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립박물관, 2007. 9. 14∼10. 28)

박물관의 정치학은 오묘하다. 중앙과 지방, 과거와 현재, 본국과 외국 간의 역학관계가 박물관에 담긴다. 아울러 한 박물관 내에서도 다양한 전시방식을 통해 온갖 기기묘묘한 정치적 프레임워크를 연출함이 흥미롭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에 한국ㆍ베트남 관계의 신국면이 담겼다. 나는 지척인 인천상륙작전기념관부터 들러보고 전시실을 향했다. 이 전시회 개막날짜가 하필 9월 14일인데, 1950년 이 날 청량산에서 바라보이는 저 먼 바다 어둠 속에서는 몇 시간 뒤에 있을 상륙을 위해 연합군 함선 수백 척이 모이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4년 전인 1946년 하이퐁(Hai Phong)에서는 프랑스군의 상륙작전이 있었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1946∼1954)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의 무차별 함포사격으로 하이퐁은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 사망자가 2만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두 상륙작전 모두 ‘때려잡을’ 대상은 공산당이었다. 지금 하이퐁의 주인은 상륙군을 물리친 사람들이고 인천의 주인은 상륙군과 한편이었던 사람들이다(18세의 해병, 내 아버지도 15일 오후 만석동 쪽 레드비치(Red Beach)에 상륙했다. 그리고 열흘 뒤 김포 들판에서 쓰러졌다). 기념관 뒤 참전연합군 세 병사들의 거대한 조각상 앞에 ‘피에 주린 북괴의 공산 남침으로’라 시작하는 비문 내용이 지나는 이의 가슴을 묵지근하게 한다.

강렬한 비문의 잔상은 가을빛 머금은 작은 오솔길을 지나 시립박물관으로 들어가 전시실을 다 둘러볼 때까지도 눈앞에 남아 유물들과 겹친다. 전시실에서 베트남의 유구한 역사는 결국 영웅적 항불ㆍ항미투쟁으로 귀결된다. 이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한 베트남역사박물관의 공통된 언어이다. 두 개의 상이한 역사해석이 인천 청량산 기슭에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비문이 바쳐진 연합국 병사들이 살아난다고 해서 역사박물관의 ‘영웅적’ 항불ㆍ항미투쟁 전시에 눈을 부라리지도 않을 터이고, 하이퐁에서 죽어간 수많은 민간인과 베트민(Viet Minh)월맹, 베트남 공산주의계 독립운동단체 전사들이 지척의 기념관에 있는 비문 내용에 얼굴을 찡그릴 리도 없다. 양국의 관계에서 이제 냉전은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지겨운 끈이 아니다. 적어도 화창한 이 가을의 청량산에서는.

박물관의 중앙집권적 전제는 무지막지하다. 나는 알짜 유물은 다 수도 하노이역사박물관(지금 베트남은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두 배 크기의 중앙 역사박물관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다)에 내주었을 하이퐁박물관의 전시유물이, 더군다나 국외 전시물이란 것이, 그리고 수도도 아니고 지방도시 인천에 오는 유물이니 양적 질적 한계가 명확하리라 여겼다. 그래서 은근히 걱정도 했다. 인천시민 앞에 선 베트남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해서 말이다. 준비 기간도 너무 짧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베트남 수도 하노이 중앙에 떠억 버티고 선 국립역사박물관의 휘황찬란한 전시물에 비해서는 빈약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하이퐁의 유물들이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전시실에 앉아있다. 언뜻 보면, ‘지방’의 초라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아무리 하이퐁이 베트남 제3의 도시라 하더라도 말이다. 13세기 몽골군의 침입 시 수전(水戰)에서 사용했다는 사진 속의 나무말뚝은 같은 시기 같은 지역에서 출토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노이국립박물관에 있는 것의 반토막도 안 되어 보인다. 하노이국립박물관에는 15세기에 본격적으로 생산되고 세계 각처로 수출되던 화려한 청화백자 및 분청이 흔하기도 하건만 이곳 전시실의 베트남 청화 도자기는 크기도 작거니와 생김새까지 시원찮다. 그러나 인천이라고 해서 다를까? 1층의 인천역사 전시실을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하이퐁에서 인천박물관전이 열린다고 할 때, 만약 어떤 하이퐁시민이 자기네들 국립박물관이나 한국의 국립박물관을 염두에 두고 유물의 질적 수준이나 규모를 평가하려 든다면 우리도 실망의 대상이 될 처지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한계를 인천ㆍ하이퐁 양측 박물관 관계자들이 십분 공감한 듯 싶다. 그 한계를 ‘하이퐁적 특성’의 강조로 극복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개항장적 면모에 특히 큰 방점을 찍고 있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일반전시실의 패러다임과 상통한다. 석기, 청동기 시대의 유물 중에 돌도끼라든가 청동검 같은 것은 하노이국립박물관 전시물들과 비교해도 별 손색이 없다. 특히 우리의 강화도에 해당하는 깟바(Cat Ba)섬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발굴 및 유물에 대한 해설은 매우 친절하며 정확하다. 하노이국립박물관에서는 볼 수 없는 하이퐁만의 특징적 유물이다. 해설 내용이 뛰어나기도 하려니와 번역 실력이 돋보이며 특히 베트남어의 한글표기는 거의 백퍼센트 정확하다 할 것인데, 그동안 내가 보아 온 그 어떤 공식 안내책자나 전시회 설명서보다 낫다. 그쪽의 정성, 이쪽의 노력이 읽혀서 마음에 좋다.

몇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안내서나 포스터에 올려진 몇 가지 정교한 유물사진이 인상적이었던 관람객이라면 전시실을 자꾸 두리번거릴 것이다. 그 유물들을 도통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관계자의 얘기로는 그것들이 하이퐁국립박물관의 소장품임은 분명하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이번 인천 나들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다. 이유야 어쨌든 섭섭함을 느낄 관람자도 많으리라. 매주 토요일 특별행사로 베트남관련 영화상영을 준비한 배려는 무척 고맙다. 한국영화 <알포인트>(2004)를 포함해서 <굿모닝 베트남>(1987), <플래툰>(1986), <그린 파파야 향기>(1993), <쓰리 시즌>(1999) 등 좋은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모두 하이퐁에서 2,000여 킬로미터 떨어진 베트남 남부를 배경으로 한 데다 다섯 편 중 세 편의 주제가 전쟁이다. 하이퐁과 가까운 수도 하노이를 무대로 하는 수준 높은 예술영화도 두세 편 섞여 있었으면 좋았겠다. 마네킹에 전통복장을 쭈글쭈글 주름 잡힌 채 그대로 입혀 옹색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나 옷걸이에 삐딱하게 걸린 아오자이(ao dai)베트남여성 전통의상도 눈에 거슬린다. 그리고 전시장 안이 좀 덥다. 박물관 본전시실도 냉방장치는 시원치 않지만, 그래도 특별전시실에는 특별한 배려를 해주는 게 손님(유물이건 관람객이건)에 대한 대접 아닐까? 만약 의도적이었다면 (물론 그렇지 않다는 것은 잘 안다), 시원찮은 유물, 전쟁의 기억, 구질구질해 보이는 복장, 더운 전시실까지를 하나로 꿰어, 전시실을 통해 상대 박물관ㆍ도시ㆍ국가ㆍ민족을 열화(劣化, inferiorizing)시키는 박물관 정치학의 교과서적 사례로 소개할 만하다.

하이퐁에서 온 귀한 손님인 작은 유물 몇 점이 화해를 웅변하고 미래를 노래한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시립박물관이 거의 한울타리 안에 있는 덕에 관람자는 이번 특별전에서 갑절의 재미를 맛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