田詠美)의 경우는 자유분방한 여성 자아의 연애관을 거침없는 어조로 폭로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러한 소설들은 모두 지나친(?) 진지함을 피하면서 쇄말한 흥미만을 독자들에게 선사하고 있는데, 칼에 베인 듯 진한 여운을 부담스러워 하는 요즘 독자들은 이렇게 작은 재미와 슬픔에 중독되어가는 듯하다. 고통스런 책읽기보다는 화장을 하거나 액세서리를 착용하듯 매력적인 문학작품을 소지하고 그것을 소비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끼는 독자들의 문화적 취향이, 엇비슷한 틀거리를 반복적으로 생산하는 에쿠니 카오리 들을 하나의 트렌드로 만든 셈이다.

에쿠니 카오리의 『반짝반짝 빛나는』에 등장하는 호모 남편과 알콜중독 아내, 이들은 아무 것도 서로에게 해줄 수 없는 관계다. 남편에게는 남자 애인이 있고, 아내는 매일 밤 술을 마신다. 이 어긋난 관계와 비일상적 사랑을 작가는 ‘반짝반짝 빛나는’ 무엇으로 만든다. 독자들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이도록 바꾸어놓는 이 요술쟁이 작가에 의해 환상을 경험하지만, 책 읽기가 끝난 뒤 손에 남는 건 결국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식의 체험이 어쩌면 야마다 에이미가 말하는 “젊은 시절의 낭비의 추억”으로 될지는 모르겠다. 이제 막 문학을 ‘소비’한 야릇한 흥분에 감싸인 우리에게 오늘날의 책읽기가 오랜 뒤에도 빛나는 ‘추억’으로 남기 위해서는, 좀더 풍부한 선택의 장이 열려야 할 것 같다. 이는 한국소설의 분투만을 주문하자는 것이 아니라 소비문화의 전반적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는 문화적 분위기 조성과 연관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