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초 인도의 방갈로르(Bangalore)를 방문하는 동안, 힌두어, 텔루구(Telugu)어, 카나다(Kanada)어 등 지방어로 만든 영화DVD 몇 장을 사려고 했다. 쇼핑을 위한 적절한 영화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러브스토리’라는 ‘보편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 코너가 잘 정리되어 있는 진열대에서 점원이 능숙하게 DVD 몇 장을 꺼내주었다. 그러나 옆에 있던 지인은 난색을 감추지 못했다. “이 집에 있는 전부가 러브스토리야!”

우리는 러브스토리의 홍수에 빠져 있다. 이 문화적 상황은 러브스토리라는 범주가 모든 사회에 편재해 있어 언제 어디서든 접근가능하리라는 느낌을 준다. 낭만적으로 말해, 사랑의 보편성이 러브스토리들을 증식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현대 문화산업의 필수적 표현이자 그 생산물인 사랑으로부터, 사랑이라는 관념을 추출할 수 있을까? ‘너무 많다(too many)’는 것은 이 재료풀 내부에 ‘동일한 것의 과잉(상투적 문구, 상품 등)’이자 ‘그 이상의 것(what’s more)’에 대한 (토론의) 결핍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한국과 일본의 TV드라마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월경적(trans-national) 러브스토리를 지배하는 것은 중산층 이성애 싱글들의 로맨스다. 이를 통해 ‘아시아적 근대성을 느끼게 한다’1 는 점에서 지역화효과(regionalizing effect)가 있겠지만, 그것은 서양 혹은 일본적 근대성과 구별되는 ‘아시아’적 함의와는 거리가 멀다. 이는 그 범주가 전지구적 표준에 따라 부단히 도구화되는 때조차, 러브스토리의 경계가 유동적임을 보여주는 듯하다.

너무 많으면서 빈약한 러브스토리들의 홍수가 문화산업화의 결과라고 할 때, 매개의 과정에 대해 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짧은 글은 ‘번안(adaptation)’, 다시 말해 원재료이자 잘빠진 생산품으로서 러브스토리를 자유자재로 이용해 온 동아시아의 문화산업 실천에 초점을 맞추어 쓰여졌다.2 2006년 SBS에서 방영된 16부작 드라마 <연애시대>가 그 중 하나인데, 그것은 일본의 유명한 작가 노자와 히사시(野澤尙, 1960~2004)의 1996년 작 『렌아이지다이(戀愛時代)』를 번안한 것이다. 노자와는 일본 TV산업에서 러브스토리의 제작과 해체에 오래 관여했던 노련한 시나리오작가다. 『렌아이지다이』는 기혼자들과 이혼자들의 생활세계 속 연애를 탐문하는 그의 오랜 시도의 일부다. 이 작품이 한국에서 번안되었다는 것은 일본과 한국 간에 지속적인 문화침투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비록 한국TV드라마의 지배적 관심사가 ‘순애(pure love)’이고 그것이 아시아 시청자를 열광케 했지만,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더 다양한 담론공간이 한국에서 잠재적으로 요구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글의 주된 목적은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월경적 문화요소로서의 연애라는 견지에서 번안작품 <연애시대>를 맥락화하는 것이다.  

전형적으로 월경적 번안은 지방적(국가적) 맥락에서 문화 재구성(re-making)의 문제를 이끌어낸다. 예를 들면,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텔레비전Television Across Asia』(Moeran and Keane, 2004)에서는, 이미테이션을 보상하는 TV비즈니스의 관행으로서 포맷교환을 인정하되, 서양과 아시아로부터 적극적으로 힌트를 취하는 지방적(역시, 국가적) 컨텐츠의 활력에 더 주목했다. 한국에서 일본드라마가 여러 형태로(라이센스 혹은 비라이센스 형태로) 번안되는 것에 관해 폭넓게 연구해 온 이동후는, 한편으로 일본드라마를 베낀 것을 부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에 매력을 느끼는 한국인 창작자들의 이중적 태도를 폭로했다.3 <야마토나데시코(大和撫子)>의 번안물인 <요조숙녀>를 비판하면서, 박식한 시청자들은 리메이크작이 지방의 차별적 정서구조를 고려해야 한다는 요구를 표명했다.4 월경적 번안에 관한 논쟁은 종종 오리지널리티(차이)의 가치에 예민하게 반응해 왔다. 성공의 관건은 지방성(locality)의 확보였다. 이런 물음들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국가적 차이를 강조하는 경향은 그것에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라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각인했다.  ‘아웃사이더’로서 즉,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입장에서 이 글을 쓰면서, 나는 아시아간(inter-Asian) 문화대화라는 시각을 제안한다. 결국, 번안이 허락하는 것은 특정 ‘국가’의 문화작품을 상이한 국가적 맥락 속에 재배치(reconfiguration)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러 가지 가능성 속에서 번안은 러브스토리 같은 문화형식들을 변형(transformation)한다. 이 점에서 뉴아시안시네마의 폭력성에 관한 라이콴 팡(Laikwan Pang)의 연구가 아시아의 월경적 TV 속의 사랑이라는 현안에 새로운 문을 열어줄지 모른다. 1980년대 이래 전지구적으로 인정받기를 열망했던 아시아영화집단을 고찰하는 과정에서, 팡은 영화제작자들이 쿵푸 같은 폭력적 표현을 적극적으로 베끼는 붐 속에서 몇몇 전세계적 히트작이 나왔음을 발견했다(예를 들면, 홍콩액션영화의 업데이트물인 <옹박>).5 또한, 비폭력적 기술들도 상호간의 베끼기를 통해 종합적 관념물로서의 폭력(개인적ㆍ사회적 폭력)을 고안해 냈다. 여러 차원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화적 실천으로서의 베끼기는 전지구적 상상에 호응하며 재현된 주체를 고안하는 플랫폼을 확장한다.

번안물로서의 <연애시대>에 관해 물어야 할 새로운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다. 사실상 사랑이 TV드라마를 규정하는 지역(region)에서 <연애시대>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노자와의 소설은 이혼한 젊은 커플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루와 리이치로오는 서로를 돕고자 하지만, 그것은 풀리지 않는 관계에 대한 로맨틱한 집착으로 빠질 뿐이다. 소설 속 헤어진 커플의 나레이션을 통해, 각각 또 다른 인연을 만난 그들의 표면(가벼운 말다툼과 참견)과 내면(자기분석, 표현되지 않는 느낌과 관심)에 대한 온전한 통찰이 가능해진다. 이 소설은 연애소설의 발전을 위해 설립된 ‘시마세연애문학상(島淸戀愛文學賞)’을 획득했다(1997년). 경우에 따라 연애소설이 ‘로맨스(romance)’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주제와 서사구조 면에서 그것은 원형적 서양로맨스와 다르다. 노자와가 집필 생애를 통해 집요하게 탐문했던 연애의 개념은 결코 소용돌이치는 연애행각 속에서 이상화되지 않는다.6 사실, 그의 수많은 결혼이야기들7 속에서 한때 결혼했던 커플들은 종종, 하루와 리이치로오의 경우처럼 재결합할 수 없는 (그러면서 영원히 헤어질 수도 없는) 질긴 관계들이다. 그들의 끝나지 않는 비즈니스는 새 사랑과 옛 사랑의 결과라기보다는, 그들의 결혼에 연애를 새로 상상하지 못한 결과다. 진정으로 한 발을 내딛기 위해, 그들은 공유된 과거로부터 여정을 환기하고 추적하고 그리고 되살림으로써 집착과 욕망을 깨끗이 시인해야 한다.

소설의 영화화작업이 흔히 그렇듯, <연애시대>에는 스토리상 약간의 각색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연애시대>는 주체성을 향한 한 개인의 탐색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노자와 소설의 충실한 번역이다. 인물은 단순히 편의 때문에 미혼이거나 기혼인 것이 아니다. 마지막 장면은 이미 재혼한 동진(리이치로오)과 은호(하루)가 춘천행 야간열차를 타는 것으로 종결된다. 그들의 관계를 바꿔버린 유산(流産)에 관해 이야기할 기회를 마침내 가진 은호는 동진과 재결합하고픈 바람에 괴로워한다. 그녀는 라디오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목사인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구한다. 어쩔 줄 몰라하는 스태프 옆에서, 목사는 은호에게 행복을 찾아가라고 재촉하며 “우리는 죄를 짓기 때문에 인간입니다” 라고 덧붙인다. 

제작, 번안 그리고 소비를 통해 아시아화한(asianized) 한국 TV드라마의 월경적 문화요소로서의 사랑.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할까? 동아시아 러브스토리들의 월경적 번안 대부분은, 문화적으로 특수한 실제 연애보다는 전형적인 연애를 다루어 왔다. 앞으로 해야 할 연구를 위해, 나는 잠정적으로 두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한국의 TV드라마들이 가족관계에 ‘실질적으로’ 붙박혀 있는 압도적으로 강렬한 사랑의 비극물로서 아시아 이웃들의 사랑을 받고있지만, 그런 일률적 상상을 넘어서야 한다. 여성적이고 계급적인 시각에서 <가을동화>를 분석한 양 팡치(Yang Fang-chih)는 사랑의 신화는 오직 여주인공이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지킬 때에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8 러브스토리를 월경적 문화표현으로 인식하는 것은, 번안물에 대해 내셔널알레고리(national allegories)로 축소되지 않는 탈국가적 혹은 포스트국가적 독서를 가능케 할지 모른다. 둘째, 하나의 관념으로서 자유로운 사랑이 현대화된 혹은 현대의 아시아에서 종종 개별화된 권력도구가 되어 왔다고 할 때, 그것을 탈영토화(deterritorializing)할 수 있는 힘을 다양한 역사적ㆍ문화적 조건 속에서 심도있게 분석해야 한다. 결혼제도를 통해 정체성이 정착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떤 개인이 되기를 욕망하는가? 그것이 바로 번역 속에 사라져서는 안 될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