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월쯤이었을까, 가족모임이 있어 저녁 때 아이들과 바삐 집을 나서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박영근(朴永根, 1958~2006) 시인이었다. 오랜만의 전화라 반가웠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담스럽기도 했다. 한동안 뜸하더니 또 시작인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아침이건 새벽이건 때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불러내곤 했다. 영근 형(이렇게 부르는 편이 내게는 여전히 익숙하다)의 목소리를 들으면 뭐랄까, 안타까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뭔가 절실한 것이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것이다. 그 절실한 호출을 받고 불려나간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정작 나가보면 실망하기 일쑤였다. 곤드레만드레 취한 선배와 어울리는 게 내 적성에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히려 영근 형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기 마련이었고 얼마 뒤부터는 불러도 나가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전화가 한동안 뜸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네가 인천문화재단에 들어가서 다행이다. 넌 잘 할 거야. 지금처럼만 하면 돼, 이런 요지의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기분이 묘했다. 생소한 느낌이었다. 당연히 온갖 구실을 동원해 나오라고 졸라댔어야 하는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영근 형의 몸이 몹시 상했다는 소식과 함께 중환자실에 실려 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곧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다가 그의 부음을 듣고 한동안 망연자실했었다. 가을처럼 청명한 봄날, 그의 빈소에서 쓴 소주를 들이켠 게 꼭 1년 전이다.

지난 5월 11일, 1년 전 그날처럼 청명했던 봄날 저녁 난 아주 특별한 공연에 ‘참여’했다. 관람이 아니라 ‘참여’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시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 모두가 그 공연의 주인공들이었기 때문이다. 함께 모여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박영근 시인의 절친한 벗들이 그를 회상하기도 했으며, 작품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모노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무대로 나와 박영근 시인의 삶과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는가를 진솔하게 들려주었다. 후배들은 박영근 시인이 1980년대에 썼던 짧은 단막극을 라디오극 형식으로 재현하기도 했으며 당시의 그를 떠올리며 노동운동가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작사한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고즈넉하게 합창하고 나자 생전의 벗이기도 했던 화가 허용철(許容喆) 형이 마치 살아있는 친구 박영근에게 그러듯 술을 권했고 이어 다른 친구와 가족, 그리고 후배 들이 이를 따르면서 공연은 막을 내렸다. 아마도 시인 역시 오랜만에 기분 좋게 취했을 것이다.

리허설도 없고 각본도 없는 무대였지만, 한 시인의 생애와 그 문학적 성취를 이렇게 소박하면서도 입체적으로 드러낸 추모행사를 본 적이 없다. 행사는 내내 추모의 분위기로 엄숙했고 슬펐으며 그리고 감동적이었다. 내가 아는 영근 형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 노동운동에 매진하던 시기까지 그의 모습들이 다채롭게 조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행사를 발의한 인천의 동년배 친구들과 무대 뒤에서 고생한 후배들의 정성은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비록 홀로 쓸쓸히 떠났지만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 박영근이라는 사람과 그가 살았던 시대와 문학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그는 그래도 한 시대를 열심히 살았던 사람이리라.

그런데 추모제가 열린 주안의 컬쳐팩토리(Culture Factory)극장 역시 박영근 시인과 무관한 곳이 아니다. 1999년 겨울, 인하대 최원식(崔元植, 현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 교수와 국민회의 남구갑지구당 박우섭(朴祐燮, 전 인천남구청장) 위원장의 발의로 만들어진 ‘인천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에서 박영근 선배를 포함한 뜻 있는 사람들이 모여 인천문화의 현안들을 함께 고민한 적이 있었다. 실무를 맡은 몇몇은 거의 매주 만나다시피 했는데 그때 영근 형과 나 역시 실무진의 하나였다. 우리는 모일 때마다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인천문화를 토론했다. 컬쳐팩토리극장이 만들어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런 토론들의 성과와 알게모르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이 극장 설립에는 함께 모임을 주도했던 박우섭 전 남구청장의 공력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극장의 개관 기념행사가 박영근 추모제인 것은 상징적이면서도 아이러니컬하다.

때 맞춰 그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창비, 2007)도 출간되었다. 사실 박영근 시인은 박노해, 백무산과 함께 80년대 노동자 시인의 상징처럼 우리에게 각인된 사람이다. 80년대 말 신촌의 한 카페에서 박영근 시인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나에게 우람한 모습으로 다가왔었다. 지식인의 나약한 삶을 택했던 내게 『취업공고판 앞에서』(청사, 1984)와 『대열』(풀빛, 1987)을 쓴 노동문학의 전위 박영근이 어찌 우람하게 보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인천에서 다시 만나 형 아우로 지내면서 노동자 시인 박영근과 그의 문학에 대한 편견에 가까운 경외감도 가시게 되었다. 그는 1980년대의 속류 맑스주의에 경사된 지식인들처럼 노동자를 투쟁의 언어로 생경하게 내세운 적이 없었다. 글 쓰는 일에 누구보다 철저했고 그만큼 타인의 글에 대해서도 냉정했다.

돌이켜보면, 아마도 그는 80년대를 지나 90년대와 새로운 세기를 마주하면서 자기 삶의 중심을 놓을 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했던 것 같다. 인간관계를 훼손시키곤 했던 주벽과 무절제한 생활걖걖걖. 제정신으로는 이 시대를 버티기가 어려웠던 걸까. 구태의연한 잠언으로 시인을 참칭하려는 욕망이 그에게는 없었다. 차라리 자신의 삶을 방기하고 또 그런 삶을 솔직한 태도로 응시하는 것이 그가 택한 삶의 방법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는 그의 그런 정신을 가장 충실히 응축한 절창들로 엮였다. 그는 유신독재에 항거하다 고등학교를 자퇴했고 80년대 들어 ‘노동자’를 발견한 뒤 온 삶을 다 바쳐 혁명의 불꽃이 되려했다. 그런 그가 시의 불꽃으로 삶을 태워 남긴 결정이 이 유고시집이다.

그래서 여기에 실린 시들은 한결 같이 읽는 사람을 경건하게 만들고, 안타깝게 하며, 마침내 감동시키는 것이다. 경건함은 시인의 맑은 정신을 느끼는 데서 오고, 안타까움은 더 이상 이승의 그를 만날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시가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는 사실이다. 80년대의 정신이 마지막 불꽃처럼 아름답게 타들어가는 것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지켜보게 된다. 이제 모든 불꽃을 태우고 한 시인이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그러니 그대, 모든 걸 다 잊고 별자리에 누워 편히 흘러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