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도의 김찬삼세계여행문화원(이하 문화원)이 헐리게 됐다는 말을 듣고 ‘그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김찬삼(金燦三, 1926~2003)의 체취가 밴 집과 방대한 자료가 거기 있고 그의 생애가 우리 정신의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이었다.

월미도에서 탄 페리가 영종도 선착장에 도착하자 김선생의 외아들 장섭(長涉)씨가 마중 나와 주었다. 구읍 뱃터에서 해안도로를 타고 3분쯤 달리면 신록 무성한 숲속에 문화원이 아담한 모습을 드러낸다. 정확한 위치는 인천시 중구 중산동 산 75번지. 두 해 전 시낭송 행사가 열려 찾아왔었는데 변한 것은 없었다.

“토지공사에서 5백여만 평을 수용해 ‘하늘도시’로 꾸민답니다. 국가적 시책이니 내놓아야지요. 그러나 다행히 공원으로 만든다니 문화원을 그 일부로 살려 두었으면 합니다.”

중년시절의 부친을 빼닮은 장섭씨는 간곡하게 말했다.

김찬삼은 1926년 황해도 신천(信川) 태생으로 서울대학교 사범대 지리과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가 미국에 유학, 1958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학원을 나온 뒤 세계일주 무전여행을 떠났다. 1961년에 귀국해서 여행기를 출간해 큰 바람을 일으켰다. 세종대와 경희대 교수로 일했으며 동산중고등학교 법인 이사장도 맡았다. 인도와 터키 앙카라에서의 연이은 부상으로 눕게 된 1996년까지 세 번의 세계일주 여행과 20여 회의 테마여행을 하여 160여 개국, 1천여 도시를 밟았고 부상 후유증으로 2003년  타계했다. 김세완(金世玩, 1894~1973) 대법관의 아들이었지만 부자가 아니었으며 미국 유학시절 접시닦기로 고학했다. 『세계일주무전여행기』, 『끝없는 여로』, 『세계의 나그네』, 『김찬삼 세계여행』(전 10권)의 인세로 여행비를 충당했다.

그는 무전여행으로 세계를 돌며 한국을 알린 민간 외교관, 모험을 감행하여 철인과도 같은 돌파력을 보여준 개척자, 하루하루 살기에 급급해 도대체 외국여행은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한국인들에게 세계를 바라보게 한 선구자였다. 그가 첫 여행에서 돌아온 1961년의 강연을 필자는 잊지 못한다.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는 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근무한 인천고등학교에 왔다.

“가슴을 펴고 세계를 바라보라. 그리고 거침없이 나아가라.”
위험과 역경을 헤치고 세계를 돌아보고 와서 그가 하는 말들은 넓은 세상으로 통하게 하는 한 줄기 빛이었다. 그는1934년  부친이 인천지원 판사로 부임하면서 인천에 뿌리내렸다. 1972년 영종도가 전혀 주목 받지 못할 때 땅을 사서 집을 짓고 정원을 가꾸고 문화원을 만들었다. “영종도가 공항이 되어 세계로 뻗는 자리가 될지도 몰라.” 그때 예언처럼 말했는데 뒷날 그는 이 곳에 막 개통한 공항에서 비행기들이 이륙하는 것을 바라보았고 이제 공항 개설의 여파로 문화원이 헐릴 운명을 맞았다. 장섭씨와 함께 문화원 내부를 한 바퀴 돌았다. 잔디 언덕과 숲속에 숨은 듯 앉은 기념관, 도서관, 휴게실, 손님 숙소 등 건물들 사이로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천천히 걷고 있었다. 재작년 가을 한국현대시학회 회원들이 시낭송과 타악기 연주회를 열었던 야외무대가 꿈결처럼 아늑했다. 그때 참석한 시인들이 한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이만한 풍광을 가진 장소가 없다고 했다. 장섭씨는 조감도를 꺼내들고, 장차 문화원이 살아남으면 유스호스텔과 야외전시장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며 그 자리를 보여 주었다.

문화원은 면적이 2,800평이고 멀리는 인천항, 가깝게는 선박들의 출입항로인 플라잉 피시(flying fish) 수로가 한눈에 들어오는 바닷가 언덕에 앉아 있다. 소장한 유물은 선생이 여행 때 사용했던 여권, 신발, 옷, 배낭, 나침반, 자동차 등의 실물, 사진 10만 장, 육필 일기와 편지 수백 통이다.

장섭씨에게 요청해 슬라이드를 켜고 반세기 전 유럽과 아시아의 사진을 보았다. 필자가 수년 전에 가본 파리 몽마르뜨르 언덕과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주변이 사뭇 다르다. 현지 국가들도 요청해올 만한 귀중한 자료들이다. 문화원이 헐리면 이것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안타까운 마음으로 토지공사 인천지사에 전화를 걸었다.

담당인 신형선씨가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문화원은 존치계획이 없으며, 부근에 영종진(永宗鎭) 자리가 있어 인천시에서 영종역사관을 세우려 하고 있고 문화원 자리는 거기 포함될 것이라고 했다. 인천시가 문화원을 영종 역사의 일부로 판단하거나 공익적인 가치를 인정한다면 살려두겠지만 지금 그런 지침은 없다는 것이었다.

영종진은 1875년 운요오호(雲揚號) 사건 때 일본군의 포격과 육전대의 공격에 맞서 싸우던 우리 병사들이 무수히 전사한 곳이다. 영종진 복원은 당연하고 역사관도 세워야 한다. 그러나 문화원도 살려야 한다. 물론 김찬삼의 세계여행 정신과 국난극복의 근대사는 코드가 안 맞는다. 그러나 그래서 헐 수밖에 없다는 단순논리는 말도 안 된다. 인천은 뭘 하고 있는지, 선생의 생애가 갖는 상징성과 많은 자료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지.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듯해 답답하다.

여행 관련서적으로 가득한 도서관을 둘러보고 휴게실로 가니 홍보담당 정성임씨가 방문객들에게 차를 대접하며 해설을 하고 있다. 필자는 방문객 세 분을 만났다. 13년 전에 이민을 가서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박정수(50세)씨는 “아니죠. 살려야 합니다”라며 손사랫짓을 한다. 서구 가좌동의 채은주(39세)씨도 그랬다.

“초등학교 때 김찬삼 선생의 책을 읽고 ‘나도 이분처럼 자유롭고 싶다. 이분처럼 헤쳐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오늘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겁니다.”

필자는 두 해 전 이 곳에 와서 시낭송을 했던 문단 대선배 정진규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이랬다.

“인천에 부탁합니다. 거길 살려 주세요. 나는 가끔 거기 가보고 싶어집니다.”

문화원을 살려야 한다는 확신을 안고 필자는 그곳을 떠났다. 우리 인천은 지금까지 많은 문화재들을 멸실시켜 왔다. 지금 다른 지방자치단체들은 문화적 의미가 있는 사소한 것까지 어떻게든 기념하려 한다. 영종역사관도 중요하지만 문화원도 그렇다. 거긴 정말 헐지 말아야 한다. 시장, 시의회, 경제자유구역청, 중구청, 그리고 시민 들이 지혜를 모으면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