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남북의 정상이 서로 껴안고 악수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의 분위기는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북한의 핵개발 의혹으로 한반도 국제정세는 오히려 더 복잡하게 꼬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남북관계와 주변 환경이 대체적으로 민족화해와 국제협력의 방향으로 흘러간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2007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린 2차 남북정상회담은 그런 물살에 더욱 힘을 보태준 풀무질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남북관계의 여러 가지 진전 속에서 나의 흥미를 가장 자아내게 만든 것은 남북한 경의선(京義線)서울-신의주, 1906년 개통의 연결이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철도 100년의 역사를 연구해 온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조건반사였을 것이다. 물론 지금 당장 경의선을 통하여 남북을 왕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군사분계선을 가로질러 경의선이 연결된 것만으로도 분단 60년 역사에서는 획기적인 사건이다. 또 러시아와 중국 등의 유라시아국가들이 남북한 철도와 시베리아철도 및 중국철도의 연결을 고무적인 일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상호협력의 공동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국제환경을 고려하면, 남북으로 연결된 경의선이 유라시아대륙의 간선철도로서 부활할 가능성은 아주 많다고 볼 수 있다.

회고하건대, 경의선의 역사에는 영광과 번영보다는 오히려 치욕과 고난의 경험이 더욱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1890년대부터 1910년까지 경의선은 한반도와 만주에서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열강의 치열한 세력다툼의 대상이었다. 그 대표선수가 러시아와 일본이었고, 프랑스와 영국이 각각 그들을 후원하였다. 그리하여 경의선의 부설권은 프랑스ㆍ대한제국ㆍ일본으로 전전하였다. 그 과정에서 관련 국가간에 이권을 챙기기 위한 비밀교섭이 수없이 전개되었고, 영일동맹과 같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은 조약도 몇 차례나 맺어졌다. 경의선의 부설권을 둘러싼 열강간의 갈등과 대립은 마침내 러일전쟁(1904~1905)으로 폭발하였다. 그리고 경의선은 전쟁의 와중에서 일본군대에 의해 군용철도로서 부설되는 운명에 처하였다. 경의선의 건설과정에서 일본이 자행한 토지와 노동력의 수탈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가혹하여 한국인의 반(反)철도 항일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의선은 문명을 전파하는 선구자가 아니라 군사적 침략의 지렛대였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경의철도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한반도는 물론이고 만주지역으로까지 확장했다.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1911년에 압록강철교를 가설하고 안봉선(安奉線)1 등의 만주철도를 경의선과 같은 폭의 표준궤로 개축함으로써 부산에서 출발한 열차가 직통으로 펑톈(奉川) 창춘(長春)까지 달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는 일본의 세력 범위가 중국본토로 확대되자 경의선을 통해 서울-북경 간에도 직통열차를 운행했다. 국제 연락운수도 활발하여, 서울에서는 경의선과 만주철도ㆍ시베리아철도를 경유하여 영국의 런던까지 갈 수 있는 열차표가 판매되기도 하였다.

일제치하의 경의선은 원망의 대상이었다. 철도를 통해 일본으로 실려 가는 쌀 대신 만주에서는 콩깻묵이 실려 왔다.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가는 조선인 대신 일본인 순사와 헌병이 들어왔다. 경원선(京元線)서울-원산, 1914년 개통을 가사로 만든 것이지만 <신고산타령>은 철도에 대한 민중의 원망을 절절하게 풀어내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철도가 수행하는 문명의 이기(利器)로서의 역할이 경의선을 완전히 비켜간 것은 아니었다.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소설 『무정(無情)』(1917)에서 보듯이 경의선은 청춘남녀의 사랑을 잉태하고 유학의 꿈을 실어 날랐다. 경의선은 제국주의의 문명화ㆍ개방화 작용을 선도하며 한반도를 유라시아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통로의 역할을 수행했던 셈이다.

오늘날 세계사의 흐름을 보건대 철도를 통해 주권과 영토를 침탈하던 제국주의시대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남북한은 휴전선으로 끊어진 경의선을 다시 연결함으로써, 100여 년 만에 비로소 치욕과 고난의 역사를 떨쳐내고 우리 민족을 화해와 공생으로 이끌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앞으로 경의선이 유라시아대륙의 동맥으로 다시 태어나서 우리 민족과 주변민족을 공존공영으로 인도한다면, 경의선은 한국의 근현대사 내지 동북아시아의 근현대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 공공시설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 여건을 고려할 때 경의선이 유라시아대륙의 간선철도로 부활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으로 예상된다. 철도는 고도의 기술과 노하우가 필요한 종합산업이다. 더구나 비행기나 대형선박 등과 시간ㆍ운임ㆍ안전 등을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오늘날 철도가 이들보다 우위를 확보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적어도 경의선이 시속 30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리는 일본의 신칸센(新幹線)이나 프랑스의 테제베(TGV) 등과 같은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면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철도는 시속 30킬로미터 정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도 단선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남북한의 철도는 러시아철도와 궤간(軌間)의 폭이 다르고 신호체계 등의 운영시스템도 맞지 않는다. 중국의 철도가 남북한 철도와 같은 표준궤를 채택하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궤간이 서로 다른 철도를 직접 연결하기 위해서는 진입하는 곳에서 차량의 바퀴를 모두 바꿔 끼우든가 선로를 새로 깔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경의선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철도를 새로 건설하는 수준으로 개량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하다. 어림잡아 수조 원 아니 수십조 원을 남한이 부담해야 할지 모른다. 북한철도의 개량공사를 위해서는 남북한이 머리를 맞대고 협력해야 한다. 지금 그것이 얼마만큼 가능한 일일까?
이제 남북한 당국자들은 경의선을 비롯한 남북철도 연결이 돌파해야 할 난관과 부담에 대해 국민들에게 정확하고 소상하게 알려야 한다. 철마는 한두 사람의 들뜬 열정만으로 달리지 않는다. 현실에서 철마를 달리게 하는 힘은 바람이 아니고 석탄이거나 기름 또는 전기이다. 남북한 당국자들은 국민이 세금을 부담하고도 얻는 게 더 많다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6.25전쟁 때 파괴된 대동강철교의 앙상한 골조를 필사적으로 타고 넘어오던 피란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무리 많은 난관이 있더라도 남북한의 합심협력으로 경의선이 하루빨리 유라시아대륙 철도와 연결됨으로써 우리의 빛바랜 망막 위에 평화와 번영의 꿈을 실은 국제열차가 달리는 총천연색 영상이 새겨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