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병을 달래는 데는 음식만한 것이 없다. 잠깐이라도 외국에 나가본 사람이라면 더 뼈저리게 느꼈을 법 하다. 하루 이틀은 어찌어찌 견뎌도 사흘째부터는 김치, 고추장, 된장찌개 따위가 눈앞에 아른거린다. 운 좋게 한국식당을 찾아, 어설프게나마 흉내 낸 김치라도 한입 베어 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머릿속으론 이미 고국에 도착해 가족과 함께 밥상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있다. 음식의 힘이다.
고향을 아주 잠시 떠나온 이들도 이럴진대, 고향으로 가는 길이 아예 가로막힌 이들은 오죽할까. 수십 년 동안 가슴 속 켜켜이 쌓여온 그리움을 달래는 데 고향 음식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상상하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고향음식은 역시 평양냉면이다. 고향이 굳이 평안도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투박하면서도 메밀 향내 그윽한 면발을 한입 가득 물면 백발성성한 노인은 어느새 앳된 소년 소녀 시절로 되돌아간다. 따끈한 아랫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엄마가 만들어주신 냉면을 먹으며 이를 딱딱 부딪치던 그 꼬마로 변한다. 이들에게 평양냉면은 시공간을 건너 고향으로 가는 기차표와도 같다.

옛 문헌을 찾아보면, 조선시대부터 우리 조상은 냉면을 즐겼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에 나온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메밀국수에 무김치와 배추김치를 넣고 그 위에 돼지고기를 얹은 것을 냉면이라 하고, 잡채와 배, 밥, 쇠고기, 돼지고기 썬 것과 기름, 간장을 메밀국수에 섞은 것을 골동면이라 한다. 관서지방의 냉면, 그중 평양냉면의 맛이 가히 일품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이 지역에서 많이 나는 메밀로 겨울철에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집집마다 국수틀을 갖춰놓고 메밀가루에 약간의 전분을 섞어 면을 뽑았다. 100% 메밀로만 하면 찰기가 없어 반죽이 잘 뭉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뽑은 면을 삶아낸 뒤, 보통은 집에 흔히 있는 동치미국물에, 잔치 때나 되면 꿩, 돼지, 쇠고기 따위를 고아 식힌 육수에 말아 먹었다. 평양냉면의 기원이다.

함경도 지방에선 감자 전분으로 질긴 국수를 만들어 매콤한 양념장에 비벼 먹었다. 인근 어장에서 잡은 가자미, 홍어 따위를 넣어 먹기도 했다. 비빔냉면, 회냉면의 기원이다. 남쪽에선 보통 함흥냉면이라 부른다. 그러나 정작 이북에선 이를 냉면이라 부르지 않는다. 함흥 농마국수, 회국수라 부를 따름이다. 이북에서 냉면 하면 으레 평양냉면을 일컫는다.
평양냉면이 남쪽으로 전파된 건 6.25 전쟁 때 이북 사람들이 대거 내려오면서다. 실향민 중 일부가 고향의 맛을 살려 평양냉면집을 내기 시작했다. 주 고객 또한 실향민이었다. 우래옥, 평양면옥, 을지면옥, 필동면옥, 을밀대 등 유명한 평양냉면 집들은 실향민 1세대부터 대를 이어온 곳이다. 메밀과 전분을 어떤 비율로 섞어 반죽하는지, 어떤 고기의 어느 부위를 몇 시간 동안 어느 정도의 센 불로 고아 육수를 내는지, 각 집마다 나름의 비법이 전해져 내려온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는 이들은 보통 두 번 놀란다. 면이 너무 쉽게 끊겨서 놀라고, 국물이 너무 밍밍해서 또 한 번 놀란다. 누구는 평양냉면과의 첫 만남을 충격 그 자체라고 표현했다. ‘대체 이런 걸 무슨 맛으로 먹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몇 번 더 먹다보면 곧 평양냉면의 은근한 맛에 중독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아니, 대부분이 그렇다. 뭔가 딱 틀에 잡힌 맛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계속해서 생각난다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초기엔 실향민들로만 득실대던 평양냉면 집의 문호가 점차 넓어지기 시작했다. 남쪽에서 나고 자란 이들도 평양냉면을 즐기게 됐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세대도 뛰어넘기 시작했다. 그 선봉에는 역시 실향민 2세들이 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평양냉면을 맛본 이들이 그 맛을 주변에 전파한 것이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회원 4,700여명 규모의 ‘냉면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카페를 운영하는 정필원씨도 30대 중후반의 실향민 2세다. 이 카페에선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던 6월 15일을 두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양냉면을 먹는 ‘냉면 데이’로 정하자는 운동을 제안해 펼치고 있다. 이런 실향민 2세, 3세 덕분인지 이젠 이름난 평양냉면 집 앞에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줄지어 늘어선 광경이 낯설지 않게 됐다.

평양냉면의 유명세가 너무 강렬한 탓에 남쪽 지역의 다른 냉면들도 평양냉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산밀면이다. 밀가루로 만든 부산식 냉면인 부산밀면은 6.25 전쟁 때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메밀 대신 밀가루로 냉면을 만들어 먹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흔히 알려져 있다. 당시 부산에서 메밀은 구하기 어려웠지만, 밀가루는 미군부대에서 풍족하리만치 나눠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산밀면은 진주냉면에서 유래했다는 설에 더 믿음이 간다. 김영복 경남대 전통식생활문화연구원장의 글을 보면, 진주 향토음식 가운데 밀국수냉면이 있는데 이게 부산밀면과 크게 보면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1925년 경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하면서 관료와 상인들도 부산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고, 이들에 의해 진주 밀국수냉면이 부산밀면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고 한다. 진주냉면은 지금 그 흔적이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북한이 펴낸 『조선의 민속전통1-식생활풍습 편』에 “냉면 중에 제일로 여기는 것은 평양냉면과 진주냉면이다”라는 구절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옛 유명세를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고기 대신 멸치를 우려낸 국물을 썼다고 전해진다.

인천냉면 또한 평양냉면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6.25 전쟁 때 이북에 내려온 이들이 정착하면서 인천냉면이 생겨났다는 설은 사실과 차이가 있다. 인천냉면의 역사는 인천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게 일반적인 설이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되자 팔도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천 드림’을 꿈꾸며 몰려들었다. 사람이 모이다 보면 먹거리도 풍성해지는 법인데, 평안도, 황해도 출신이 많았던 탓인지 이 지역의 대표음식인 냉면이 자연스레 소개됐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문헌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작고한 인천지역 언론인 고일(高逸, 1903~1975)이 1950년대에 펴낸 『인천석금(仁川昔今)』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냉면은 평양이 원조라고 하지만, 인천 것을 못 따랐다. (…)답동에 사정옥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으로 많이 먹으러 왔다. (…)스무 그릇 이상이나 되는 것을 긴 목판에 싣고 자전거로 서울까지 배달하던 시절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인천냉면이 얼마나 인기 있는 음식이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인천 향토사 연구가 조우성의 『인천이야기 100장면』에는 이런 대목도 있다. “냉면이라면 으레 평양을 떠올리지만, 평양 뺨치게 맛있던 인천냉면이었다. 특히 쇠고기를 삶아낸 육수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옹 신태범 박사는 유저 『먹는 재미 사는 재미』에서 밝히고 있다. 경인선 기차가 개통되기 전, 서울의 하이칼라(신사)들이 냉면을 시키면, 긴 목판에 족히 스무 그릇 정도나 되는 것을 얹어 메고 자전거로 서울까지 배달했다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진다. 그 전통이 경인면옥, 평양옥으로 이어지고 최근에는 대중화되어 화평동 구름다리 아랫동네에 냉면거리까지 탄생케 한 것이다.”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지만 어쨌든 평양냉면이 인천냉면의 뿌리가 됐다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값싸고 푸짐한 ‘세숫대야’ 냉면으로 유명한 화평동 냉면골목도 따지고 보면 평양 뒷골목까지 선이 맞닿아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일개 지역의 토속음식인 평양냉면이 온 나라 전체로 퍼져나가 지역, 세대를 넘어선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휴전선 때문이 아닌가 싶다. 갈 수 없기에 거기 음식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고, 이는 실향민뿐 아니라 온 국민에게 전이됐다. 지금은 어디에서건 평양냉면이나 그 비슷한 걸 맛볼 수 있게 됐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원조를 원하게 됐다. 평양냉면의 본류를 따지자면 역시 평양 옥류관(玉流館)만한 곳이 없다. 지금은 금강산에도 옥류관 분점이 생겨 그나마 쉽게 맛볼 수 있게 됐다지만, 평양에서 먹는 냉면에는 맛 이상의 맛이 담겨져 있다. 평양 옥류관에서 그 맛을 혀로, 그리고 가슴으로 느낄 날을 꿈꾸지 않는 이는 없을 듯하다. 팔도강산 곳곳으로 퍼져나간 평양냉면은 온 국민의 통일 염원을 눌러 담고 이제 다시 평양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