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동성(山東省) 린이시(臨沂市)는 한중문화관 개관(2005.4.16)에 맞춰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07~365) 석상을 인천에 기증했다. 한국에 왕희지 서예를 처음 소개한 것은 신라시대 당나라 유학생들이었다. 무려 1천 년이나 된 묵향(墨香)이 오늘에 다시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산동과 인천이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민 1세기의 산동 화교(華僑)들이 보여주듯 인천은 해납백천(海納百川)바다는 모든 강을 받아들인다는 뜻의 ‘열린’ 도시다. 왕희지는 인천과 린이 두 지방을 문화적으로 이어주는 고리가 된 셈이다.

산동성 동남쪽에 위치한 린이는 오래전부터 청산녹수(靑山綠水)와 문인묵객(文人墨客)의 절묘한 조화로 명성을 얻어왔다. 공자(孔子)는 동산(東山)지금의 린이 멍산(蒙山) 정상에 올라 노(魯)나라가 작게 보인다 하였고 그의 제자 증석(曾晳)은 인생의 지향을 묻는 스승의 물음에 “기수에서 목욕하고 노래하며 돌아오는 것(浴沂詠歸)”이라 답한 바 있다. 공자의 동산과 증석의 기수는 바로 린이의 생태적 활력과 인문적 향기를 살리는 천혜의 자연조건이다.

린이라는 이름은 글자 그대로 기수[沂]에 임[臨]해 있다는 뜻이다. 춘추전국시대부터 군사요충지로 제(齊)와 노나라에 속했던 린이지역은 진시황의 군현제(郡縣制)로 낭야군(琅揶郡)과 담군(    郡)에 종속되었다. 역사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지명도 여러 차례 변모했는데 낭야라는 이름으로 오랫동안 불리다 1914년 린이시로 굳어져 인구 1천1백만의 산동성 최대 신흥도시로 성장했다. 린이는 베이징과 상하이를 연결하는 교통 중심지다. 지리적 이점을 경제성장의 발판으로 삼아 전통과 현대가 함께 숨 쉬는 문화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초본 죽간판(竹簡版)을 비롯한 유물과 제갈량(諸葛亮, 181~234), 왕희지 등의 인물은 린이의 대표적 자랑거리다. 특히 왕희지에 대한 자긍심으로 뭉친 린이시는 “서성의 고향, 서법의 성지(書聖故里, 書法聖地)”라는 문화도시 조성목표를 세워 2003년부터 매년 9월 4일 중국린이서성문화절(中國臨沂書聖文化節) 같은 대형 국제문화행사를 열고 있다. 항일투쟁과 문화혁명으로 파괴됐다가 2003년 복원이 마무리된 왕희지 생가도 정자와 누각, 푸른 연못과 아치형 교각이 어우러진 숲 정원으로 세상 사람들과 새로운 만남을 가졌다.

왕희지는 동진(東晉, 317~420)시대의 서예가로 자는 일소(逸小), 호는 담재(澹齋)다. 우군장군(右軍將軍) 벼슬을 했으므로 흔히 왕우군이라고도 한다. 그의 시대는 내란과 외침으로 얼룩졌다. 10년 남짓 린이에서 소년시절을 보냈고, 313년 난리를 피해 건강(建康)지금의 난징(南京)에 이주했다가 회계(會稽) 지금의 저쟝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서 살았다. 그는 51세에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더불어 은일했다. 회계의 난정(蘭亭)에서 41명의 청담명사(淸淡名士)와 어울리다 풍경과 시흥에 취해 즉흥 창작한 <난정서(蘭亭序)>는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라는 미명(美名)을 얻을 만큼 후세 행서의 전범이 되었다. 왕씨가문의 서예는 왕희지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고 그의 후손들 또한 서단에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아들 왕헌지(王獻之)는 아버지의 필법을 이어받아 성가(成家)했는데 훗날 사람들이 이들 부자를 이왕(二王)이라 별칭할 정도였다.

후대로 내려오면서 왕희지의 서예는 더욱 빛난다.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왕희지에 대한 흠모와 추앙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일본은 당나라 때 전래된 왕희지의 진적(眞迹) 『상난첩(喪亂帖)』을 1천년 넘게 국보로 수장해 왔다. 한국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는 왕희지의 서예에 꼿꼿한 풍골(風骨)이 감도는 개성을 더해 독창적인 한석봉체를 창안했다. 후세가 왕희지를 기리는 이유는 단지 글씨의 표면적 조형미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붓끝에서 되살아난 자연과 인간의 조화는 동아시아의 전통철학, 미학사상과 궤를 같이한다. 왕희지의 서예는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공감과 소통의 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1천 년 전부터 들리기 시작했던 이 공명음이 아직도 울리고 있다. 2005년 9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린이문화전에서는 ‘중국명인과 지방문화’라는 주제로 왕희지를 재조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린이시 지방문화 ‘홍보대사’ 왕희지의 첫 한국 상륙지는 인천이다.

산동과 인천은 황해를 통해 교류했다. 백제는 능허대(凌虛臺) 아래 한나루를 출발하여 산동반도에 이르는 등주항로(登州航路)를 개발했다. 역사의 풍파 속에서도 등주항로는 인천과 산동을 연결하는 경제적 동맥으로 시종 활약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인천은 한반도의 배꼽이자 황해의 허브로서 전략적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었다. 개항(1883)에 맞춰 중국인들이 인천에 정착했다. 이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산동출신 화상들은 경제교류뿐만 아니라 인천 땅에 산동문화의 숨결을 불어넣기도 했다. 한중수교(1992) 이래, 한ㆍ중 관계는 새로운 부흥기를 맞이했다. 한류열풍의 자극을 받으면서 인천과 산동은 2004년 정식으로 우호합작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인천과 린이 간 접촉이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2003년 6월 린이문화교류단은 인천시 중구청의 초대로 제3회 실크로드문화축제에 참가했다. 이는 인천시민들에게 린이시의 전통문화를 본격적으로 알릴 기회가 되었다. 2005년 5월에는 왕희지 석상을 기증한 린이시장 대표단이 서울 등지를 방문해 무역활동을 개시하고 린이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인천은 천혜의 지정학적 조건에 힘입어 외부세계와 적극적으로 교류함으로써 다양한 문화를 배양해온 곳이다. 린이는 아직 산동지방의 다른 연해(沿海)도시에 비해 낯선 편이다. 그러나 인천이 연해항구도시라면 린이는 ‘내륙의 항구도시’다. 거점도시 특유의 개방적 문화전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앞으로 각별한 상호참조가 기대된다. 왕희지를 통해 린이를 만남으로써 우리는 인천-산동 간 교류가 연해로부터 내륙까지 확대되어 두 지방의 발전이 한묵유향(翰墨留香)글과 글씨가 영원한 향기를 남긴다는 뜻 처럼 지속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