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길이 다시 열린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태준(李泰俊, 1904~?)의 「패강랭(浿江冷)」(1938)을 펼쳐 들었다. 이 소설은 평양에 관한 기록이다. 패강은 대동강(大同江)의 다른 이름. 그러니까 ‘패강랭’이라 함은 대동강 물이 차다는 뜻이다. 때는 1937년 가을. 중일전쟁(1937) 발발 직후이니, 물론 이 제목은 암시적이다. 소설은 10여 년 만에 그곳을 찾은 한 지식인의 시선을 좇아 1930년대 평양의 모습과 시대 분위기를 조감한다.

당시 평양은 경성(京城)지금의 서울의 구인회(九人會)1와 더불어 식민지 모더니즘의 또 한 축을 형성했던 단층파(斷層派)2의 본거지로, 연극, 영화, 연주회, 카페, 술집, 백화점, 재즈 등 무수한 문화적 기호(記號)들이 이미 일상의 한 부분으로 내면화되어 있을 만큼 세련되고 근대화된 도시였다. 1930년대 평양의 중심가였던 야마토쵸오(大和町) 거리를 찍은 사진엽서를 들여다보면, 화려한 근대 건축물과 즐비하게 늘어선 고급 상가들 사이로 전차가 달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패강랭」에서 작가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주인공 현(玄)은, 평양 도심 한가운데를 자동차로 그냥 지나친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본 평양은 몰라보게 변했다. 새 빌딩들이 들어섰고, “피양내인(평양여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던 머릿수건이며 댕기도 없어졌다. 머릿수건은 고구려 때부터 부인들이 머리를 꾸미기 위해 쓰던 건괵(巾) 풍습이 내려온 것이다. 운전수는 “인전 평양두 서울과 별루 지지 않”는다고 자랑하지만, 현은 그런 평양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느낀다. 빨간 벽돌로 새로 지은 경찰서를 보며 “큰 분묘(墳墓)”와 같다고 여기는 그다. 이 점은 경성의 구보(仇甫)씨3와도 유사하다. 자본주의적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린 도시를 의식적으로 대상화하는 두 주인공은, 배회하는 공간이 서로 다를 뿐 시대의 우울함 속에 글쓰기의 방향을 놓고 고뇌하고 있는 점에선 동일한 양상을 띠는 것이다. 도심을 지나쳐 자동차는 대동강 상류로 향한다. 을밀대(乙密臺), 부벽루(浮碧樓), 청류벽(淸流碧), 연광정(練光亭), 능라도(綾羅島) 등이 모여 있는 그곳은 당시 평양의 명승구적(名勝舊蹟)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현의 자취를 따라가 보자. 소설 첫머리에서 그는 대동강변에 위치한 부벽루 아래를 “어정거리고” 있다. 그는 왜 배회하는가. 해답은 소설 속 “지싯지싯함”이란 단어에 있다(지싯지싯은 남이 싫어하는지는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제가 좋아하는 것만 짓궂게 자꾸 요구하는 모양새를 가리킨다). 매번 벼르기만 하다가 12년 만에 그가 평양을 다시 찾은 이유는, 조선어시간이 폐지되면서 실직될 위기에 내몰린 친구 박(朴)을 위로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정거장에서 박과 해후한 그는, 학교뿐 아니라 시대 속에서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같은 친구의 모습을 통해 선뜩 자기와 자기 작품을 발견하고는 괴로운 심정에 빠진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모란봉(牡丹峰)이었던 것이다.

현이 주로 배회하는 장소가 도심 한복판이 아니라 모란봉 아래로 늘어선 대동강변의 유적지란 점은, 소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다. “빛 낡은 편액”이 걸려 있고 새 한 마리 날아들지 않는 부벽루 같은 누각은 한갓 구시대의 유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외려 전통문화와 조선의 자연에서 “우직한 순정”과 “유구한 맛”을 느끼며, 경박한 근대 추종을 경계한다. 대동강가에 서서 그는 생각한다. “조선 자연은 왜 이다지 슬퍼 보일까?” 백제 멸망의 슬픈 전설이 서린 낙화암(落花岩)과 백마강(白馬江)을 떠올리는 대목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쓸쓸한 내면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거기에서 대동강의 푸른 물결은, 진보의 시간이 삭제되고 절대적 시간의 흐름 속으로 사라져 더욱 처연히 빛나는 허무와 감상의 원천이 아니다. 멀게는 정지상(鄭知常, ?~1135)의 「송인(送人)」이나 고려가요 「서경별곡(西京別曲)」 같은 이별의 노래에서부터 이광수(李光洙, 1892~1950)나 김동인(金東仁, 1900~1951)의 근대소설들에 이르기까지 대동강이 눈물과 한의 원천이 되어왔던 것을 기억해 보라. 「패강랭」의 대동강은, 표면적으로는 시대의 우울한 낙오자처럼 보이는 ‘지싯지싯한’ 존재들로 하여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되비추며 사유할 수 있게 하는 매개로서, 또한 암울한 시대의 예감 속에 자신의 삶이 나아갈 방향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성찰케 하는 거울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은 대동강가의 사적(史蹟)들이 사회적 현실과는 무관하게 절대적 시간 속에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삽화를 제공한다. 현이 을밀대와 주암산(酒巖山)으로 올라가려고 시도하다 근처에 있는 비행장 때문에 포기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노형석의 『모던의 유혹 모던의 눈물』(생각의 나무, 2004)에 따르면, 그 비행장은 대동강벌에 있던 평양 군용 비행장으로 보인다. 30만평 벌판에 자리 잡은 이 비행장은 1921년에 만들어져 조선 주둔 일본군의 유일한 공군부대인 비행 6연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작가는 총과 창을 들고 을밀대 아래에서 비행장 경계근무를 서는 병정과 주암산의 출입금지령 따위를 슬쩍 들춰내면서, 전시의 살벌한 분위기가 일상을 잠식해 들어가던 시대적 상황을 전해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운치와 풍류가 있던 대동강가의 전통적 유흥문화도 모습을 감췄다. 김동인의 「눈을 겨우 뜰 때」(1923)에도 자세히 묘사되었듯이 1920년대만 하더라도 대동강에서는 기생들의 놀잇배 유람과 어죽(魚粥)놀이를 흔히 볼 수 있었다. 「패강랭」의 주인공 역시 12년 전 이곳을 찾았을 때 기생 영월과 함께 능라도에 가서 어죽을 쑤어먹고 부벽루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제 흥성거리는 분위기는 간 곳 없고  대동강 위에 “까뭇까뭇 널려 있는 마상이(통나무배)와 수상선들”은 “하나도 움직여 보이지 않는” 적막한 모습이다. 현은 빈 놀잇배를 잡아탄 뒤, 노를 젓지 않고 흐르는 대로 동일관(東一館)까지 가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는 느긋한 유람의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동일관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관은 당시 대동강변에 위치해 있던 기생요릿집으로, 현재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옥류관(玉流館)의 전신이다. 1946년에 월북한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에게 김일성이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던 자리도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동일관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지만, 요릿집의 풍류도 예전 같지 않다. 기생들은 유행을 따라 머리를 지지거나 물들였고, 술자리에선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에 맞춰 댄스를 춘다. 1930년대 경성에서는 유성기가 보급되면서 서양의 재즈를 크게 늘어놓고 찰스톤(charlston)4을 추는 것이 대유행이었다. 카페나 요릿집에선 찰스톤보다도 더 타락한 것으로 인식되던 블루스(blues)를 추곤 했는데, 평양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를 보는 현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현의 시선은 곧, 일제를 경유한 서구문화가 근대화란 명목 하에 맹목적으로 추종되는 데 대한 작가 이태준의 우려 섞인 시선에 다름 아니다.

더욱 견디기 힘든 건 파시즘의 논리가 일상 깊숙이 침투해가는 현실을 목도하는 일이다. 실업가이자 부회의원인 친구 김은, 도쿄에 가서 글을 쓴다는 누군가를 일컬어 “선견이 있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며 현에게도 “방향전환”할 것을 충고한다. 머릿수건 금지령을 두둔하는 김을 향해 현은 “고유한 문화적 가치를 모르는 돼지 같은 자식들”이라 욕하지만, 시세에 편승해 떵떵거리는 부류는 김과 같은 속물들인 게 현실이다. 바로 그런 현실이, 장구소리에 맞춰 잡가와 한시 한 대목씩을 주고받는 “옛날 기생” 영월과 박을 지싯지싯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니었을까. 어두운 시대를 사는 독립운동가의 일모도원(日暮途遠)한 심경을 읊은 신채호(申采浩, 1880~1936)의 한시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을 한 곡조 뽑고 난 박이 눈물 글썽해 한숨지을 때, 김이 기생들과 마주 서서 “저희 세상인 듯” 댄스를 추며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장면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소설의 말미. 김과 싸우고 술자리를 빠져나온 현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한 밤 강물” 앞에 서 있다. 참담해진 그는 주역의 “이상견빙지’(履霜堅氷至)”5를 반복해 중얼거린다. 곧 냉혹한 미래가 도래하리라는 전율적 예견과, 견딤을 각오하는 비장한 심경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장면이다.
이태준은 1930년대의 평양을 이렇게 그려나갔던 것이다. 이태준이 바라본 평양은, 고유한 문화가 증발해가는 공간을 향해 비루한 시류가 탕탕거리는 소음으로 밀고 들어오던 시대의 현장이었다. 순전히 공상에 지나지 않지만, 만일 1937년의 평양을 돌아볼 수 있다면 나 역시 금세 낡은 풍경이 되고 말 시내 한복판을 두리번거리기보다 대동강의 차고 고요한 밤 강물 앞에 서 보겠다. 그리고 시류를 비껴 도도한 흐름을 멈추지 않는 패강의 늠름함 속에서 고도(古都) 평양의 역사와 아름다움을 한 몸 가득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