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거탑>과 한류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오히려 <태왕사신기>와 한류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요, <하얀거탑>의 원작이 일본 소설이고, 한국판 <하얀거탑>이 다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전혀 생뚱맞은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드라마는 보통 시청률 30%를 목표로 기획됩니다. 농담입니다만, 영화를 보는 사람은 돈도 있고 애인도 있고 친구도 있는 사람들이지만, 집에서 TV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대체로 돈도 애인도 없고, 불러주는 친구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2,30대 여성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집에서 TV드라마를 봅니다. 사실 이 차이는 드라마를 기획하는 데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가 됩니다. 30%의 시청률을 잡으려면 자연히 뭔가 전문적인 지식이 들어가기보다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내용들로 채워지게 되죠. 메디컬드라마면 병원에서 사랑에 목숨 거는 드라마, 경찰드라마면 경찰이 사랑에 목숨 거는 드라마, 이런 식입니다. 저는 조금 냉소적으로 우리나라 드라마를 세 가지 장르로 나눠보곤 합니다. 하나는 사극, 하나는 주부생활, 또 하나는 노처녀 일기장. 방송사에서 드라마 시나리오 공모를 하면 보통 한 방송사에 약 4,000편 정도가 들어오는데, 이 중 2,000편 정도는 대본이라 볼 수 없는 수준의 것들이고, 남은 2,000편 중 90%는 ‘어젯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에 대한 이야기지요.

<하얀거탑>을 두고 드라마계의 돌연변이라고 하시는데, 사실은 저처럼 남자 드라마작가의 존재 자체가 돌연변이입니다. 지금과 같은 구조에서는 남자 드라마작가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냐, 사랑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려면 제작비가 두 배로 들어갑니다. 그러니 남자 작가들은 주로 사극이나 시대극으로 투입되는데, 거기까지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어요.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는 사랑이야기만 가지고 일본이나 중국에 가서 선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하죠.

<겨울연가>가 크게 이슈가 되었지만, 사실 일본의 젊은 사람 중에는 배용준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를테면, 친구도 없고, 남편의 사랑도 못 받던(웃음) 일본 아줌마들의 ‘저런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줬으면 어떨까’ 하는 판타지가 폭발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 예전에는 톱 배우들이 로맨틱 드라마에 출연하려고 하고 그런 배우를 섭외하게 되면 기업들이 투자에 나서곤 했습니다만, 이제 그런 로맨틱 드라마는 우리나라에서도 외면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권상우, 김희선 주연의 <슬픈연가>도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어요. 이제 드라마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꿔야 하느냐. 우리나라 원작시장은 매우 빈약합니다. 일본처럼 인구가 1억은 되어야 그 안에서 좋은 작품도 나오고 나쁜 작품도 나오고 하면서 자급자족될 가능성이 있지요. 제가 예전에는 추리소설을 쓰기도 했었는데, 이제 추리소설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만화나 인터넷소설 시장도 별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일본 원작을 들여오는 것이 하나의 방편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 소설은 사실 정서상 우리나라 소설과 공통점이 많은 데다 재미있는 작품도 많죠.

그러나 일본 원작을 그대로 가져와 방영한다고 해서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드라마와 우리 드라마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다혈질이라면, 일본드라마의 인물들은 상당히 서정적입니다. 우리나라 드라마에 비해 일본드라마는 좀 느리기도 하지요. 우리나라에서는 드라마 전개가 좀 느리다 싶으면 바로 채널이 돌아갑니다. 따라서 일본 원작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일본드라마와 한국드라마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요조숙녀>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작 <야마토나데시코やまとなでしこ>는 11부작이었는데, 저도 참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서는 원작료, 톱 배우 섭외비용 등의 이유로 20부작이 되었습니다. 11부작을 20부작으로 만들려면 일단 방송횟수가 2배 정도 되죠. 일본드라마 러닝타임이 43분, 우리나라가 58분이라는 점과 또 한국에서는 더 스피디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보면 분량이 3배 정도 늘어나야 하죠. 그러면 원작이고 뭐고 없어집니다. 새로운 인물이 뜬금 없이 등장하곤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요조숙녀> 외에도 일본 원작이 들어와서 성공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나마 <하얀거탑>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는데요, 저는 최소한 ‘일본 원작 드라마보다 방송횟수가 많아야 한다, 러닝타임이 더 길다, 전개가 빨라야 한다’ 정도는 알고 시작했거든요. 원작이 있으면 그대로 대본으로 만들면 될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문화적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에요. <하얀거탑>의 원작자는 일본에서 작가로 존경받고 있는 84세 할머니 야마자키 토요코(山崎豊子)입니다. 저는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혹시 편지라도 보내면 이분이 허락할까 해서 드라마 쓰는 일보다 더 공을 들여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이런 얘기를 적었지요.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시대를 바꾸고, 나라를 바꿔서 계속 재탄생되는 것은 그 원작의 향기와 정신이 훼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작품은 작가의 정신적 자식인데, 자기 정신의 자식이 타국에서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을 누가 바라겠느냐. <하얀거탑>을 제가 다시 쓰게 되면 원작이 가지고 있는 향기와 주제를 살리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

제가 이렇게 원작의 판권을 확보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자랑을 했더니 전부 ‘이건 안 된다’고 하더군요. 멜로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드라마로 만들 수 있는 주제는 몇 개가 안 됩니다. 보통 네 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형제간 강력한 라이벌 관계인 카인과 아벨 이야기, 신데렐라 이야기, <청춘의 덫> 같은 사랑과 배신 이야기, 그리고 성공 스토리입니다. 어떤 욕망을 가진 주인공이 그 욕망을 향해 나아가면서 장애에 부딪히고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 이게 바로 드라마입니다. 멜로는 사랑에 목숨을 거는 인물들이 사랑을 쟁취해 나가고, 성공 스토리는 성공을 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욕망이 있어야만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드라마가 성공하느냐 마느냐는 멜로가 있나 없나가 아니라 주인공의 욕망이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해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저는 <하얀거탑>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준혁이라는 인물의 욕망이 아주 강렬하고, 그 욕망을 향해 나아가면서 많은 장애들을 극복해 나가잖아요. 이 작품을 한국화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오히려 주인공 장준혁이 악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 인물의 성격이나 성품은 항상 딜레마 속에서 나오는데, 그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물을 대변하지요. 예를 들어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것이 캔디의 캐릭터이지 않습니까. 계속 캔디에게 외롭고 슬픈 상황을 던져 주지요. 그리고 캔디는 절대 울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야 캐릭터가 생명력을 갖게 됩니다. 장준혁도 마찬가지입니다.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과 나쁜 짓을 해서라도 그것을 넘어서는 상황을 던져 줍니다. 착한 일과 나쁜 일이 아니라 나쁜 일과 아예 포기해야 할 일을 던져 주면, 사람들은 도리어 그 욕망에 동조하고 응원하게 되지요.

또 하나의 난제는 1968년도 쿄오토의 일본 의학을 지금의 현대의학으로 변이시키는 문제였습니다. 지금은 내시경 검사만 하면 위암은 다 진단할 수 있지만, 1968년도에 위암은 치명적이었습니다. 이런 점들을 적절히 변형해야 했죠. 원작의 경우 주인공이 계속 담배를 피우다 폐암으로 죽게 되는데,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흡연 장면을 쓸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일본에서는 교통사고 장면을 쓸 수가 없어요. 일본드라마 대부분이 자동차 회사의 협찬을 받기 때문이죠. 그리고 일본과 우리나라는 그 의학체계가 다릅니다. 우리는 선교사 알렌을 통해 서양의학이 들어왔기 때문에 미국체계에 가깝지만 일본은 독일체계에 가깝습니다. 용어도 모두 다릅니다. 또 일본원작에서는 주임교수가 되는 이야기이지만, 한국에서는 외과과장이 되는 이야기죠.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외과과장을 순번제로 하기 때문에 드라마상의 암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는 그런 자리가 딱 하나 있고, 심지어 종신제기 때문에 그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 결국 다 나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참 많이 다릅니다. 또 원작의 인물들은 기본적으로 일본 정서에 맞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 인물 설정을 그대로 도입하면 우리나라 시청자들은 거부감을 갖게 되죠.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주인공의 복잡한 여자관계가 시청률과 별 상관이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용납이 안 됩니다. 그래서 장준혁의 애인이야기를 성적인 장면 없이 처리해서 실제로는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정확히 인지되지 않도록, 우습지만 이런 식으로 일본정서를 한국화하는 것이죠.

<하얀거탑>이 방영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일본에서도 여론이 분분했습니다만 나중에는 일본에서 오히려 저를 인터뷰하러 오더군요. 그리고 이제 한국판 <하얀거탑>이 다시 일본으로 역수출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한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원작이 일본으로 가거나 일본 원작이 우리나라로 오거나, 어느 나라로 오고 가건 간에 그 나라의 문화와 결합되지 않으면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일본드라마가 우리나라로 들어와 우리나라 정서와 맞물려 재탄생할 때 우리나라에서 호응을 받을 수 있고, 반대로 우리 드라마가 일본으로 가더라도 그러한 변환과정을 거쳐 새롭게 탄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