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의 해상 교차로이자 ‘세계평화의 섬(2005년 선포)’으로 발돋움한 제주가 서귀포 해군기지 찬반논란으로 뒤숭숭하다. 민주적 의사결정 여부나 도민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도 소홀히 다룰 수 없지만 동아시아 역내에서 가뜩이나 고조되고 있는 미겵?일 3국의 군비경쟁을 부추기게 될 수도 있으니 신중히 접근할 문제다. 물론 일각에서 제기된 ‘제주 불바다’설이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제 전진기지화 우려는 과민반응이기 쉽다. 오히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논란들이 우리의 오랜 내륙 편향을 일정부분 해체하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북핵사태와 같은 남북문제 해결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동북아평화체제가 순순히 진전하리라 기대한다면 성급한 낙관이 아닐까? 동아시아 해양 ‘퍼즐’을 통째 읽는 눈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때마침 국립제주박물관은 특별전 <탐라(耽羅)와 유구왕국(琉球王國)>을 열었다. 작년 10월 개최한 <오키나와 조개제품을 통한 선사시대 문화의 재발견>에 이은 두번째 해양문물교류전이다. 제주가 동북아 3국의 완충지대라면 오키나와(沖繩)옛 류우큐우(琉球)왕국는 동북아와 미주, 동남아 세 지역이 접속하는 요충지다. 한반도의 통일시대 진입으로 이제는 제주 또한 느긋한 후방이 아니다. 따라서 제주가 오키나와에 자신을 조회해볼 이유는 어느 모로나 충분하다.

이번 전시는 큐우슈우(九州)국립박물관과 오키나와현교육위원회, 오키나와현립매장문화재센터, 나하(那覇)역사박물관, 난죠오(南城)시교육위원회 등의 소장유물 출품으로 이뤄졌다. 특히 슈리죠오(首里城)류우큐우 왕성 내 출토 도자기 등은 최초의 일본 국외 전시여서 그 의의가 더욱 값지다. 그러나 류우큐우(오키나와)-한반도 관계사 규명에 가장 획기적으로 기여할 전시품은 바로 우라소에요오도레(浦添ようどれ)1에서 출토된 고려계 기와들이다. 이들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등에 새겨진 ‘계유년고려장인와장조(癸酉年高麗匠人瓦匠造)’ 즉, ‘계유년에 고려 기와장이 만들었다’는 명문 때문이다. 이 계유년은 언제였을까? 오키나와국제대학 교수 우에하라 시즈카(上原靜)에 의하면 1273년설이 현재로선 유력하다. 그런데 고려인 와장들은 왜 류우큐우로 건너가 이 기와를 만들었던 것일까? 여기서 놀라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오키나와의 류우큐우 유적지에서 발굴된 고려계 기와는 삼별초(三別抄) 정부의 2차 주둔지였던 진도 용장산성(龍藏山城) 출토 기와와 동일 형태이며 이는 곧 삼별초가 최후 보루였던 제주에서마저 여몽연합군(麗蒙聯合軍)에 밀려나자 류우큐우로 패주했음을 증명한다는 것이다.

국내 한 유력일간지는 이 가설을 근거로 고려 삼별초가 류우큐우왕국의 기초를 세웠다고 보도했다.2 이 전시가 한반도와 류우큐우 간 문화교류의 실증사례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12세기 이래 농업생산의 비약적 발전으로 기틀을 잡은 류우큐우는 14세기 들어 중국과 책봉관계를 맺고 조공무역을 개시함으로써 독자적 왕조체제를 성립하게 된다. 그러므로 류우큐우왕국의 성립과 번영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명나라로부터 중국제품의 무역독점권을 부여받은 류우큐우가 15세기에 대교역시대를 맞았다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한 참고가 된다. 우리가 삼별초의 류우큐우왕국 기초설에 솔깃하게 된 것은 문명의 발신지를 자처하고 싶은 고질적 대국 콤플렉스의 소산이 아닐지.

이에 관해 이번 교류전이 던지는 메시지는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류우큐우왕국의 흥망성쇠에 미친 한반도의 영향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240여 점에 달하는 풍부한 유물자료의 제시를 통해 두 지역이 역사적 상호참조 대상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고 한반도와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중계하며 번성하던 류우큐우는 이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 멸망의 길을 걸었다. 포르투갈 등 서양의 도착으로 빠르게 강대국화한 일본은 대륙침략의 발판으로 조선과 류우큐우를 점지했던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인한 패전 손실분을 만회하려는 사쓰마한(薩摩藩)의 침략(1609)으로 결국 중국과 일본의 양속관계(兩屬關係)에 놓인 류우큐우는 서양근대를 일찌감치 흡수한 메이지(明治)정부의 이른바 류우큐우처분(1879)과 청일전쟁(1894~1895) 도발로 남은 운명마저 다하고 만다.
동아시아 해상에서 세력재편이 일어나거나 힘의 균형이 깨질 때마다 한반도가 크게 동요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리고 사쓰마한의 침략 이래 친청파와 친일파로 분열, 왕국의 멸망을 부채질한 류우큐우 지배층의 무지도 아프게 새기자. 한반도 내부통합을 밑바탕으로 지혜로운 균형자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대국 콤플렉스에 들려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할 것인가? 제주의 해군기지 배치 계획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 지금, 제주와 오키나와라는 동아시아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