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에 영어 열풍이 몰아친 지도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다. 날이 갈수록 뜨거워지는 이 열기에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곧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만 같다. 필자는 중국문학이 전공인 까닭에 외국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왔다. 이를테면, 외국어를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는가,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인가, 모국어와 외국어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중언어는 과연 가능한가, 문학은 언어 안에 있는 것인가 밖에 있는 것인가 등등. 영어도 외국어의 한 종류이니만큼 외국어에 대한 이와 같은 질문들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하지만 영어는 단순히 외국어의 한 종류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게 문제의 핵심이다.

영어는 오늘날 세계체제를 장악한 지배자의 언어이기 때문에 그저 ‘외국어’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뒤집으면, 영어는 오늘날 세계체제 지배자의 언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외국어의 한 종류이기도 하다. 외국어인 영어와 세계체제 지배자의 언어인 영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잘 구별하고 관련시켜 인식하지 못하면 심각한 오류와 혼란이 발생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사회의 영어 광풍은 바로 이러한 오류와 혼란을 최악의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최근 국내의 여러 대학들이 중문과를 비롯한 이른바 ‘제2외국어’ 학과에 대해서도 영어강의를 권장하거나 심한 경우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넌센스가 아닐까? 중문과의 경우를 가지고 따져 보자. 중국어회화 과목이 아닌 경우, 중국어로 하는 강의는 득보다 실이 많다. 학문적 질의 현저한 저하라는 실(失)은 결코 중국어 수강능력 향상이라는 득(得)으로 보상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잘 가르치고 잘 배우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어서 모국어로 해도 어렵지 않은가. 실제 사정이 이러한데, 심지어 영어로 강의를 하라니!

영어강의의 명분은 국제화, 국제경쟁력 강화에 있다. 외국학생을 대학에 유치하는 것을 말하는가? 그러나 한국에 유학 오는 외국학생들 중 영어권 학생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한국에 유학을 올 때는 이미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를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올 것이다. 아니면, 한국학생들에게 영어권 유학 준비를 하라는 것인가? 그러나 준비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영어능력의 향상이 아니라 학문적 능력의 향상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 일정 수준 이상의 한국어능력을 필요조건으로 할 뿐, 우리는 한국어를 더 잘한다고 해서 외국학생을 대학원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또 기왕에 입학한 외국학생의 경우, 설혹 그 학생이 한국어에 서툴더라도 발표와 리포트의 학문적 내용이 우수하면 좋은 학점을 부여한다.

한국어를 아무리 잘해도 그 학생의 학문적 내용이 시원치 않으면 절대로 좋은 학점을 주지 않는다. 한국어야 한국학생이 훨씬 더 잘 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의 학문적 능력이 외국학생보다 뒤떨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는 세계 어느 곳의 대학이든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영어강의가 실제로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학생의 영어능력 향상뿐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강의와 학문을 영어능력 향상의 도구로 삼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야말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거의 도착증이 아닌가!

영어가 세계체제 지배자의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에 대해서는 각별한 정책적 배려와 전략적 대응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배려와 대응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요건을 전제에서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외국어교육 일반이라는 지평에서 합리성과 적절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둘째, 영어교육이 새로운 식민주의에 굴복되지 않도록 하면서 한국사회의 영어능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현재 한국사회의 도착적 영어 광풍은 이 전제들을 간과하고 있다. 아니, 고의로 무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이 간과와 무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본말전도를 밥먹듯 해온 교육부? 성찰의 깊이는 결핍한 채 시류에 영합하는 데만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온 언론? 대학을 인력양성소 쯤으로 여기는 기업? 계급적 위계질서에서 상승하려고, 혹은 하강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중산층? 이들 모두의 공모?

최근 출판된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당대, 2007)는 한국사회의 영어 광풍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설득력 있게 수행하고 있다. 대부분 영문학자들로 구성된 이 책의 필진은 영어 광풍 속에서 외국어교육 일반이라는 지평의 합리성과 적절성이 어떻게 간과 혹은 무시되고 있는지 그 세목들을 자세히 검토하고, 영어 광풍이 새로운 식민주의를 어떻게 내면화하고 있는지 그 메커니즘의 심층을 침착하게 해부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영어의 물신화에 대한 성찰이다. 약간 긴 인용을 감수해야겠다.

영어에는 그것에 수반되는 온갖 매혹과 미신과 환상이 부착되어, 마치 그 자체로서 생명을 얻은 영험한 존재처럼 우리의 정신영역에 자리잡는 것이다. 즉 영어는 어느새 투명한 매체가 아니라 부와 진보와 문명의 표상들이 온통 부여된 물신이 되었으며, 이처럼 신격화된 대상으로서의 영어야말로 그것이 자본주의의 언어라는 명제를 확인해 준다.

-윤지관, 「영어의 억압, 그 기원과 구조」 부분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영어 광풍이 한국사회의 지배구조를 정당화하고 더욱 공고히 하고자 하는 의도와 결합되어 있다는 데 대한 성찰이다. 인용으로 설명을 대신하는 편이 낫겠다.

한국에서 영어를 강조하는 진짜 이유는 국가경쟁력 제고에 필요한 만큼이나, 사회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 영어가 사회적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한국인 모두가 영어를 잘할 필요가 없으며, 그렇게 만들 수도 없다는 근원적 문제는 쉬 가려지고 국가경쟁력을 키우려면 모든 국민이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헛소리’가 나온다.
 -송승철, 「영어, 근대화, 공동체, 이데올로기」 부분

외국에서도 다 그러고 있는데 우리만 그러지 말라는 이야기냐, 그러다가 우리만 뒤쳐지면 어떡할 거냐, 라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반문이 떠오르는 사람들은 이 책에 함께 실린 더글라스 루미스(Douglas Lummis)의 「영어회화의 이데올로기」와 이연숙(李姸淑)의 「일본의 영어공용어화론」을 읽어보시기를! 일본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있는 이 두 편의 글에서, 똑같은 문제로 똑같은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이 집단히스테리는 그것이 표방하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점에서도 성공을 거둘 가능성이 별로 없는데다 인간성 훼손과 사회적 모순의 심화를 그 대가로 치러야 하는 것으로서 시급히 극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식민지시대의 친일에 대해서는 그토록 의분에 차 성토하면서 현재의 영어 광풍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무반성적이고 맹목적인 것일까. 혹시 친일 성토를 현재에 대한 알리바이로, 면죄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석연치 않은 현실에 대한 반발심에 자신이 책임지지 않아도 될 ‘과거의 것’에 오히려 더 흥분하는 것이 아닐까.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이미 발표되었던 것들이고, 그 중 가장 이른 것은 1994년에 발표된 김진만의 「영어의 문제」인데, 이 글에도 경청할 만한 논의들이 이미 많이 포함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 글들이 발표되던 당시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으며 책으로 묶인 지금도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많은 신문들이 이 책의 출판에 대해 기사를 썼지만 관례적인 소개에 그쳤을 뿐, 이로부터 본격적 이슈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이 글들은 영어라는 이름의 집단히스테리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원칙들을 잘 검토했다고 할 수 있다. 원칙이 올바르게 서면 기술적인 사항들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이 글들에 의해 수행된 성찰이 실질적인 사회적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느냐 하는 데 있다. 필자가 영어전문가도 아니면서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