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출신 일본어 작가의 탄생

1932년 4월 <카이조오(改造)>에 경상북도 예천 저수지공사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 「아귀도(餓鬼道)」가 실렸다. 1급 종합지 <카이조오>의 제5회 현상창작공모 2등 입선작으로, 작가는 당시 식민지조선에서 대용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장은중, 필명 장혁주(張赫宙, 1905~1998)였다. 1920년대부터 일본의 프롤레타리아계열 문학잡지에서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하던 조선출신 작가들은 몇몇 있었으나 정식으로 일본문단에 데뷔한 것은 장혁주가 처음이었다.

「아귀도」를 전후해 장혁주는 「포플러(白楊木)」(1930), 「박전농장(迫田農場)」(1932), 「쫓기는 사람들(追われる人々)」(1932), 「분기하는 자(奪ひ起た者)」(1933) 등 조선농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그린 일본어 작품들을 차례차례 발표한다. 이 소설들은 당시 조선에서 발표되었던 어떤 작품 못지않게 식민지 현실에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장혁주의 작품은 늘 복자(伏字)투성이였고 그의 글을 게재한 <카이조오>와 <분게에슈토(文芸首都)>는 발행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 장혁주는 이렇게 말했다. “민중의 비참한 생활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 싶다. 호소하고 싶다.” “일본문학계에서 발표하는 것이 조선보다 검열이 관대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작품들을 보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장혁주의 일본문단 진출은 조선의 현실을 일본독자에게 호소하려는 작가 자신의 적극적인 의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1932년 이래 프롤레타리아문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자 일본문단이 일시적으로 정체해버린 탓이기도 하다. 이 정체를 타파하기 위해 작가들은 색다른 소재를 모색하기 시작했고, 제국의 확장과 더불어 엑조티시즘(exoticism)이국풍 선망주의을 자극하는 이야기들의 수요가 늘어났던 것이다. 물론 조선인이 일본어로 창작활동을 하는 데에는 제1차 조선교육령 포고(1911) 이래 20여 년간의 ‘국어(일본어)’교육이 전제되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겹치면서 식민지출신 일본어작가 ‘장혁주’가 식민종주국 문단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만주로 간 까닭은?

중일전쟁(1937~1945)이 격화되었던 1939년, 『개척지대(開拓地帶)』(1939. 10)라는 앤솔러지가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芸懇話會)’ 명의로 출판된다. 프롤레타리아 전향작가 토쿠나가 스나오(德永直), 유아사 카쓰에(湯淺克衛), 타무라 타이지로오(田村泰次郞), 장혁주 등이 참여해 단편 12편을 실었다. 만주 개척과 만몽개척청소년의용군(滿蒙開拓靑少年義勇軍)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이른바 개척소설이라고 일컫는 국책 선전 문학인 것이다. 여기에 실린 장혁주의 단편소설 「빙해(氷解)」는 그에게 ‘친일작가’라는 낙인을 찍어준 첫 작품이자 여러 모로 문제작이다.

만주사변 이듬해인 1932년 3월, 관동군(關東軍)은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웠다. 이때부터 오족협화(五族協和)만주족, 조선족, 한족, 몽골족, 화족(일본)이 협력하여 화평하게 지낸다는 의미와 왕도락토(王道樂土), 일만일체(日滿一體)라는 슬로건을 내건 일본군의 만주 간접지배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회에 걸쳐 ‘북만(北滿)농업이민단’을 무장파견하고, 1936년에는 히로타(廣田)내각에서 ‘20개년 100만호 이민송출계획’을 국책으로 정해 본격적인 식민을 시작한다. 그 배경에는 일본농촌의 궁핍을 만주이민으로 해결하려는 농본주의자 카토오 칸지(加藤完治) 등의 제안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국책수행을 위해 개척문학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되면서 국가권력이 국민과 물자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체제가 확립되었다. 일본문단에서는 국책문학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는데 그 중 하나가 간화회였고, 이 단체의 유일한 비(非)일본인멤버가 장혁주였다.
간화회는 탁무성(拓務省)의 후원으로 1939년 2월 4일에 발족하여 2주 후에 의용군훈련소를 방문한다. 이어서 「의용군을 말하는 작가 좌담회」<신만주(新滿洲)>(1939. 4), 제1차 펜부대 파견(4. 26), 제2차 펜부대 파견(6월초) 등 활동을 이어간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로 작가들은 각자의 작품을 남기는데, 장혁주가 훈련소방문 후 <신만주>(1939. 7)에 발표한 소설이 「빙해」이다.

장혁주는 위 좌담회에서, 이전에는 의용군이라는 국책에도, 민족협화를 내건 만주국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훈련소에서 본 소년들의 신념과 이상에 감명을 받아 만주국의 민족협화 문제가 절실함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주최한 ‘국책문학 검토 좌담회’1939. 6. 16. 석간 2면에 참석해 개척문학 창작이 급선무임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장혁주의 이러한 사고를 구체화한 첫 작품이 또한 「빙해」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간화회가 국책문학단체라고 해서 그 멤버들을 국수주의적 성향의 작가들로 단정짓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개척지대』 집필진 중 5명이 <진민분코(人民文庫)>(1936.3~1938. 3) 동인이었다. <진민분코>는 좌절한 일본 프롤레타리아운동의 계승자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반(反)체제 문학자들이라 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문학의 이른바 노동자, 농민으로 분류되는 하층계급에 대한 관심과 문학실천이 농본주의를 기본으로 한 대륙개척과 개척문학으로 통하는 연결고리가 되었다. 이에 국수주의, 군국주의와는 정반대인 듯 보이는 문학자들이 국책에 흡수되어 ‘전향’하게 된 것이다.

「빙해」,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을 넘어

장혁주가 <카이조오>에 두 번째로 발표한 소설은 「쫓기는 사람들」(1932. 10)이다. 조선 남부 소작농민들이 “XX(동척동양척식주식회사의 준말)”에 소작지를 몰수당하고, 결국 간도지방으로 떠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장혁주문학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만주이면서, 식민지상황에 대한 통찰과 비판적 자세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만주국이 ‘신국가’로 출범한 것이 1932년 3월인데, 흥미롭게도 바로 「아귀도」가 실린 <카이조오> 1932년 4월호에 ‘신만주국대관(新滿洲國大觀)’이라는 제목의 화보사진이 실렸다. 1931년 7월초에는 창춘(長春) 부근 완바오산(萬寶山)지역에서 일어났던 조선농민과 중국농민의 충돌이 조선과 일본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이에 선동되어 조선에서는 재한화교(在韓華僑) 습격폭동까지 일어난다. 소위 ‘완바오산사건’으로 일컫는 일련의 소동은 박영석『만보산사건 연구』(아세아문화사, 1978)이 밝힌 대로 단순우발적인 충돌이 아니라, 만주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지배권쟁탈전 속에서 조선농민보호를 빌미 삼아 군사력을 강화시키려는 일본제국주의의 미디어전략이었다.
실제로 한ㆍ중ㆍ일 각각의 욕망이 각축했던 공간 ‘만주’가 한국근대문학에서 오로지 ‘수난의 공간’으로만 그려진 데에는 1920년대 이후 재만조선농민의 수난에 관한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기사와 만주사변 직전 연일 보도된 완바오산사건 기사들이 일조했다. 이는 「빙해」 이후 장혁주의 만주 관련 소설에 꾸준히 등장하는 모티프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완바오산사건을 소재로 장편소설 『개간(開墾)』(1943. 4)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티프는 식민지 농민의 수난을 다루던 장혁주의 초기작들과도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장혁주의 만주 관련 소설은 국책을 단순히 추종하는 부류와 민족 간의 갈등양상을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를 통해 입체적으로 그리는 부류로 나뉜다. 또한 수난받는 조선인에 대한 연민을 유지하면서도 제국과 식민지구조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ㆍ간접적으로 노출하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빙해」를 살펴보자. 중국인 농민 왕 싼(王三)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에 나타난 의용군 소년들의 행진을 보고 처음에는 반감을 갖지만, 점차 그 반감이 자신의 오해임을 깨닫고 일본 측에 협력해 간다. 국책 선전 문학의 전형인 것이다. 그런데 작품의 결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는 마을사람들이 불평하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막으면서 돌아다녔다.” 마을사람들에게 불평불만이 있었음을 은연 중 인정한 것이다. 소설 전체를 놓고 봐도 왕 싼이 활약을 하면 할수록 배후에는 중국인에 대한 억압구조가 드러날 수밖에 없는 모순이 생긴다. 소설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왠지 비위에 거슬리는 일본인”, “알 수 없는 미움” 등의 표현에서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왕 싼의 반발심과 증오가 엿보인다. “곧 여기저기 일본인투성이가 될 거고,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들이닥치는지 전혀 모르겠다”라는 왕 싼의 혼잣말은 대규모의 일본인 만주이민자들이 중국인의 농지를 잠식해 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일본 개척이민에 대한 중국 농민의 반발과 증오가 대륙 도처에서 커지고 있음을 소설 구조를 통해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뒤, “왕 싼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년들이 이 땅에 들어오는 이유도 알았다. 그리고 총을 잡는 것은 전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심신의 단련이 주요목적이고, 더불어 비적(匪賊)의 습격에 대비하고 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왕 싼이 품고 있던 의문들이 모두 해결되는 것처럼 전개된다. 그런데 의문을 해결한 것은 주인공뿐이다. 작품 배후에서 일본 개척이민자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중국인이나 독자들의 의문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즉 일본인이 왜 들어오는지, 그들이 들어오면 이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지는 던져진 채 끝까지 남아 있을 뿐이다.

장혁주는 식민지출신 작가로서 이 「쫓기는 사람들」을 누구보다 먼저 주목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이 작품이 주인공 왕 싼의 심리변화를 통해 국책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더라도, 이면에서는 식민지인으로서의 민족성(ethnicity)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작품의 이러한 이중구조로 인해 문맥이 애매해지는 부분이 왕 싼과 비적의 관계다. 작중의 “배신”이라는 말은 단지 비적 동지의 자수나 범죄행위 밀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과 중국인 사이의 민족성 충돌 하에서 나타나는 내통행위를 비난한 것일 수도 있다. 중국인의 입장에선 일본군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곧 ‘아군’과 ‘동족’에 대한 배신행위이기 때문이다. “배신자”라는 말에 내포된 ‘적군 대 아군’의 이항대립구조는 ‘일본 대 중국’이라는 대립구조를 연상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래서 일본인 독자에게는 자신들이 환영받지 못하는 만주의 현실이, 중국인 독자에게는 충분히 설명되지 못한 일본인 개척이민의 존재가 의문으로 남을 것이다. 주인공 왕 싼의 변화가 ‘올바른’ 것이었다고 판단한다면 「빙해」는 ‘성공한’ 국책문학 작품이 되겠지만, 만약 왕 싼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이 텍스트는 만주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성의 충돌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 작품은 정반대의 해석을 모두 가능하게 만드는 양의성(ambiguity)을 품은 텍스트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적극적 ‘해석’을 통해서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다.

그 밖의 국책소설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식민주의 비판’으로 해석가능한 문맥이 산재해 있다. 그러나 식민지와 근대화, 전쟁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장혁주 자신의 아이덴티티가 흔들린 흔적 또한 여실하다. 조선인이면서도 자발적으로 식민주의의 논리를 내면화해 일본‘신민’으로서의 자아를 획득한 장혁주의 시선이 그의 ‘만주’소설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여기서 장혁주가 일본어를 ‘국어’로 교육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어 세대’가 일본어로 소설을 쓰는 것은 “근대 일본어에 축적된 사상성을 획득하는 것”이고, “근대로의 지향이 일본적인 것으로 수렴해 버리는 식민지조선의 본질적인 일면”을 내포하게 된다고 남부진『張赫宙日本語作品集』(勉誠出版, 2003), 해설 참조은 지적한다.
장혁주가 시국ㆍ국책문학을 생산하게 된 시점을 하나의 변화, 단절로 보는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만주’를 축으로 장혁주문학을 재고해 보면, 그가 다루는 소재나 부분적인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연속성을 찾을 수 있고, 그 연속성은 단순히 ‘변절’, ‘친일’로 설명하기 힘든 문제가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