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이따금씩 KBS가요무대 같은 옛날노래 프로그램에서 구수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원로가수 남일해의 노래 중 (제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강 “항구의 1번지 부기부기 1번지 그라스를 채워다오걖걖걖” 라는 가사말로 시작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항구의 1번지는 필시 오랜 여정을 마친 뱃사내들이 잠시 육지에 내려 지친 몸을 쉬게 하고 갈증 난 목을 적시는 그런 술집쯤이 될 듯싶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술집이 항구의 1번지가 아니라 실은 항구 자체가 1번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때의 1번지란 물론 근대 혹은 근대화의 1번지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서구의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위치가 바로 항구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구의 문물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다는 말에는 어딘가 어폐가 있다. 그냥 주고받는 것이 아닌 강제가 개입한 관계기 때문이다. 항구도시가 근대의 1번지가 된 데에는 서구 식민주의의 수탈과 ‘문명’의 ‘이식’이 밑그림으로 감춰져 있기 마련이고, 개항의 ‘개(開)’라는 동사의 주어가 실은 서구 식민주의라고 한다면, 개항은 사실 ‘피(被)개항’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동아시아 일대의 거개(擧皆)의 개항도시, 홍콩에서 상하이를 거쳐 칭다오(靑島)를 지나 따롄(大連)에 이르는 중국의 거의 모든 연안도시가 서구와의 이른바 불평등조약에 의해 개항된 피개항도시이고, 일본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며 인천·부산·원산 등 한국의 항구도시도 그렇다. 다시 말해 동아시아 일원의 근대 1번지인 허다한 항구도시들이 불평등조약에 의해 열려진 피개항도시인 셈이다. 하지만 어디에나 그렇듯 예외가 없을 수 없다. 불평등조약에 의하지 않고 개항한, 다시 말해 피개항이 아니라 스스로 개항한, 개항도시가 바로 나가사키(長崎)다.

나가사키라는 도시의 연표를 구성하자니 제법 어지럽고 복잡하다. 이른바 세계체제가 가장 먼저 촉수를 대기 시작한 일본땅에 포르투갈이 먼저 들어오고 이어서 네덜란드동인도회사 같은 글로벌 ‘네트워크’가 ‘접속’을 시도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무역선들도 출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에 0자가 박힌 연도만을 살피면, 1550년 최초의 서양 선박인 포르투갈 선박, 나가사키 인근 히라도(平戶)에 도착, 그 해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co Xavier, 1506~1552) 신부 도착, 1개월 사이 신도 1,000명으로 증가. 1570년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1에 의해 대(對)포르투갈 무역항으로 개항. 1600년 최초의 네덜란드 선박 나가사키 인근 표착(漂着). 여기에 몇 가지 연도를 추가하면 아래와 같다.

1636년 서양인거주제한지역인 인공의 섬 데지마(出島, 도합 1만 5천 평방미터)가 축조된 이래, 나가사키에 입항한 4척의 포르투갈 선박의 선원 약 800명이 수용되었다. 1639년 막부 쇄국령으로 인해 포르투갈과 단교가 선언되자, 1641년 막부의 영으로 히라도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데지마로 이전된다.
이렇게 해서 1859년 일본의 개국까지 약 218년 동안 데지마는 서양으로 열린 일본의 유일한 창구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추가할 것은 그 무렵 우리 한반도의 사정이다. 조선을 최초로 서구세계에 알린 『하멜표류기』의 저자 네덜란드의 하멜(Hendrik Hamel, ?~1692)이 제주도에 표류한 것은 1653년이었다. 13년간 조선반도에 억류당하면서 별난 경험을 다하다가 탈출에 성공하여 네덜란드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들른 곳이 바로 나가사키. 물론 하멜보다 먼저 조선에 표류하여 조선여인과 결혼했을 뿐더러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여 공을 세우고 하멜 일행을 서울로 호송하는 조선의 병사 노릇을 한 벨테브레(J.J.Weltevree, 우리 이름 박연)가 조선 반도에 표류한 것이 1627년. 요즘 벨테브레를 그린 『천년의 왕국』이 역사소설 붐을 타고 뜨고 있다니 바로 이 무렵의 내용일 테다. 하멜과 벨테브레의 행선지는 물론 일본의 나가사키항이었겠고, 물론 이들은 동인도회사 소속이었다. 병자호란 당시 벨테브레의 군사 주특기는 총포제작이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바로 이 무렵, 그러니까 벨테브레가 조선에 표착하기 직전인 1624년, 나가사키 인근의 히라도, 앞서 네덜란드 상관이 데지마로 옮겨오기 이전에 상관을 설치했던 그 곳에서 일본인을 어머니로 한 중국인이 태어났으니 그가 바로 정성공(鄭成功)이다. 중국사로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명말청초(明末淸初)라는, 명말과 청초를 떼어 쓰기로 표기하지 않고 하나로 붙여 표기하여 뭉뚱그리는 시절이다. 이들은 명의 신민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청의 신민도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붙여진 그들의 아이덴티티는 당인(唐人). 명말청초에 일본으로 유망(流亡)한 명나라 사람들은 청나라 백성이 아니라는 뜻을 표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를 당인이라 불렀단다. 이 말은 에도시대에 널리 쓰여 중국인을 칭하는 명사로 되었고, 당인의 선박을 가리켜 당선(唐船)이라고 불렀다.   

정성공의 아버지인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타이완을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상관의 통역이었다. 네덜란드어를 알았으니 네덜란드동인도회사 배를 타고 나가사키를 오간 것도 자연스러우며, 네덜란드의 상관이 개설되어 있던 히라도에서 일본 여인과 결혼하여 정성공을 얻은 것도 그리 어색한 일이 될 성싶지 않다. 정지룡은 통역일에 만족하지 않고 해상무역에 손을 댔으며, 때로 해적노릇도 서슴지 않았다. 바닷사람들의 속성이 그것이 아니던가. 장사꾼으로부터 해적으로의 이런 변신은 유서가 제법 깊다. 에게해의 영웅 오딧세우스에게 외딴 섬의 괴물 퀴클롭스가 물었던 질문, “너는 탐험가인가 아니면 장사치의 심부름꾼인가 그것도 아니면 해적인가”는 삼자택일이 아니라 실은 서로 통하는, 삼위일체의 그것이기 십상인 까닭이다. 정씨 일가(정지룡으로부터 그 아우인 태泰, 홍규鴻逵를 거쳐 아들인 성공 그리고 성공의 배다른 동생인 성사成賜와 세습世襲, 성공의 아들인 경經에 이르는 일가 전체)가 나가사키와의 해상무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정성공은 자신의 전성기 시절, 푸    (福建) 일대를 자신의 세력권에 두고 주민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나가사키와 광동(廣東) 등지에서 무역을 하는 당선들에 자금을 대주고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원금과 이자를 받는 방식을 취했다. 나가사키에서는 정성공을 가리켜 생사(生絲)무역의 왕이라고 불렀다. 1654년의 경우, 도합 51척의 무역선이 나가사키에 입항했는데, 정성공 선단을 이루는 배가 12~3척. 이 배들이 입항하지 않으면 네덜란드 선박의 생사무역이 이루어질 수 없노라고 데지마의 네덜란드상관장(商館長) 하브릴 하파트(Gabriel Happart)는 일기에 적고 있다.2

물론 청조가 이를 방치하지 않았다. 1656년(順治13년) 청조는 저쟝, 푸, 광동, 하이난(海南), 산동 등 연안지역 백성들이 정성공의 무리에게 양식이나 화물을 파는 행위를 엄금했다. 정성공은 생사와 견직물을 입수하지 못하자, 마닐라로 배를 보내 당선이 필리핀에 수출한 것을 재매입하여 나가사키로 전매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훗날 타이완의 왕이 되는 성공의 아들 경 역시 이 방식을 썼다고 타이완의 영국상관장 사이먼 델보(Simon Delboe)가 보고하고 있다. 아버지 지룡은 이미 청조에 항복한 바 있으나, 성공은 자신의 세력이 수축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방관하지 않았다. 샤먼(廈門)과 진먼다오(金門島) 공략, 차오저우(潮州) 탈취, 장저우(彰州)와 취앤저우(泉州) 함락에 이어 그 세력이 저쟝까지 이르렀다가 급기야는 난징(南京)까지 진격했으나 대패했다. 하는 수 없이 정성공은 1661년 네덜란드가 점령하고 있던 타이완을 탈취하는 데 만족하는 걸로 일단락을 지음으로써, 대륙근거지를 잃고 타이완으로 고립되었고 이듬해인 1662년 타이완에서 세상을 하직하면서 나가사키무역은 아들 경의 손으로 넘어간다. 정지룡으로부터 정성공을 거쳐 정경에 이르는 정씨 일가의 해상무역은 1635년부터 1683년까지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다시 연표를 하나 추가하자. 

1688년. 당선의 나가사키 입항이 117척으로 증가, 은과 금의 해외유출이 과도해지면서 바쿠후(幕府)가 무역량을 제한하자 밀무역 성행. 1689년. 밀무역을 막기 위해 토오진야시키(唐人屋敷)당인거주제한지역 조성(넓이 8,015평, 이후 9,373평으로 확장). 1702년. 신치(新地)에 당선의 화물 전용 하치장 건설(3,500평), 남쪽 문을 통해 토오진야시키로 이어짐.
1670년대 나가사키 인구 전체 6만 중 당인이 1만을 상회했다고 한다. 정성공의 아들 정경이 타이완과 일본을 오가던 그 시절인 것이다. 아울러 지금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바로 그 시절의 신치라는 곳이다.

지난 초봄 나가사키 땅을 처음 밟다가 차이나타운 골목 한 가운데 자리잡은 ‘신치쿠라아토(新地藏跡)’라는 돌비석을 보면서 주억거린 말이 이랬다. “‘신’이라. 신이라면 인천에도 있지. 거긴 신치가 아니라 신포동(新浦洞)인데.” 그러고 보니 신치의 신은 300여 년 전의 신이요, 신포동의 신은 100여 년 전의 신이렷다. 제물포가 신포가 되어 동이라는 근대적 행정구획 단위로 포섭된 것이다. 그럼 그 신은 아직도 신인가. 아니면 구인가. 나는 일순간 기이한 생각에 잠겼다. 중국의 근대사를 신이라는 글자로 풀이하는 것도 가능하다. 량 치차오(梁啓超)중국 청말민초의 계몽사상가의 「신민설(新民說)」, 5․4를 풍미한 잡지 <신청년>, 마오 저동의 ‘신민주주의’, 1949년의 신중국, 그리고 1979년 이후의 신중국론 등등. 신의 퍼레이드인 셈인데 어느 것이 진짜 신인가.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3이라더니 미상불 신이라는 놈도 ‘신가신 비상신’이 아닐손가. 한때 일본의 1번지였던 나가사키, 지금 그곳에 뜨는 국제선 항공편은 서울과 상하이밖에 없다. 지금은 1번지가 아닌 게다. 그렇다면 21세기 신 1번지의 요건을 무엇인가. 신포동이 구포동이 아니려면 뭐가 새로워야 하는가.

이런 쓰잘데기 없는 질문과는 달리 나가사키를 밟으면서 하나 얻은 것은 작년 겨울 타이완에 들렀을 때 던진 질문, 곧 어째서 타이완 사람들은 일본에 그토록 적대감이 없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정답은 비록 아닐지라도 에두른 답 비슷한 것을 얻은 것이 있었으니걖걖걖. 도착한 날 밤 저녁을 먹은 차이나타운의 한쪽 출입구 초입에 있는 음식점 카이라쿠엔(會樂園)의 주인장은 만다린(mandarin)은커녕 푸말도 못할 만큼 일본화되어 있었다는 점. 그 이튿날 점심을 먹은 나가사키 짬뽕의 원조 시카이로오(四海樓)의 4대째 주인 천 지루(陳繼儒)라는 젊은 주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는 점. 그런데 그의 증조부이자 창업주인 천 핑순(陳平順)은 일본인 아내를 두었다는 점, 그리고 타이완의 시조로 불리는 정성공 역시 일본인 어머니를 두고 있다는 점, 이들 ‘점’들을 이으면 뭔가 해답 ‘비스무리’한 것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또 한 가지 추가할 ‘점’이라면, 나가사키의 시카이로오나 카이라쿠엔은 물론 요코하마(橫浜)차이나타운 혹은 코오베(神戶)차이나타운의 대부분 중국 음식점에서 바이지우(白酒)를 팔지 않고 사오싱지우(紹興酒)만 판다는 점4, 그래서 우리 한국 ‘살람 영 맘에 안 든다 해’라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