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에 가까운 연평균 성장률, 시장 점유율 60%, 100%에 가까운 가파른 수출 증가율,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서 연이은 수상, 아시아를 휩쓰는 이른바 한류열풍. 2005년까지의 한국영화 성적표다. 2006년 한국영화는 <왕의 남자>와 <괴물> 등 사상 최고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두 편이나 있었음도 불구하고 전체 제작비 4천422억 원의 22%인 1천 억 손실, 한 해 개봉작 중 82%가 적자, 전년대비 해외수출 68.7% 급감. 올해는 어떨까? 상반기 기준 한국영화 관객 수 전년대비 35% 감소, 한국영화 점유율 최근 6년 중 최저인 47.3%, 국내 3대 극장체인 중 하나인 메가박스 해외매각. 지표로만 보면 붕괴 수준이다.

자본은 몰가치적이다. 수익이 생기면 쫓아내도 들러붙고 손실이 생기면 바지가랑이 잡고 매달려도 뿌리치는 게 자본이다. 한해 전체 투자액의 4분의 1을 날려먹고도 위기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산업에 사명감을 갖고 버틸 자본은 없다. 이런 상황이 일정기간 계속된다면 남아있는 투자자본마저 대탈출을 시도할 것이고, 그러면 한국영화산업은 무너진다. 도대체 한국영화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금 한국영화산업은 아주 고약한 구조적 위기에 빠져 있다. 한국영화의 위기론이야 늘 있어왔지만 대개 한두 가지의 원인이 거론되어왔던 것에 비해, 지금은 스크린쿼터(screen quota) 축소라는 초대형 악재 외에도 불법복제로 인한 부가판권 시장의 붕괴, 국내 극장관객 성장포화, 수출 급감, 급격한 제작비 상승 등 대여섯 개의 원인이 복합적으로 위기상황을 만들고 있다.

작년 초 한미FTA 협상 선결조건으로 미국에 헌납한 스크린쿼터 축소는 한국영화산업 위기의 강력한 신호탄이었다. ‘경쟁을 통한 경쟁력 향상’이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무대뽀’식 시장주의 철학으로 시작한 한미FTA 협상 결과가 우리 사회 전체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지만 영화산업은 이미 반쯤 죽은 상태다. 작년 노대통령은 이제 막 스타가 된 20대 중반의 젊은 배우를 청와대로 불러놓고 물었다. “한국영화계는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질문의 방식과 장소와 상대가 공정하지 못했지만 무엇보다 영화산업에 대한 몰이해가 안타깝다.

영화는 다른 상품과 달리 초기 투입 비용이 상품 경쟁력을 좌우한다. 즉 3천억을 들여 만든 영화든 30억을 들여서 만든 영화든 관객은 똑같이 7천 원을 주고 본다. 영화 <킹콩King Kong>(2005) 한 편의 제작비가 1년 동안 제작되는 한국영화 전체 제작비와 맞먹는 상황에서 경쟁력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우습다.
대당 3천억의 최신예 F-22스텔스(stealth) 전투기에 맞서 30억짜리 구형 헬리콥터로 자신 있게 싸우라는 주장은 뭘 모르거나, 알면서도 부하들을 사지에 내모는 부도덕한 지휘관이나 할 소리다. 편당 1천억에서 많게는 수천억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헐리우드영화 중 올해 한국에서 상영한 영화만 살펴보더라도 <스파이더맨3>, <캐러비안의 해적3>, <슈렉3>, <오션스13>, <트랜스포머>, <해리포터4>, <다이하드4>, <판타스틱4> 등 일일이 열거하기도 숨차다.

서사의 설득력을 바탕으로 한 상업영화의 특성상 제작비 규모가 작품의 완성도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같은 값이면 볼거리 있는 영화에 관객들이 몰리는 게 현실이다. 스크린쿼터의 부담이 없어진 극장들이 앞다투어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극장을 도배하는 동안, 임권택(林權澤) 감독의 100번째 영화로 주목을 받았던 <천년학(千年鶴)>(2007)은 평단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관객 13만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긴 채 2주 만에 대부분의 극장에서 밀려났다.

과거 몇 년간 한국영화가 헐리우드영화에 대해 거두었던 승리는 스크린쿼터라는 최소한의 안전판으로 제작ㆍ배급ㆍ유통시스템을 지키려는 힘겨운 싸움의 산물이었다. 스크린쿼터는 우리 사회의 문화다양성을 지키는 가치 있는 제도일 뿐만 아니라 영화산업의 존립기반이었다. 이를 정부가 앞장서 반 토막 냈던 것이고, 이제 우리는 그 후유증을 확인하고 있다.

영화산업의 수입 구성은 비디오, DVD, 방송 방영권 등 부가판권 수입이 극장 수입보다 크거나 같아야 정상이다. 그러나 한국은 수입의 80%를 극장에 의존하는 지극히 왜곡된 구조다. 부가판권 수입에 가장 큰 기여를 했던 비디오 대여점은 한때 4만 개 가까이 되었으나 이젠 겨우 4천여 개만 남았고, 이마저도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이런 현상은 불법복제 외에 그 이유를 찾기 어렵다. 1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은 영화의 주요 소비층인 동시에 인터넷에  밝은 네티즌들이기도 하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잘 발달된 인터넷 환경에서 윤리의식이 결여된 온라인업체들의 서비스를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법복제에 길들여져 결과적으로 영화산업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 한국영화의 불법복제 피해 규모는 분석방식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2천억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 피해를 반만 줄여도 한국영화는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한때 아시아의 모든 관객들이 한국 스타들만 쳐다보며 열광하는 것처럼 보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류’라는 말조차 들먹이기 쑥스러울 지경이다. 스타만 캐스팅되면 제작단계에서 입도선매로 한국영화를 사들이던 일본이 이제는 한류가 끝났다며 구매를 거부한다. 결국 일본의 한국영화 수입은 작년 한해만 82.8% 감소했다.
자본은 수익성 위기에 빠지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투자를 원한다. 작품성이 높은 다양하고 독창적인 시나리오보다는 관객들이 즐겨 소비하는 ‘뻔한’ 장르영화나 티켓팅 파워가 있을 것 같은 스타캐스팅 작품에 투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완성도가 떨어지는 상투적 이야기가 재생산되면서 관객의 외면을 받게 되고 이것은 수익성 감소로 이어져 악순환이 계속된다.

영화의 위기는 영화만의 위기로 끝나지 않는다. 자본·노동 중심에서 지식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산업 환경을 고려할 때 영화산업은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금은 ITㆍBT산업이 각광받고 있지만, 앞으로는 문화산업이 가장 중요한 ‘먹이산업’으로 될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이 공감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에 따라 문화산업의 중심은 영상이 될 것이고, 영화는 그 견인차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모든 장르의 예술과 기술이 결집된 영화산업이야말로 21세기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어갈 문화콘텐츠 산업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것은 한국영화계 모두의 책임이다. 한국영화산업의 참여자들은 이 위기상황을 공유하고, 수익성 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과도하게 늘어난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스타급 배우들이 스스로 몸값을 낮추고 관련 업체들도 고통분담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디지털 환경에 맞는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여 붕괴된 부가판권 시장을 회복하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불법복제를 통하지 않더라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쉽게 인터넷에서 좋은 화질의 영화를 쉽게 내려받아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또한 지금까지 영화제작의 중심적 역할을 하면서도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영화 스텝들의 처우개선에 영화계가 팔을 걷어붙치고 있다. 한미FTA 비준을 막아 스크린쿼터를 회복시키는 것도 과제지만, 무엇보다 새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볼만한’ 영화로 만들어 관객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위기 극복의 첫 단추를 꿰는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