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증언자들,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스실에서 죽음을 당한 자들이야말로 진짜 증인인 셈이다. 하지만 죽은 자들만이 진정한 증인이라면 도대체 누가 증언할 수 있을까? ―서경식, 「긍지 높은 촌놈 / 신경호」 중에서

천지간에 흥건한 슬픔을 기록한다. (…) 이 책이 슬픔의 박물관이기를 바란다. 유족께서는 부디 읽지 않았으면 싶다. 후일에라도 이 책을 펼치면 견딜 수 없을 테니 부디 만나지 않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전영관, 서문 중에서

독서는 내 몸 전체가 책을 통과하는 것이다. 몸이 슬픔에 '잠긴다', 기쁨에 '넘친다', 감동에 '넋을 잃는다'……내게 가장 어려운 책은 나의 경험과 겹치면서 오래도록 쓰라린 책이다. ㅡ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교양인 刊), 프롤로그 중에서

해가 바뀌었다. 끔찍했던 2014년이 지나갔다. 세밑 특유의 아쉬움마저 느낄 수 없이, 한시라도 빨리 뛰쳐나가고 싶던 참담한 한 해였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의 시커먼 바닷물에 갇혀 그날에서 한시도 나아가지 못하고 묶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만과 침묵, 무관심과 망각에 반하여 지금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다. 하여 신간의 별자리는 여전히 고통의 기억과 떠도는 존재들의 주소지를 더듬는다.

“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는 인간에 대한 이해이고, 정치적 지배에 대한 마지막 저항력”

두어 달 전 SNS 상에서 '내 인생에 영향을 준 책 10권'을 꼽는 릴레이가 있었다. 친구로부터 지명을 받았을 때, '어떻게 열 권만을 꼽으랴' 싶어서 꾀를 내었다. 감성적 상상력에 도움을 준 책 10권, 이성적 인식에 도움을 준 책 10권, 그리고 '전작을 읽게 만드는 저자들은 따로'란 식으로 헤아려 보았다. '서경식'이란 이름은 그 세 번째 목록에 속한다. 1993년 창비에서 나온 첫 책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1)를 만난 이후 그의 책이라면 가리지 않고 읽게 되었다. 한국 국적을 가진 재일조선인 2세이자, 음험하고 잔학한 정치적 상처로 들씌워진 우리 현대사의 한 귀퉁이가 곧 자신의 가족사이기도 한 사람. 모국어를 잃고, 유려한 일본어 구사 능력으로 상을 받았다는2) 그는 '디아스포라'이다. 그래서 그의 예술관藝術觀, 예술체험, 작품 독해를 비롯하여 모든 글에는 특별한 자신의 사정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인간의 삶(역사)과 예술(작품)을 함께 본다.

미술 전문가가 아닌 서경식의 미술 이야기들은 일반적인 리뷰나 비평들과는 좀 다르다. 우선 자신의 심정에 맞는 작품을 고르고, 작가나 작품에 관한 설명은 문맥상 꼭 필요한 만큼만 다룬다. 그보다는 자신의 삶(역사)에서 얻은 통찰과 감성을 통해 주관적 해석을 차분하게 스케치한다. 그러나 담백하고 조용한 그만의 감상은 독자에게 깊은 공명과 반향을 안기며 숙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 앞서 인용한 정희진의 '독후감'에 관한 정의3)처럼 그의 미술 감상은 단지 눈으로 보고 지식과 머리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과 고난의 시간을 지나온 디아스포라의 육체를 관통하여 솟아나는 고유한 감성적 해석을 오롯이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글을 만나면 어느새 마음이 젖고, 예술과 정치의 상황적 맥락이 교직되며 자아내는 특유의 정서가 독자의 감수성에 부지불식간 스며들어 오래도록 그 향기를 간직하게 된다. 이것은 무척 슬프고 아름다운 미적 체험이며 책읽기의 드문 경험이다.

타자와의 대화, ‘우리’를 향한 질문

그런데 이번에 나온 『나의 조선미술 순례』는 앞서 나온 세 권의 미술 에세이와 조금 다르다. 여전히 삶의 실천으로서의 미술, 역사적 맥락에 충실한 작품 해석, 무엇보다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를 먼저 이해해야 하는 입장 등은 마찬가지다. 또한 미술이란 거울을 통해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순례 여행이란 점은 같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조선 민족'이 일구어낸 미술이란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탐색의 일환으로, 과연 '우리'의 의미는 무엇이고, 우리의 미술은 무엇인지, 민족의 범위를 어떻게 포용력 있게, 누구도 배제되지 않고, 배타적이지 않게 지칭할 수 있는지에 관한 고민과 질문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저자는 솔직히 칼집처럼 빗금을 넣은 ‘우리/미술’을 거명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그보다는 시공간적으로 넓은 차원에서 한반도 이북은 물론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모두 포괄하는 의미에서, 그리고 재일조선인으로서 ‘학대’ 받았던 용어인 ‘조선’을 구출하는 차원에서 ‘논쟁적인’ 제목이 정해졌음을 언급한다. 또한 형식 역시 주제에 맞추어 이쾌대와 신윤복 두 사람을 제하고는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그리고 송현숙과 홍성담 등 생존 작가들이자, 각기 다른 이유로 주변적인 작가들을 직접 대면하여 진행한 인터뷰를 담았다. 따라서 이전의 순례기에 비해 저자의 서술에서 객관적인 거리가 느껴지는 반면 작가들의 생생한 목소리와 구체적인 작업 경험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 아직 우리 미술계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하고 있는 이쾌대의 시기별 작품들을 당대 일본의 작가들과 비교 분석한 내용이나, 신윤복이란 작가와 작품의 ‘실체’를 규명하고자 하는 저자 나름의 설득력 있는 시각도 새롭고 흥미롭게 느낄 수 있다.

“예술과 정치는 당연히 떼어놓을 수 없다. 예술은 아름다움이라는 가치만 충족하면 되지, 정치적으로 너무 따지지 말자는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그 주장 자체가 이미 정치적이다. (…) 예술에 정치를 완전히 몰아내려는 모종의 이야기들이 어느 정도 정치적인지에 대해 늘 주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서경식

대표적 SNS인 페이스북에 2014년 4월 16일 이후 한 시인이 매일 글을 올렸다. 수많은 작가들이 너무도 엄청난 비극적 참사 앞에서 숨죽이고 말을 잊은 채,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망연해 있을 때 그 시인은 분노의 ‘폭발을 희망하며’ 애통한 주검과 남겨진 유족(“우리들 모두가 잠재적 유족인 까닭이다”)의 슬픔을 기록했다. ‘이해득실보다 옳고 그름을 앞에 두고 사는 바람에’ 누구보다 까칠한 그는 무능하고 사악하기까지 한 사회·정치적 상황을 그 어떤 칼날보다 준열하게 질타하고 나선다. 동시에 예의 시인으로서 ‘도무지 문장으로도 이어나가지 못할’ 지극한 참혹과 ‘흥건한 슬픔’을 산문散文으로 진혼곡이 된 산문시散文詩로 형용하며, 세월호 유족들의 피눈물 고이는 가슴을 깊은 공통감으로 헤아린다. 뿐만 아니라 팽목항으로, 진도체육관으로, 안산으로, 더 자주 찬바람 부는 광화문 광장에서 실천으로 함께 했다. 그 시인이 전영관이다. 그렇게 분노와, 저주와, 탄식과, 피울음이 새겨진 글 중에서 4월 17일부터 9월 7일, 추석 전날까지의 기록을 모은 책이 『슬퍼할 권리』이다.

실재해선 안 될 절창絶唱, 악마가 날뛰는 세상의 절창切創

“잊히는 게 아니라 가라앉는 거다. 가라앉아도 호명하면 순식간에 전부가 떠오르는 기억일 것이다. 세월호가 우리에게 그렇다.”ㅡ서문 중에서

“아빠는 이제 더운 물에 몸을 담그지 못하겠구나 / 설거지 그릇에 담긴 물만 봐도 엄마는 몸서리를 치겠구나 / (…) / 평생 녹지 않을 빙하를 품은 가슴이라서/눈물이 평생 마르지 않을 목숨이라서….” ㅡ 「젖은 이름들」 중에서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날부터 매일의 기록이니 당연히 구조에 대한 기원, 당국에 대한 분노와 간청, 저주와 비판, 그리고 기다림과 애끓는 통한이 절절하다. 특히 부모의 심정에서, 신원이 밝혀진 주검의 이름으로 써내려간 글들은 이미 페이스북에 올랐을 때 꾹꾹 눈물을 삼켜가며 읽었는데도 다시 또 가슴을 슬픔의 바다로 자꾸 무너지게 만든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차마 그렇게 수식하면 몹쓸 노릇인데, 비탄의 눈물에 무겁게 가슴이 젖는데 자꾸만 ‘절창’이란 단어가 흥건한 슬픔을 헤치고 떠오른다. 그런데 그 절창이란 단어는 “뛰어나게 잘 지은 시, 혹은 노래”라는 의미와, “칼이나 유리조각 등 날카로운 물체에 의해 갈라진 상처, 생체 조직의 연결이 끊어지고 혈관이 절단되어 출혈이 많은 손상”이란 의미가 동시에 겹쳐져 맴돈다. 그리고 후자의 절창이란 이편저편, 우리 내면과 외부 세계 가릴 것 없이 찌르고 찢고, 자르는 그것이다. 시인이 이 무자비한 ‘세상의 참혹’에 추상처럼 진노하여 순수한 양심으로 시퍼렇게 벼려 휘두르는 펜촉이 남기는 뜨거운 서정이자 시린 자상刺傷이다.

페이스북에서 매일 시인의 담벼락을 엿보고 지내던 5월 어느 날, 세월호에서 엄마, 아빠, 형을 모두 잃고 혼자 남은 요셉이 이야기를 읽었다. “참극을 저지른 저들이 느긋하게 잠든 시간에 요셉이가 혼자 울고 있을 거라는 예감을 희석시키지 않겠습니다. 동정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애정이 아니라 본성입니다.” 이 말이 가슴을 쩍 가르고 새겨졌더랬다. 책장 갈피마다 이렇게 박히는 문장들이 지천이다.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책의 수익 모두 유가족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세월호’는 여전히, 언제까지나 우리 모두에게 현재진행형일 것이다. 시인의 마지막 문장으로 기록과 기억의 당위를 다시 새긴다.

“이 책이… 박제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슬픔의 보호구역이기를 희망한다. 역사는 저들의 기만과 무능을 기록할 것이고 우리는 저들의 악랄함을 기억할 것이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고 슬픔 또한 퇴색되지 않는다.… 슬픔보다 강인한 근육도 없다. 잊지 않겠다는 다짐 앞에 가만있지 않겠다는 결의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