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민청학련(民靑學聯) 사건으로 갇혀 있을 때의 일이다. 전혀 면회도 안 되던 상황에서 군사재판을 받으러 오가던 길에 차단된 차창 틈으로 평온하게 통행하는 사람들을 훔쳐보다가 뭉클 솟아오른 상념이 있었다. 저렇게 평안한 일상 속에 나의 고난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지금 내 마음의 이런 울림 따위가 거대한 역사 속에서 흔적이라도 남을 것인가. 당시 지배적인 역사서술은 구조와 제도로 엮인 거대역사였기에 20대 초반 청년의 그 작은 경험세계는 문학을 통해서나 포착될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역사서술에서는 바로 그런 미시적 세계의 재현이 오히려 주류가 되다시피 했다. 생활사의 유행이 바로 그 증거다.

1960~1970년대 서민의 생활세계를 재현한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을 참관하면서 위의 경험이 먼저 떠올랐다. 달동네 상점, 여럿이 사용하는 공간, 생활구역, 삶의 편린들 및 실존인물들로 구성된 상설전시관의 전시물들이 나이 든 이에게는 추억의 대상이요 어린이나 젊은이에게는 ‘외국’처럼 신기한 대상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겐 철거당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생활한 주인공들의 마음의 울림이 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요즈음 박물관은 유물전시 기능을 넘어 일반대중을 일깨우는 사회교육장의 기능을 중시하는데, 바로 이 점에서 달동네박물관은 작지만 탄탄한 사회공공기관으로 제 구실을 하고 있다. 1971년 11월 어느 하루의 저녁 6시를 실감할 수 있도록 30분마다 전기를 끈다든가, 교복 입어보기와 연탄불 갈아보기 체험코너, 70년대 상품판매대 등을 마련하여 관람객에게 감성으로 그 시대를 이해하도록 돕는 세심한 상설전시 공간구성이 특히 돋보인다.
과거에 산 사람들과의 공감적 관계를 맺게 해주는 ‘일체화로서의 역사’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공간은 기획전시실. 이번 특별기획전시는 <이광환 일기>다. 바로 수도국산에서 한평생을 산 전기공 이광환(1926~2000)씨의 1945년부터 1970년까지의 일상 기록과 관련된 유물이 함께 전시된 그곳에서 나는 미시사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회충약 복용, 산아제한방법으로 공급받은 콘돔, 봉급내역, 물건 가격 등에 관한 그 섬세한 기록은 경이롭다. 사교댄스에 심취하고 열성적인 영화팬인 그가 1946년에 본 영화겳П莫歡颱?앞에서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목은 물론이고 입장료와 주연배우들까지 비교표 안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가 꼼꼼히 기록한 일상은 그 시대의 정치 변동의 생생함 또는 이면을 보여주는 (희귀한) 창이기도 하다. 몇 대목만 옮겨보자.

1945년 9월 8일 토요일 구름 낀 날 미군이 인천항에 상륙했는데, 그들을 환영하는 행렬이 재판소 앞을 지날 때 인천경찰서에서 경관이 나와 권총으로 쏘아 부상자가 나고 환영은 중지되었다는 묘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던 내용이다. 9월 9일이 돼서야 조선인 경관이 들어섰다고 한다.
1945년 12월 31일부터 1946년 1월 3일까지 계속 되는 미쏘신탁통치 반대시위 참여 기록은 “여기서도 저기서도 반탁운동을 하자는 등 애국심이 끓어올라 어쩔 줄을 모르”는 서민들의 심정을 담고 있다. 이에 비해 자유당 시절의 반공데모는 강제동원된 것임이 드러난다. 1955년 8월 24일부터 시작된 적성감시위원회축출운동 데모는 각 동별로 동원된 것이다. 그는 8월 30일 같은 데모에 동원돼 철야하게 된 노모가 감기 드실까봐 염려한다.

1969년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의 3선을 위한 개헌 국민투표일 투표장에는 여당인 공화당 참관인만 있고 야당인 신민당 참관인은 없어 이상하였다는 사실 기록만으로도 그의 엄중한 역사평가가 돋보인다.
이렇듯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이 재현한 생활세계에 심취하던 나는 그 무렵 살던 인천의 또 하나의 달동네, 화수동 278번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살던 집은 이미 연립주택으로 개조돼버렸다. 이제 내 마음의 박물관에 보존될 차례이다. 그런데 그곳의 일부는 아직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박물관이 아닌 현실의 달동네 그 좁디좁은 골목을 돌면서 잠시의 반가움에 이어 긴 안쓰러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