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할 것이다.

-폴 세잔

폴 세잔이 “나는 사과 하나로 파리를 정복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떤 열망이 꿈틀거리고 있었을까. 그에게 사과는 화가의 시선을 사로잡는 모든 오브제의 집약체이자 이 세상 모든 사물의 대표주자가 아니었을까. 사과를 잘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이 세상 전체를 잘 그릴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었을까. 고흐가 밤하늘의 별 하나만으로도 온 세상을 감동시켰듯이, 모네가 자기 집 정원의 연꽃들만으로 여전히 전 세계의 관객들을 사로잡고 있듯이. 세잔은 사과 하나로 파리뿐 아니라 세상을 놀라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세잔의 사과’에 경탄을 금치 못한 것에 비해 ‘실제 세상의 사과’에서는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사과는 너무 흔하고 평범하니까. 사과 속에서는 어떤 놀라움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게다가 사과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담겨있지는 않다고 믿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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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화와 역사를 더듬다보니, 사과는 단지 정물화의 오브제가 아니라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의 상징임을 알게 되었다. 언뜻 떠오르는 에피소드들만 합쳐 봐도, ‘사과에 얽힌 이야기들’은 꽤 많다. 우선 아담과 이브가 ‘수치심’과 함께 ‘욕망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게 만들었던 선악과가 바로 사과였고, 그리스 신화에서 비너스가 자신의 아름다움과 넘치는 사랑을 과시하며 손에 들고 있는 과일도 바로 사과다. 뉴튼에게 만유인력이라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과학적 아이디어가 떠오르게 만든 영감의 매개체도 사과다. 여섯 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100 발자국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석궁으로 명중시킨 스위스 민중의 영웅 빌헬름 텔의 이야기에서 극적인 긴장감을 최고조로 높이는 미장센도 바로 사과다. 흔해 보이지만, 바로 그 ‘평범함’ 때문에 어디서나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사과. 사과는 단순한 음식을 넘어 상징과 은유로 가득 찬 사물이다. 사과는 뭔가 사람에게 ‘생각하게 만드는 사물’의 대표주자다.

인간이 한 처음 하나님을 거역하고 죽음에 이르는

금단의 나무 열매를 맛봄으로써

죽음과 온갖 재앙이 세상에 들어왔고

에덴까지 잃게 되었으니, 이윽고 한 위대한 분이

우리를 회복시켜 복된 자리를 도로 얻게 하셨으니,

노래하라 이것을, 하늘의 뮤즈여.

-밀턴의 <실낙원> 중에서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에서 사과는 유혹에 대처하는 남녀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매개체다. 이브는 뱀이 유혹하는 사과를 따서 아담보다 먼저 먹어보았고, 아담은 그 사과를 먹기는 먹되 미처 다 삼키지 못했는지 아직도 남자들의 목울대에는 ‘아담의 사과Adam's apple’가 슬픈 흔적기관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다고 호통을 치는 신에게 자신의 하나뿐인 짝 이브를 고자질하기까지 했다. 뱀은 아담과 이브를 유혹할 때, ‘선악과를 먹는다고 해서 죽는 것은 아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오히려 신을 닮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선악과를 둘러싼 이 유혹의 전제는 두 가지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신의 경고는 거짓말이다’라는 것. 그리고 ‘인간은 신에게 복종해야만 하고, 신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전제는 틀렸다’는 것. 창세기는 ‘뱀의 유혹에 먼저 넘어간 것’은 이브이고, 아담은 ‘이브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라고 들려주고 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호통을 치는 신에게 ‘이브가 그랬어요! 제 잘못이 아니라 이브의 꼬임에 넘어간 것입니다!’라고 변명하는 아담은 용기와 위엄과는 거리가 먼 소인배처럼 보인다. 이브는 사실대로 ‘뱀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고백하지만, 아담은 그 순간 이브를 버리고 자신만 신에게 용서받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선악과의 대명사 사과는 타락과 죄의 상징만은 아니다. 라틴어로 ‘사과’를 뜻하는 ‘malum’은 ‘악’을 뜻하는 ‘malum’과 발음이 같기에 사과는 선악과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누구나 한 번쯤 빠져들 수 있는 유혹의 상징이자 동시에 프로메테우스의 불처럼 ‘인간이 신에게서 훔쳐온 지식과 가능성’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신의 입장에서 보면 선악과는 ‘인간의 첫 번째 배신’이겠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선악과는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을까.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신의 저주를 받은 여성은 임신의 고통을, 남성은 평생 자신의 힘으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고통을 끌어안게 되었지만, 동시에 여성은 ‘생명을 잉태하는 기쁨’을, 남성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자유’를 얻게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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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에서 사과는 치명적인 양가성을 지닌 상징이다. 허리띠로도 죽일 수 없고, 독이 묻은 빗으로도 죽일 수 없었던 백설공주를 마침내 ‘확실히 끝장낼 수 있는 무기’로서 사과는 왕비에게 선택된다. 왕비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비밀의 방으로 들어가서 독이 잔뜩 들어간 강력한 무기로서의 사과를 조제한다. “그 사과는 보기에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하얗고 붉으스름하여 아주 먹음직스러웠습니다. 그러나 한 입만 적어도 그 자리에서 죽을 정도로 독성이 매우 강했습니다.”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의 경고로 아무도 집 안에 들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백설공주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는 왕비는 그녀를 감언이설로 현혹한다. “독이라도 들어 있을까봐 무서운 거요? 자, 내가 이 사과를 둘로 자를 테니 아가씨는 붉은 쪽을 먹어요. 난 하얀 쪽을 먹을 테니.” 하지만 교묘하게 만들어진 이 사과에는 이미 붉은 쪽에만 독이 들어 있었고, 탐스러운 사과를 한 입 베어 깨물자마자 백설공주는 쓰러지고 만다. 강렬한 유혹과 치명적인 독성을 지닌 백설공주의 사과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웃나라 왕자가 죽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눈부신 백설공주를 바라보며 그녀를 못 보면 하루도 살 수 없게 되었다고 고백하자, 백설공주의 관을 지키고 있던 난쟁이들은 그녀를 왕자에게 보내주기로 결심하고, 왕자의 시종들이 관을 어깨에 메고 옮기는 순간, 관이 흔들려 독사과가 공주의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죽음의 상징이었던 사과는 이제 부활과 사랑의 상징으로 다시 거듭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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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과는 현대인에게 ‘매일 사과 한 알이면 암 걱정을 할 필요 없다’는 식의 건강의 상징이 되었고, 애플사의 사과는 ‘뭔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상징이 되었다. 사과는 바야흐로 첨단기술의 상징, 최신 유행의 상징, 창조적 상상력의 상징이 된 것이다. 특별하거나 화려한 상징이 아니라 사과라는 가장 단순하고 보편적인 상징을 통해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애플사의 마크로서의 사과는 그 역사성과 신화성을 넘어 또 다른 현재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창조적인 사과의 상징은 시인들의 붓끝에서 흘러나온다.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에는 사과 한 알에 담긴 온갖 자연의 흔적, 인간의 숨결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사과를 먹으며

　 함민복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의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 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흙에서 멀리 도망쳐 보려다

　흙을 돌아가고 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함민복, 『어느 우울씨의 하루』, 세계사

조정인 시인은 「사과 따기」라는 시에서 이렇게 속삭인다. “나무는 그해의 잘 익은 태양을 이고 있고 신의 의중은 뿌리 밑에 스며 있다”고. “그의 의중이 재채기처럼 튀어나가 주렁주렁 나무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시인이 사과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은 “아담의 호기심 많은 여자에 관한, 의혹투성이 미제사건에 손을 대듯” 설렘 가득한 탐구의 행위다. 시인이 사과를 한 입 아삭하게 베어 먹는 순간, 시인의 눈은 밝아져 아담 내외가 구부정하게 걸어가는 “신기원의 지평선이 보인다”고. 사과를 먹을 때마다 우리는 인류의 기원과 마주하는 것이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풍경 속으로, 신이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한 ‘인류 역사의 시작’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시인이 사과를, 아니 “지상에 흘린 에덴의 풍문”을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시인의 가슴 속으로는 신조차 막을 수 없는 불온과 광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지상에 흘린 에덴의 풍문을 한 입 베어 물었다 불온을 부추기는 균이 고요하게 번식해갔다.” (조정인, 「사과 따기」 중에서) 시인에게 사과는 “하느님의 붉은 혁명”이자 “태아들의 따뜻한 머리통 같은, 지구의 뇌관 같은”(「서쪽을 불러들이다」)존재다. 우리는 사과 향기를 통해 생명의 원시성을, 자유의 발화점을, 저항의 불꽃을 들이마시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