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일본어 독해력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마 야스카쓰(松島泰勝)의 『류우큐우의 자치(琉球の自治)』를 단숨에 읽었다. 이제 비로소 오키나와(沖繩), 아니 류우큐우를 제대로 대면했다는 느낌이 어렴풋하나마 명료해진다.
사실 올초 서남포럼에서 주최한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동아시아 각국 또는 각지에 대한 학지(學知)를 바탕으로 월경(越境)하는 연대(連帶)의 틀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국의 동아시아론을 개척해온 서남포럼은 올해, 기존의 한중일 중심을 반성하면서, 오키나와ㆍ타이완ㆍ호찌민시옛 사이공를 차례로 순회하는 현장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그 첫 방문지가 오키나와였다. 비록 4박5일의 짧은 일정(2.25~3.1)이었지만, 류우큐우왕국의 수부(首府) 슈리죠오(首里城)에서 미군기지 반대투쟁의 현장 헤노코(邊野古)까지 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를 요점적으로 개관한 탐방으로 나는 아름다운 외관 속에 감초인 섬의 분노를 실감했던 것이다. 방문을 마무리하는 집담회 또한 유익했다. ‘제국의 교차로에서 탈제국을 꿈꾸다’를 주제로 내걸고 오키나와를 축으로 일본과 한국, 그리고 동아시아를 다시 점검한 이 토론회를 통해 서구주의의 횡행 속에 억압된 동아시아를 호출하는 작업이 그 내부의 위계(位階)를 근본적으로 의식하지 못한다면 다른 억압으로 전환될 수도 있다는 점을 좀더 분명히 확인했던 터다.

사태의 복잡성에 대한 인식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로 말미암아 오키나와는 내게 더욱 문제적으로 되었다. 미군기지를 미끼로 하는 개발이 섬의 미래가 아닌 것만은 확실한데 대안이 답답했다. 과연 오키나와가 개발이라는 근대화의 신화로부터 탈각할 수 있을까? 모든 살아있는 장소를 지우고 텅빈 공간으로 획일화하는 이 흉흉한 자본의 진군이 오키나와에 대한 장악을 더욱 강화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일 터인데, 동북아와 동남아를 잇는 징검다리요 태평양과 대륙을 매개하는 교차로에 위치한 오키나와는 전략적 요충지다. 미국과 일본이 과연 이런 오키나와를 풀어줄까? 그리고 주민들이 이미 개발의 독을 마셨다는 점 또한 유의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리!’ 탈향자(脫鄕者)들의 근원적 유동성은 근대적 경험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고향상실감은 꼭 외재적인 것이 아니다. “마음은 제 고향 지니지 않고/ 머언 항구로 떠도는 구름.”정지용,「고향」,1932 근대인은 스스로 고향을 버렸다. 외부의 압박과 내부의 분해가 동시에 작동하면서 점차 저항력이 약화되는, 아니 저항마저 개발과 동거하는 오키나와의 현실 앞에서 나는 우울했다.

『류우큐우의 자치』는 나의 우울을 치료한 한 줄기 청신한 바람이었다. 이 책의 미덕은 오키나와를 제국의 눈 또는 타자의 시선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파악하는 그 곡진한 일관성에 있을 것인데, 그는 먼저 이름을 바룬다(正名). ‘오키나와를 류우큐우코(琉球弧)로 부르자.’ 오키나와를 류우큐우코로 새로이 명명함으로써 그는 1609년 사쓰마한(薩摩藩)의 침략으로 류우큐우왕국에서 분리된 후 지금까지 카고시마현(鹿兒島縣)에 소속된 아마미제도(奄美諸島, 북류우큐우)를 포괄한 하나의 류우큐우를 상상한다.211면 류우큐우도 한반도처럼 분단된 땅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면서 분단의 극복을 통한 독자적인 해상왕국 류우큐우의 기억을 21세기 오키나와의 미래를 여는 내적 통합의 종요로운 자산으로 삼으려는 그의 견해에 나는 동병상련(同病相憐)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류우큐우왕국의 통일과정에서 치러진 내적 억압을 간과하지 않는다. 류우큐우왕국이 아마미제도를 군사적으로 제압하여 최종적으로 자신의 지배 아래 거둔 해가 1571년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류우큐우코라는 이름을 제안한 그의 사려에 감탄하게 된다. 아디시피 오키나와는 그 중심이지만 류우큐우열도를 구성하는 수많은 섬들 가운데 하나다. 그는 바로 류우큐우왕국시대의 오키나와섬 중심주의를 해체하고 자치를 이상으로 한 “평등한 섬의 관계”275면에 바탕한 류우큐우코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류우큐우를 분단하고 지배한 제국들의 대국주의에 반대하는 그는 류우큐우 안의 소중심주의도 경계한다. 소중심주의는 표면적으로는 대국주의와 대립적이지만 실제로는 그 복제이기 때문에 대국주의와 내통하기 십상이다. 제휴하고 있는 대국주의와 소중심주의를 함께 해체하는 통찰이야말로 류우큐우코의 자치를 실현하는 진정한 바탕일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단순한 내재주의자는 아니다. 내재적 발전론은 물론 아름다운 이상이지만 일국사회주의(一國社會主義)건 그보다 더 근원적인 농업사회주의론이건 세계화라는 텍스트 바깥을 좀체 상상하기 어려운 요즘의 현실을 감안할 때 그야말로 유토피아적 몽상에 떨어지기 쉽다. 이 점에서 내재주의는 세계화라는 조건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의 내재적 발전론을 아시아네트워크의 다양한 구축으로 보완한다.269면 그는 먼저 류우큐우와 중국의 관계에 주목한다. 명(明)의 광무제(光武帝)가 류우큐우에 이주시킨 중국인들이 쿠메무라(久米村)에 집단거주하면서 명과의 외교통상을 맡았고, 그 중 우수한 인물들이 베이징이나 난징의 국자감(國子監)에 유학한 뒤 귀국하여 류우큐우왕국의 인재들을 교육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흥미롭다.216~7면 연전(年前)에 베이징 국자감을 방문했을 때 류우큐우학사라는 유학생 기숙사가 따로 마련돼 있는 배치도를 보면서 떠오른 의문이 이제야 확연히 풀린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지금도 오키나와 안팎의 화인(華人)네트워크의 축으로 활동한다니, 류우큐우코의 중요한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또한 타이완에 더욱 유의한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폭발한 청일전쟁(1894)의 결과 타이완이 일본의 식민지로 된 이후, 타이완인과 오키나와인의 교류가 이주노동의 형태로 그토록 활발했다는 점 또한 새로웠다.220~1면 사실 국경이 가로질러서 그렇지 오키나와와 타이완은 생활권과 문화권을 공유하는 바로 이웃이 아닌가? 그렇다고 저자가 류우큐우코를 친중국, 친타이완으로 인도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류우큐우코의 자치를 위해서 일본 미국 중국 대만을 독자적인 입장에서 활용하려는 구상인 것이다.223면

그런데 저자의 네트워크 구도에서 한국에 대한 배려가 상대적으로 약한 게 아쉽다. 오키나와와 한국은 내면적으로는 운명처럼 얽혀있다. 사쓰마한의 류우큐우침략(1609)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침략(1599) 이후 토쿠가와바쿠후(德川幕府)의 전후질서 재편 과정의 일환이었고, ‘류우큐우처분’(1879)은 메이지정부의 조선 강제개국(1876)과 연동된다. 이뿐인가. 평화기념자료관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듯이 오키나와전투(1945)에서 수많은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반공포위망의 거점으로서 오키나와와 한국은 한국전쟁(1950~1953)과 베트남전쟁(1960~1975)에 직간접적으로 묶였다. 탈냉전 이후 동아시아 미군 재배치 과정에서 오키나와와 한국 모두 미군기지 이전문제로 몸살을 잃고 있는 중이다. 기억할 일이 또 있다. 김정한(金廷漢)의 단편 「오키나와에서 온 편지」(1977)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중일수교(1972)로 타이완인을 대신할 노동력으로 한국 민중의 딸들이 사탕수수밭 계절노동자로 대거 오키나와에 투입되었던 것이다.최원식,「오키나와에 온 까닭」, 『서남포럼오키나와토론집』, 2007 이처럼 연면한 오키나와와 한국의 연계를 생각할 때, 동아시아 네트워크 속에서 평화통일의 길을 실험하는 한국과, 류우큐우코의 자치를 모색하는 오키나와가 그 동안의 상호소외를 넘어서는 집합적 대화를 본격적으로 시도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류우큐우코의 자치라는 새로운 발상을 제안한 저자에게 한국의 시민으로서 깊이 감사한다. 모쪼록 내재적 발전론과 아시아네트워크 사이에 존재하는 작은 모순을 함께 해결할 지혜의 나눔 속에서, 동아시아에 진정한 평화의 네트워크을 구축할 토대가 오키나와에서 하루빨리 마련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