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일본의 DVD 대여점에서 ‘한류 코너’가 큰 서가 2~3개를 차지한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본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영상 다시보기’ 에서도 웬만한 한국드라마는 시청할 수 있다. 이제 서점에서 한국 연예인을 표지모델로 삼은 잡지부터 한류전문 잡지가 놓인 진열대를 접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TV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제는 NHK뿐 아니라 민간 방송에서도 한국 드라마를 방송하고 있는 형편이다.
10년 전, 아니 5년 전의 일본에서라면 과연 누가 이러한 ‘한류’ 열풍을 예상하기나 하였을까? 사실 이러한 놀라움은 오래 전부터 한국에 관심을 가져온 이른바 한국통 일본인이나 재일교포라면 느껴 온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부문을 막론하고 이처럼 일본인 사이에서 한국이 널리 보급되고 관심 대상이 된 것은 아마 1945년 8.15 이후 처음이 아닐까 싶다. 물론 ‘한류’ 전에도 한국 대중문화는 조금씩 일본에 알려지기 시작했었다. <쉬리>(일본 개봉은 2000년)를 비롯한 한국영화 붐이 조용히 시작되었고,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는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을 고조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4년 전 봄에 필자는 공동연구를 함께 하던 재일교포 친구들과 “공저로 한국드라마에 관한 책을 내 볼까?” 하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일본에서 ‘한류’의 계기가 된 ‘겨울연가’가 2003년 4월 NHK 위성방송에서 처음 방송되기 전의 일이었다. 당시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드라마를 즐겨 보던 필자나, 케이블 TV등을 통해 한국드라마를 잘 알게 된 공동연구 멤버들과 한국드라마의 스토리나 배우를 재미있게 분석하면서 ‘한국드라마를 소개하는 책’에 대한 목차까지 구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일본에서 출판해 봤자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짓고 결국 출판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시 한일 공동제작 드라마가 가끔 방송되긴 했지만 한국드라마 자체가 일본 TV에서 방영되어 인기를 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일관계사, 특히 일제의 조선식민지지배사가 전공인 필자는 역사인식 문제를 포함하여 한일관계에서 정말 문제삼아야 할 것은 일본인의 한국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보다는 오히려 한국에 대해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라고 평소부터 강조해 왔다. 어떻게 하면 일본인이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는지가 우리 같은 사람에게 항상 큰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일본인들은 한국 연예인들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며 한국 드라마를 즐기게 되었고, ‘한류’는 하나의 장르로서 정착되고 있다.

물론 ‘한류’가 주목받기 시작한 때부터 의심쩍어하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았다. ‘한류’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의견이나, 일본 아줌마들의 취미에 불과해 한일역사문제 등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나왔다. 또한, 한국대중문화의 붐인 ‘한류’를 정치문제와 의도적으로 연결시켜 그 인기를 역사왜곡 선전에 이용하려는 ‘혐한류(嫌韓流, Anti-Hallyu)’까지 등장하였다.

지금까지 드라마나 일부 연예인 중심의 대중문화에 머물러 있는 ‘한류’의 파장이 문학, 예술, 학술 등 이른바 고급문화, 그리고 일본인의 역사인식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고양되기까지는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류’ 보급의 주요 동기가 대중을 대상으로 한 경제적 효과에 있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이다. ‘욘사마’ 팬인 일본인 여성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을 찾아가려는 것도, 대부분 단지 “욘사마를 좋아한다”는 마음에서인 것도 사실이다. 비록 ‘좋아한다’는 이 단순한 요인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싫어한다’라는 상태로 바뀔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교류, 그리고 문화와 문화의 교류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는 ‘좋아한다’라는 단순하고도 소박한 심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15년 전 이야기다. 어느 일본인 친구의 딸이 다니는 유치원에서 ‘한국의 날’을 만들어 유치원 아이들이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거나 파전을 만들어 먹는 행사를 한 적이 있다. 몇 명 다니던 재일한국인 아이들에 대해 일본 아이들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편견을 가지지 않게끔 유치원이 배려해서 실시한 기획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말한 바에 의하면, 아이들은 예쁜 한복을 입어보고 싶어하며 줄을 섰고, 파전도 맛있게 먹으면서 모든 아이들이 ‘한국이 좋아!’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친구와 같이 내린 결론은, 우리 같은 사람들은 ‘한일관계’라 하면 우선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지식부터 익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즐거운 경험’에서부터 접근토록 함으로써 오히려 한국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결국 더 성숙한 문제에까지 이르도록 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었다. 즐거운 경험이 있어야 후일에 ‘일본은 한국을 침략했다’는 무겁고 아픈 사실과 맞닥뜨리더라도 피하지 않고 대면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친구의 말은 필자에게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다.

필자는 일본인 학생이 한국을 찾아 독립기념관이나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이 사시는 ‘나눔의 집’ 방문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대해 배우는 여행에 몇 번 참가한 적이 있다. 거기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일제 침략의 실태나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직접 접하면서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게 창피하다. 나도 뭔가를 하고 싶다. 그러나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혹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때문에 너무 괴롭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자기가 가해자인 것을 자각하면서 살아나가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길이 너무 힘들어 사고하는 것 자체를 그쳐 버리는 젊은이도 많다. 진지하게 한일관계에 대해 고민하려는 사람일수록 그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한국을 ‘즐긴다’는 것을 경계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을 접한 일본인 중에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 더 넓은 이해나 교류를 향해 발전해 나가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경제적 효과’ 이상을 바라보는 ‘한류’의 또 다른 미래가 아닐까?

작년 10월 필자가 속해 있는 리쓰메이칸(立命館)대학 코리아연구센터에서는 한국영화제를 개최한 적이 있다. 한류붐에 부응하여 작품성이 높은 영화를 상영하거나 한국영화에 관한 강연 혹은 심포지엄을 실시함으로써, 일본인 학생과 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한국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제1회 행사에서 우리는 한국의 영화배우 문소리를 초청하여 그가 출연한 영화를 상영하는 한편, 한일 관계자들을 초빙하여 강연과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평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계속되었는데도 불구하고, 5일 동안 열린 이 영화제에는 무려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관객의 반 이상은 이른바 ‘한류’ 팬으로서의 30~50대 주부들이었다. 그런데 그 여성들의 많은 수가 영화뿐 아니라 전문가들이 이야기를 나눈 강연회에도 참석하여 어두운 회장에서 메모까지 하면서 열심히 경청하였다. 당시 참석하였던 한국인 교수는 그 진지하고도 열심인 태도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아줌마’들은 결코 거품의 환상에서 부유하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이는 ‘한류’에 빠진 층으로 주로 30~50대 여성만을 꼽기도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드러내지는 않지만 ‘한류’ 팬인 일본인 남성도 실은 꽤 있다. 필자는 한국에 관심이 하나도 없었던 한 남자 교수가 “지금 대장금에 빠져서 열심히 보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몇 번 들었다. 또한 어느 50대 남자 교수는 <겨울연가>를 계기로 열성적인 최지우 팬이 되어, 휴대폰 고리를 비롯해 자기 물건 모두를 최지우 사진이 붙어 있는 것으로 바꾸고, “언젠가 최지우를 만나고 싶다”며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평소에는 조용하게 지내면서, 연구에 대해 진지하고도 논리적으로 말하는 그가 일단 최지우가 화제로 오르기만 하면 어느새 행복한 얼굴을 한 채 그녀에 대한 견해를 열심히  피력한다. 최지우가 얼마나 예쁜지, 최지우의 작품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등등걖걖걖. 최지우를 계기로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진 그는 지금, 자기가 속한 학부와 한국 대학의 국제교류나 공동연구를 열심히 추진하고 있다. 이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에서 우리는 미래 한류의 싹을 본다.

한국문화의 좋은 점을 일본에서 알리려 열심히 활동해 온 일본 여배우 쿠로다 후쿠미(黑田福美)는 “내가 10년 이상 열심히 해온 것 이상을 ‘한류’가 너무나 쉽게 해버렸습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10년 전, 5년 전과는 달리 지금 일본에서 한국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결코 특이한 일이 아니다. 또 그만큼 ‘한류’의 거품도 빠지고 있고, ‘한류’가 상업적으로 후퇴하는 현상을 보이는 것도 부인하기 힘들다. 원래 붐이라는 것은 대개 그런 법이니 유달리 생각할 것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붐’이 지난 뒤 남는 것들에, 거품이 꺼진 뒤 고이는 진국에 주목해야 한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한국에 열중했다’는 경험은 경제행위를 넘어 애정에 기반한 한국이해의 작은 ‘씨’를 일본인들 내면에 남겼다 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말하면 필자가 너무 낙관적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