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인들은 책이나 잡지 또는 신문을 읽으며 이것들을 국한문을 혼용해서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지낸다. 적어도 30년 전까지는 이 땅에서 한글만 써서 만드는 인쇄매체는 보기 어려웠다.
1976년 3월에 창간한 <뿌리깊은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한글만 사용한 ‘한글전용’ 잡지였다. 이 잡지가 나오기 전까지는 여성지, 심지어 청소년이 보는 잡지들도 국한문을 섞어 썼다. 신문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일반 단행본들도 으레 한자를 섞어 써야 책이 되는 줄로 알았다. 초등학교 교과서만 한글전용이었다.

초등학교에서는 한글만으로 공부하면서 학교 밖에서는 왜 언어생활이 달라야 하는지에 처음으로 의문을 던진 책이 <뿌리깊은나무>였다.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이면 누구든지 읽을 수 있도록 만들자는 것이 이 잡지의 기본방침이었다. 그런데 한글전용은 한자를 그냥 한글로 옮겨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1919년 3월 1일에 발표된 독립선언서가 한글로만 옮겨 적혀서는 아무리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도 쉽게 읽을 수 없듯이 한글전용이 되려면 글 속의 단어들이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써야 하고, 또 그에 앞서 문장이 우리말 어법에 맞는 문장이 되어야 한다.

<뿌리깊은나무>는 잡지에 실리는 모든 글을 손질하는 잡지였다. 어려운 한자말을 쉬운 말로 바꾸고, 한문투나 번역투의 문장, 어법이 틀린 문장을 한글표현에 알맞은 문장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편집실에 들어온 원고는 일단 담당자가 읽으며 원고지 위에서 손질을 했다. 그 손질한 글은 타자기로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다음에는 다른 직원이 다시 한 번 손질을 했다. 다음에는 편집 책임자가 손질을 했고, 다음에는 발행인까지 나서서 손질을 했다. 그 과정에서 손질은 단어나 문장표현에만 한정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부실했던 내용을 보완하는 일, 또 글의 주제를 더 돋보이게 하고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더하는 일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필자들 중에는 제가 쓴 글이 받은 성형수술을 고마워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손질이 글의 개성을 죽이고 획일화해서 글맛을 없애버린다고 불평하는 이들도 있었다. ‘획일화’의 불평은 아무래도 한자말과 한문투 문장에 더 익숙한 분들한테서 많이 나왔다. 다른 잡지사나 출판사 또는 신문사들에서는 한동안은 이런 불평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 한글전용을 채택하기 시작해서 1990년대에는 마침내 거의 모든 잡지, 일반 출판물 그리고 신문들까지도 한글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이처럼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이후 실로 오백쉰 몇 해 만에 한글을 이 땅의 민중언어로 제자리를 잡게 만든 매체였다.

<뿌리깊은나무>에서 일하기 전까지 나는 한글만을 써서 책을 만든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글전용은 내게 완전히 새로운 충격이었다. 여기에 더해 이 잡지에서 내가 받은 새로운 충격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편집’을 편집자가 하지 않는 것이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와리쓰케(割り付け)’라고 불렀다. 와리쓰케는 편집의 핵심 작업으로 대개 편집장의 몫이었다. 편집장은 기획과 원고 부탁, 교정의 책임자이자 와리쓰케의 책임자였다. 인쇄매체에서 지면을 배정하고 구성하는 일, 영어로는 레이아웃(layout)이라는 것이 와리쓰케다.

입사 두 해째에 편집장이 되었던 나는 선배 편집장이 하던 대로 모눈종이 또는 지난호 잡지의 지면에 붉은 줄을 몇 가닥 그어 와리쓰케라는 것을 해서 인쇄소에 넘겨주며 책을 만들었다. 손재주가 없었던 나는 그 와리쓰케라는 것을 끔찍이 혐오하면서 했다. 그런 나에게 <뿌리깊은나무>는 참으로 경이로운 풍경으로 펼쳐졌다. 여기에서는 편집자가 ‘편집’을 하지 않았다. 디자이너가 그 일을 했다.

인쇄매체가 디자이너의 손을 비는 것은 1970년대의 한국 출판풍토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시도였다.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한창기 씨는 오감이 비범하게 발달한 사람이었다. 한국문화를 지극히 사랑했고 언어감각이 뛰어나 한국어는 거의 전공학자 수준이었던 그는 눈 또한 남다르게 뛰어났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귀신같이 알아보는 심미안이 있었고 아름답지 않은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결벽증이 있었다. 이런 그의 눈이 이 땅에 처음으로 디자인이 제대로 된 잡지를 탄생하게 만들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우리 출판문화에 ‘디자인’을 심은 첫 매체였다. 
<뿌리깊은나무>는 창간한 지 네 해 반 뒤인 1980년 8월호를 끝으로 더는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의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이 이 잡지를 폐간시켰기 때문이었다. 한글전용이나 잡지의 꼴이 폐간의 빌미가 된 것은 물론 아니었다. 이 잡지는 그 시대의 사회적 담론의 한 축을 맡았던 매체였다. 그것이 군사정권의 비위를 거슬렀고 마침내 잡지의 수명을 단축하게 만들었다.

<뿌리깊은나무>는 사라져가는 옛 문물들을 다루는 기사들을 한 달도 거르지 않았다. 짚신, 담뱃대, 바늘집, 맷돌 같은 민속을 시시콜콜 소개하는 ‘민중의 유산’이라는 난도 포함되었다.  전통문화의 재발견과 복원은 이 잡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한 기둥이었다. <뿌리깊은나무>에는 음악ㆍ미술ㆍ문학ㆍ연극을 다루는 ‘예술비평’이 있었고, 또 ‘서평’이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광고와 만화까지 다루는 ‘대중문화비평’이 있었다. 이 비평난들은 이 잡지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기둥이었다. 우리 문화의 여러 부문에서 비평하는 풍토를 일구는 데 앞장섰던 매체가 또한 <뿌리깊은나무>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 잡지는 실은 그 전체로서 하나의 ‘비평매체’였다. 책의 대부분 글들, 그 행간에는 사회현상을 비판의 눈으로 들여다보려는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뿌리깊은나무>는 1972년의 유신헌법과 1974년의 대통령 긴급조치 이후 나라 안에 정치 상황을 둘러싼 긴장감이 날로 더 커지고 있던 국면에서 등장해 민속ㆍ문화ㆍ예술에 대한 관심과 나란히 경제ㆍ사회 여러 부문에서 소외되고 있는 것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였다. 경제지상주의의 그늘에서 고통 받는 노동자와 농민들이 거기에서 빠질 수 없었다. 남성우월주의가 판을 치던 세상에서 여성들의 권익을 위한 논의에도 지면을 아끼지 않았다. 많은 독자들이 그것들을 즐겨 읽었다.

요즘은 인쇄매체가 전자매체에 눌려 빛을 잃었고, 그와 더불어 사회적인 담론이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비평문화가 거의 사라졌고 우리 시대의 과제들에 대한 깊은 논의도 사라져버렸다. <뿌리깊은나무> 같은 잡지가 그리워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