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에서의 한류와 포스트한류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사실 애니메이션이 한류를 일으킨 적은 없었잖아요. 그래서 오히려‘한국 애니메이션은 왜 한류를 일으키지 못했는가’에 대해 짚어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갈까 합니다.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지역별 수출 현황을 보면, 미국과 일본에 대한 수출이 가장 많습니다. 그러나 수출의 대부분은 창작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의 하청작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입되는 애니메이션 역시 미국과 일본의 것이 대부분이지요.
그렇다면, 왜 우리 애니메이션 산업은 아시아 지역에 관심을 갖지 못했느냐, 첫번째 이유는 아시아 시장 자체에 대한 판단이 미흡했다는 데 있습니다. ‘아시아 시장은 작다’라는 선입견이 알게 모르게 있었던 것이죠. 우리나라가 수출하는 애니메이션이 보통 전 세계 20~30개국 정도에 팔리는데, 사실 아시아 지역에서의 수익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고, 수익이 적다보니 아시아 지역을 적극적인 수출 대상으로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원더풀 데이즈>를 제작하면서 이런 생각을 바꿀 만한 큰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원더풀 데이즈>는 제작비가 꽤 들었던 애니메이션인데, 국내 투자자가 생기기도 전에 제일 먼저 투자를 해 주었던 곳이 타이완의 한 그룹이었어요. 이 그룹에서 <원더풀 데이즈>의 파일럿 필름(pilot film)투자유치를 위해 제작된 견본작품을 보고 타이완 판권을 사겠다고 한 것인데, 굉장한 규모였습니다. 타이완에는 그 정도의 투자가 가능할 만큼 이미 큰 규모의 애니메이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아시아 시장에 실제로 갖다 팔 만한 애니메이션 작품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우리 애니메이션의 경쟁력 문제인데요, 이는 음악이나 온라인게임, 드라마나 영화가 아시아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갖게 되었나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역으로 그 원인을 파악해 볼 수 있겠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중국 Star TV의 ‘Seoul Vibration’ 등 방송제작지원, 2001년 중국과 한국 TV프로그램 완전 수입 개방 등의 정부 지원이 있었습니다. 저희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라디오 들으면 전부 팝송만 나왔었는데, 국내 가요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이제 판도가 완전히 바뀌었지요. 영화의 경우도 <쉬리> 성공 이후 투자펀드가 활발해져 많은 작품이 만들어지고 그 안에서 배출도니 우수한 작품들의 힘을 바탕으로 재투자가 활성화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영화, 음악, 드라마 분야의 시장 활성화로 인한 ‘질 좋은 콘텐츠’의 생산과 결과가 새로운 작품으로 재투자되는 ‘선순환구조’가 한류의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선순환구조를 갖추기 위해서는 건강한 게이트웨이(gateway)소비자와 창작물을 접점이 되는 매체, 방송, 인터넷, 극장 등를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게이트웨이가 건강해야 부가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고, 이것이 다시 좋은 작품을 개발하는  데 재투자됨으로써 선순환구조가 완성되는 것이죠.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은 사실 그동안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하청작업에만 골몰해 있다 보니 이런 구조를 갖추기가 힘들었어요. 온라인게임만 해도 인터넷망과 기술이라는 한국만의 특별한 게이트웨이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 영화산업처럼 극장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게이트웨이나 스크린쿼터와 같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없었습니다.
건강한 게이트웨이를 확보하는 것과 함께 충분히 재생산을 이루어 낼 만큼의 규모를 갖추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문화산업 전체를 지속적으로 선순환시키기에 한국 시장은 너무 협소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것이지요. 정부는 2005년부터 애니메이션 총량제를 시행했습니다. 국산 창작애니메이션을 전체 방송시간의 1% 이상 편성하도록 한 것이죠. 이 총량제 실시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편수가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게이트웨이를 확보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럼, 중요한 게이트웨이인 방송에서 그동안 우리 애니메이션이 얼마나 찬밥 대접을 받아왔는지 한번 볼까요?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채널 애니원TV와 투니버스의 예를 보겠습니다. 애니메이션만 방영하는 전문채널인데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편성된 시간은 새벽 3시, 새벽 4시, 새벽 5시, 이렇습니다. 그 시간에 누가, 심지어 어떤 아이들이 시청을 하겠습니까. 공중파 TV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우리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개구리중사 케로로>, 이 작품은 일본에서 시청률 3%도 안 되었던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계속 틀어대죠. 애니메이션을 수입한 업체가 관련 상품도 대량 수입했기 때문에 상품 팔기 위해서 틀고 또 틀고 하는 것입니다. 총량제에 맞추기 위한 요량임이 분명한데도 방송사는 한국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어 광고주가 붙지 않는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렇다면, 방송사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우리 애니메이션은 정말 재미가 없느냐. <믹스마스터Mixmaster>는 전 세계 23개국에 수출된 작품입니다. 43억의 제작비가 들었지만 이미 수익이 제작비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영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애니메이션 전문채널 니켈로디온(Nickelodeon)에서 시청률 7위를 차지하기도 했죠. 그런데 이 작품이 한국에서는 시청률이 거의 바닥이었습니다. 새벽 2시에 방영됐거든요. <뽀롱뽀롱 뽀로로>의 경우는 하나TV주문식 방송 에듀테인먼트 분야 시청률 1위에요. 편성시간과 관계없이 시청자가 직접 선택해서 보는 주문식 방송에서는 우리 애니메이션의 시청률이 높다는 것이죠. <뽀롱뽀롱 뽀로로>는 프랑스 TF1프랑스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에서 아침방송 최고시청률 56%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새벽 6시 경, 오후 1시 경에 방영되고 있습니다. 시청률은 말할 것도 없겠죠. 최근 우리 애니메이션의 제일 큰 성과는 <아이언키드Ironkid>의 성공입니다. 미국 공중파 방송인 워너키즈에서 <이온키드Eonkid>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어 시청률 1위를 기록했습니다. 미국에서는 토요일 아침 7시부터 12시 사이, 즉 어린이 프로그램 황금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 것이죠. 재미가 없어서 시청률이 낮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시간대에만 한국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기 때문에 시청률이 낮은 것입니다.

프랑스의 TF1프랑스의 민영 텔레비전 방송사은 수익의 6%를 자국 애니메이션에 투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규모가 1년에 약 300억 원 정도 되는데요, 우리나라 방송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일종의 공공재인 방송사가 해외 작품만 수입하고 있다는 점이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제 적극적으로 우리 애니메이션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통로로서 게이트웨이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화산업의 궁극적인 힘은 콘텐츠에 있습니다. 작품이 많이 제작ㆍ유통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좋은 작품들이 탄생하게 되지요. 이런 면에서 인문학자들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요즘 우리 청소년들의 정신세계를 북유럽 신화가 지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데요. 영화와 온라인게임을 중심으로 그 오래된 신화가재탄생되어 머나먼 한국의 청소년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도 사실은 그런 이야기의 소스들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제주도만 보아도 1년의 70% 정도 비가 오고, 귀신이야기가 만 개가 넘는다고 하더군요. 우리도 북유럽처럼 이야기들은 많이 가지고 있는데, <반지의 제왕> 같은 작품은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런 이야기의 소재들을 발굴해 내고,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인문학자들이 해주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좀더 다양하고 탄탄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수 있겠지요. 이렇게 생산된 질 좋은 콘텐츠, 탄탄하고 건강한 게이트웨이가 지속가능한 한류의 전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