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베트남전쟁이 종결된 이후 한국은 1983년부터 제3국을 통해 베트남과 간접교역을 시작했다. 1988년경부터 직교역을 시작하여 1992년 4월에는 베트남과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였고, 1992년 12월 22일 정식 수교를 맺었다. 적으로 마주서서 8년이 넘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두 국가가 전쟁이 종식된 지 17년 만에 국제적인 동반자로 새로운 관계를 연 것이다. 그리고 또 다시 15년이 흐르고 있다. 그간 두 나라의 관계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아시아 지역에서 두 나라의 교류는 매우 빠른 상승세를 보여주었다. 가장 괄목할 만한 변화는 경제교역의 폭발적인 증가이며, 그 배경에는 베트남 경제의 놀라운 성장 속도가 있다. 베트남 경제는 1991~2000년 10년간 연평균 7.5%대의 성장을 기록했고, 2001년 이후에도 7.4%대의 성장률을 유지해왔으며, 2005년에는 8.4%의 성장률을 보였다. 베트남의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양국 간의 교역도 크게 늘었다. 92년 수교 당시 4억 9천 3백만 달러이던 양국 간 교역량은 2004년 39억 3천만 달러로 8배가 늘었으며, 2002-2004년에 한국은 베트남 투자국 순위 2위에 올랐다. 양국 간의 교역의 증대는 베트남의 천연자원과 잠재적 시장을 확보하고자 한 한국의 이해와 경제개발과 자본투자를 위한 유력한 동반자를 얻고자 한 베트남의 이해가 적절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교류의 증대와 더불어 문화적·인적 교류 또한 활발해졌다. ‘한류열풍’이라고 부르는 베트남 내의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 2005년 말 25,000명에서 2006년 말 50,000명을 넘어서버린 베트남 내의 한국 교민,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45,000여 명의 베트남인 노동자, 한국인 남성과 결혼한 15,000여 명에 달하는 베트남 여성 등 최근 들어 한국과 베트남은 아주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국가·사회적인 교류의 증대가 서로에 대한 역사겧???이해를 토대로 한 질적 발전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장기적으로 볼 때 양국 관계의 질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전쟁을 통해 얽혀 있는 특수한 역사적 경험과 이에 대한 해석의 문제, 인적 교류의 증대가 낳은 현실적 문제, 이 이중의 과제를 해결해야 하며, 이는 현재 한국이 보다 주도적인 입장에서 풀어나가야 할 문제이다.

먼저 베트남전쟁을 둘러싼 베트남의 입장은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를 향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베트남 정부가 과거 전쟁 문제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를 반영하듯 2003년에 1967년 미군이 베트남 중부 고원지대에서 수백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에도 베트남 당국은 “미국에 의한 침략전쟁은 베트남 국민에게 많은 고통과 손실을 초래했지만 더 이상 과거에 집착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표명했고, 이러한 입장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피해 당사자들의 입장은 정부와는 다르다. 이들에게 과거의 고통은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피해지역에 세워진 ‘증오비’는 침묵하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있다. 1999-2000년까지 한국의 <한겨레21>의 현지 취재와 베트남진실위원회의 활동으로 드러난 바와 같이 한국군에게 피해를 당한 베트남 민간인들이 적지 않으며, 그들은 아직까지도 당시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는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이며, 현재 진행 중인 현실적 고통이다. 물론 베트남전쟁 시기의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해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이 사과를 표명했고, 베트남 현지에 학교나 병원을 지어주는 등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으며, ‘나와우리’처럼 베트남과의 화해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시민단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명확한 진상규명, 이를 바탕으로 한 과거사 치유책이 모색되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노력은 단순히 상처 그 자체를 보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쟁 자체에 대한 역사인식의 전환을 필요로 한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은 냉전이 종결된 현재까지도 여전히 반공의 성전으로 해석되며, 역사적 재평가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인 이념지형을 반영한다. 또한 베트남전쟁은 현재까지도 경제적인 발전과 도약의 기회로 평가된다. 양적인 경제발전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일까? 『머나먼 쏭바강』(1978)의 저자 박영한(朴榮漢, 1947~2006)은 1977년 한 신문에 「황병장은 기억하는가 ‘헤이 따이한 츄잉검’을」이라는 칼럼을 실었다. 이 글에서 그는 “헤이 따이한 라이라이 츄잉검”이라고 외치는 베트남 꼬마들에게 던져주었던 비스킷과 사탕에서 어린 시절 미군에게 받아먹었던 초콜릿을 떠올린다. 그는 베트남의 아이들에게서 배고팠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렸고, 미국의 돈과 무기로 이루어진 전쟁,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얄팍한 우월감에 대해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전쟁과 경제발전의 측면에서 현재 한국 사회는 이러한 ‘소박한’ 부끄러움도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쟁은 발전과 국익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상처와 배고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우리가 다른 한쪽의 고통을 대가로 한 경제 발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과거의 망각을 넘어서 약육강식의 패권적 20세기 역사를 정당화하는 것이다. 양적 성장 자체에 대한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은 구분되어야 하며, 사실판단을 넘어서 전쟁을 통한 성장을 정당화하는 가치판단의 범람은 한·베관계 발전적 미래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진보적 역사인식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둘째,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인적 교류의 증대는 매우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를 낳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국제결혼문제이다.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출신 여성의 결혼 건수는 2001년 134명, 2002년 476명, 2003년 1,403명, 2006년에는 9,812명으로까지 늘었고, 전체적으로는 15,00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주한베트남 대사인 반띠엔반이 언급한 것처럼 “한국에서 보면 15,000명의 베트남인 며느리가 있고, 베트남에서 보면 15,000명의 한국인 사위”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급작스런 양적 팽창만큼이나 베트남 여성과 결혼을 진행하는 방식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한때 거리에 즐비하게 걸렸던 “베트남 여성과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 신문지상에 버젓이 실린 베트남 여성을 비하하는 결혼 광고, 베트남 현지에서 행해지고 있는 졸속 결혼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다. 특히 이 가운데 2006년 4월 21일 <조선일보>의 “베트남 처녀들 희망에 땅 코리아로”라는 기사에 실린 가슴에 번호표를 달고 앉아 있는 베트남 여성의 사진, 그리고 이를 설명한 “한국 왕자님들 우리를 데려가 주오”라는 기사는 베트남인들뿐만 아니라 한국인들의 공분을 자아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었다. 

왜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사건을 나열하는 것보다 일련의 사건들의 연속과 재생산을 가능케 했던 사회·문화적 맥락이며, 여기에서 드러나는 것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다. 한국의 매체들이 베트남 여성들을 표현했던 방식들은 서구가 동양세계를 타자화하고 열등한 존재로 그려내며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던 오리엔탈리즘의 한국판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 여성에 대한 시각은 한편으로는 같은 동양인으로서의 인종적·문화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에 대한 우월의식을 통해 베트남인들을 대상화하는 양가적 감정을 함축한 것이다. 현재 이러한 우리 안의 인종주의는 한국과 베트남의 문화적 이해와 수평적 소통,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보다 진전된 양국관계의 형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한 지 이제 15년, 전쟁의 기억을 넘어 빠르게 진전되어 온 양국관계는 이제 양적 교류의 증대를 넘어 서로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성찰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와 있다. 베트남인들의 말대로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쟁 시기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해 침묵하기보다는 베트남 민간인 피해에 대한 명확한 진상규명과 더불어 진실한 화해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하며, 우리 안의 냉전·발전주의의 유산과 아류 오리엔탈리즘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 이는 베트남과의 진정한 우호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일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보다 성숙한 사회로 한 걸음 나아가는 계기가 될 것이기에 더욱 절실한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